660화. 폐막
깊은숨을 들이마신 이준이 손에 힘을 주자 적홍색 구슬이 나타났다. 그때, 구슬이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을 받자 뜨거운 화염이 터져 나왔다. 이 화염은 바로 유씨 가문에서 얻은 ‘태양의 불’이었다.
‘오륜이화법(五輪離火法)!’
마음속에 울려 퍼진 분노의 외침과 함께 인결을 바꾸자 눈앞에 있는 5종 화염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화랑의 영혼, 합체!”
그때, 이준의 매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태양의 불로 만들어진 화랑 형체를 한 불의 정령이 나타났다.
“표범의 영혼, 합체!”
“사자의 영혼, 합체!”
“호랑이의 영혼, 합체!”
불의 정령 네 마리가 모두 나타나는 순간, 이준은 염력이 빠르게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교룡의 영혼, 합체!”
이준의 외침과 함께 마지막 별의 불꽃 역시 빠르게 흔들리면서 산처럼 거대한 교룡이 하늘 위에 나타났다.
“오륜이화법!”
다섯 마리의 불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자 뜨거운 온도가 퍼지면서 하늘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던 먹구름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광장 가까이에 있던 나무들도 바싹 마르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거대한 불의 정령들이 기이한 진법(陳法)을 그린 가운데에 이준이 서있었다.
“후…….”
체내 염력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느낀 이준은 깊은숨을 내쉬며 고요한을 바라보았다.
고요한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퍼져 나오는 소멸의 기운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오륜이화반(五輪離火盘)!”
이준은 상대방이 힘을 최고조로 끌어모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곧바로 인결을 바꿔 하늘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 순간, 거대한 불의 정령들이 포효하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준이 있던 공간이 그대로 붕괴되면서 거대한 균열이 하늘에 마구 생겨났다.
쾅쾅!
불의 정령들이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면서 이백 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오색 화반(火盘)이 이준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면서 퍼져 나오는 힘에 고겸익과 고허익 등 고족 장로들도 표정이 굳어버렸다.
천화존자는 하늘을 뒤덮은 오색 화반을 바라보며 눈빛이 더 뜨겁게 타올랐다. 이것이 바로 오륜이화법의 위력인가!
“고요한. 한 번 견뎌내 보시지!”
이준은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오색 화반을 받친 뒤 소리치며 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 순간 오색 화반이 콰르릉, 하는 번개소리와 함께 운석처럼 고요한을 향해 미친 듯이 날아갔다.
“반딧불이가 밝은 달과 맞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때, 고요한은 감았던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펴 허공을 눌렀다.
“대파괴의 손가락!”
그 순간, 고요한의 손가락에서 소멸의 기운이 허공에 나타나면서 공기가 모두 굳어버린 것처럼 멈춰버렸다.
쾅쾅쾅!
잠시 후, 정적이 깨짐과 동시에 두꺼운 먹구름이 강하게 요동치더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화가 아무리 강해도 고족의 천상계 무투기를 따라잡을 순 없다.”
고요한은 고개를 들고 하늘 위에 균열을 그으며 달려드는 거대한 화반을 바라보았다. 그때, 두꺼운 먹구름을 향해 오른손을 치켜들고 힘을 주었다.
펑!
그러자 먹구름이 순간 자리에 멈추더니 순식간에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백 미터가 넘는 검은색 손가락이 구름을 뚫고 나와 오색 화반을 강하게 눌렀다.
새까만 손가락에서 퍼져 나오는 소멸의 기운은 마치 모든 생기를 빨아들일 것만 같이 손가락이 하늘을 뚫고 내려오면서 허공에 커다란 균열 흔적을 새겼다.
이를 지켜보던 강자들은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일 저 손가락이 자신들을 향한다면 손가락에 닿기도 전에 몸이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이준. 대파괴의 손가락이 네 이화대진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똑똑히 보거라!”
고요한은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자신만만하던 그은 이준에게 이렇게까지 밀리면서 마치 따귀를 맞은 듯 얼얼했지만, 이제 괜찮다. 모든 게 이 손가락 하나로 모두 해결될 테니까!
