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화. 강적
처음으로 7품을 받은 강자가 나타나자, 세 장로가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한참 뒤, 세 장로 중 하나가 진중한 표정으로 자금색의 붓을 꺼내 들었다.
“자금색 용붓이야!”
장로의 손에 들린 자금빛 붓을 보는 순간, 장내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로원의 협의에 따라 전공(戰功)이 뛰어나고 장래가 촉망되는 고진에게 자금색 족문을 부여한다.”
곧이어 장로의 손에서 에너지가 터져 나오더니 고진의 이마에 빠르게 자금색 문양이 새겨졌다.
색은 조금 연했지만, 처음으로 자금색 족문을 수여받은 것이니만큼 수많은 고족의 젊은이들이 부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혈통등급으로 봤을 때 고진은 사실 자금색 족문 등급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흑연군 내에서 명성이 매우 높고 4대 수장의 자격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자금색 족문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어요.”
이준이 고진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이은이 옆에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자금색 족문을 손에 넣은 고진은 평온한 표정으로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그는 이준이 있는 곳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에 이준 역시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주위의 온도가 싸늘하게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흑백의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장로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드디어 저 녀석 차례인가…….”
섬뜩한 기운을 내뿜으며 심사를 받으러 나아가는 고요한의 모습에 이준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광장 안에 들어선 고요한은 앞선 다른 젊은 강자들과 달리 무릎을 꿇지 않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하지만 얼핏 무례해 보이는 그의 행동에도 세 장로는 전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뛰어난 명성과 실력을 가진 대단한 강자인만큼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 장로가 손을 크게 휘둘러 커다란 원반을 고요한의 앞으로 보내자, 영롱한 빛이 천천히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요한, 자네 차례네.”
장로의 말에 고요한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담담한 표정으로 원반 위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이