“이준, 네가 죽어야만 이은이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러니 잘 가라!”
옷이 찢겨져 드러난 상반신이 온통 피투성이로 변한 이준을 뚫어지라 노려보던 고요한은 마음속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파괴하라!”
그때, 거대한 손가락이 쏜살같이 튀어 나가 거대한 오색화반을 강타했다.
콰과광!
운석이 충돌한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산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땅 위에는 커다란 균열이 거미줄처럼 빠르게 뻗어 나갔고, 특수한 돌로 만들어진 단단한 광장도 모두 무너져버렸다.
쿠궁!
충돌하면서 생겨난 에너지 물결은 소멸의 기운을 가득 이끌고 염력 장막에 부딪혔다. 그러자 염력 장막에서 큰 파동이 끊임없이 일렁였다.
“윽!”
그때, 염력 장막을 소환했던 세 장로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이내 재빨리 정신을 부여잡고 염력 장막이 무너지지 않도록 염력을 계속해서 주입시켰다. 하지만 천상계 무투기 두 개가 강한 충격을 주면서 생겨난 여파를 어찌 쉽게 잡을 수 있을까. 그 짧은 시간 안에 세 사람의 염력은 이미 바닥나고 있었다.
‘이렇게 일이 커지다니…….’
어느 누구도 이 싸움이 오래 갈 것이라 생각지 못했는데, 결투의 결과는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해버렸다. 이준이 고요한의 손에 패배하기는커녕 고요한의 최대 필살기까지 모조리 꺼내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고겸익, 고허익. 우선 가서 도와라!”
고산이라는 백발의 노인은 굳은 얼굴로 외쳤다.
“예!”
그러자 고겸익과 고허익은 급히 날아가 염력 장막 안에 염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염력이 들어가자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요동치던 염력 장막이 다시 안정을 찾았다.
까드득!
염력 장막이 안정을 되찾자 하늘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사람들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검은 손가락과 부딪힌 오색화반이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 두 무투기 중 고요한의 대파괴의 손가락이 이긴 것으로 보였다.
“허, 드디어 무너지는 건가…….”
“이준의 오색화반이 버티지 못했어!”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 소리쳤다. 두 사람 모두 최후의 필살기가 나온 가운데, 여기서 버티지 못하는 쪽이 지게 될 것이다.
까드득-!
오색화반은 균열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검은 손가락 역시 조금 흐릿해진 상태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준의 오색화반이 먼저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이준의 오륜이화반은 대파괴의 손가락의 상대가 아니야……!”
아라 등 사람들은 표정이 크게 일그러지면서 염력을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손을 꽉 쥔 이은의 눈에서도 금색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장천수 역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준이 고요한과의 싸움에서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빗겨나갔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장천수는 반드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이준의 목숨이 고요한의 손에 끊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준 도렴님의 염력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요.”
장천수가 나서려는 순간, 옆에 있던 예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응? 무슨 일이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장천수와 이은은 모두 흠칫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 순간 이준의 기운이 급격하게 약해지는 것을 느끼곤 깜짝 놀랐다. 천상계 무투기 덕분에 체내 염력이 충분했을 텐데, 오륜이화법 때문에 이렇게까지 약해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쾅!
그때, 오색이화반은 결국 검은 손가락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뿜어져 나온 불씨가 쏟아져 내리면서 거대한 바위가 모두 녹아내렸다.
“이준. 이제 죽어라!”
완전히 무너진 오색이화반을 바라보던 고요한은 악마처럼 씩 웃었다. 대파괴의 손가락 역시 에너지를 대부분 소모해버렸지만, 이준을 죽일 에너지는 아직 남아있었다.
이번 공격으로 승패가 완전히 결정된다.
“안 돼!”
이은은 결국 참지 못하고 금색 화염을 그대로 몸에서 뿜어냈다. 하지만 그때, 장천수가 급히 그녀를 막아서면서 외쳤다.
“잠깐!”
장천수의 시선은 조금 밖에 남지 않은 이화반에 꽂혀있었다. 그 부서진 이화반 뒤에는 이준의 몸이 있었다. 만약 대파괴의 손가락이 조금 남은 이 이화반까지 없애버리면 그 위력이 모두 이준의 몸에 전달되고 말 것이다.
장천수는 이화반 뒤에 서있는 이준을 주시했다. 이때 이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있었지만 두려워 보이기는커녕 야생 마수처럼 아주 매서웠다.
펑!
장천수가 이은을 막은 그때, 하늘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화반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자 고족 사람들은 이제야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준의 두 눈이 팍 떠졌다. 그리고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화염을 손으로 붙잡은 뒤 검은 손가락을 향해 강하게 튀어 나갔다.
“고요한. 기뻐하기엔 너무 이르다.”
그때, 예리한 강자들은 이준의 손에 손바닥 크기의 4종 불씨가 휘감고 있는 불연꽃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불연꽃에선 파멸의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쾅!
이준의 몸이 거대한 손가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리고 검은 손가락에 불연꽃이 부딪히는 순간, 검은 손가락은 강하게 흔들리더니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검은빛으로 변해 하늘을 가득 채웠다.
검은 손가락이 파괴되면서 생겨난 무서운 힘에 이준의 손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고 마치 혈인(血人)이 된 것처럼 온몸에 혈흔이 가득해졌다.
“고요한, 네까짓 게 내 목숨을 가져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이준은 쉰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이준은 창백해진 얼굴로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고요한을 향해 4색 불연꽃을 든 채 유성처럼 잽싸게 날아갔다.
그 순간, 고족 장로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역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결과. 이준, 역전승!
쉭-
이준의 손에서 빛나던 4색 불연꽃에서 파멸의 기운이 터져 나와 천지 에너지를 모두 뜨겁게 달궜다.
이준은 번개 같은 속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고요한과 10미터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그 순간 고요한은 불연꽃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에서 죽음의 기운을 느끼곤 대파괴의 손가락을 시전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피할 새도 없이 화려한 불연꽃이 집어삼킬 듯 가까워졌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공격하는 이준을 보며 고족 사람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 녀석, 고요한을 정말 죽일 생각이다.
“휴, 이준. 이쯤에서 봐주거라.”
불연꽃이 고요한의 몸에 부딪히기 직전, 한숨 섞인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이준의 손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연꽃이 순식간에 굳어지면서 온순해졌다.
이준은 당황한 눈으로 굳어버린 몸을 있는 힘껏 움직이려 해보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등이 굽은 노인이 이준의 앞에 서서히 나타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이 노인은 빨려 들어갈 것 같이 깊고 뚜렷한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통현 장로님…….”
이 노인이 나타나자 고겸익 등 몇몇 장로들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통현 장로라 불린 노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이준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메마른 손을 내밀어 이준의 손에 모인 불연꽃을 잡아 비틀자 파멸의 힘이 가득한 불연꽃이 그대로 부서졌다.
불연꽃을 없애고 나서야 통현 장로는 이준의 속박을 풀어준 후, 따뜻한 에너지를 소환해 이준의 몸을 모조리 감쌌다.
이 따뜻한 에너지에 목욕을 하자 이준의 몸에 가득했던 혈흔이 신기하게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놀란 이준은 흠칫했다. 사실 고족 안에서 고요한을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자리를 빌려 통현 장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통현 장로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의 몸을 천천히 훑었다.
“이족에 이런 대단한 인물이 있을 줄 몰랐구나. 이현이 이 소식을 안다면 분명 기뻐할 것이네. 고요한. 이번 시합은 자네가 졌다.”
말을 마친 통현 장로는 창백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고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의 말에 고요한은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마지막 순간에 통현 장로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이준의 손에 가루가 되어버렸을 거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의기양양하던 그는 이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겼으면 이긴 거고, 졌으면 진 거다. 패배를 인정할 용기도 없는데 어떻게 흑연군의 수장이 되고 흑연왕이 될 수 있겠느냐?”
꽉 쥔 주먹을 풀지 않는 고요한을 바라보며 통현 장로는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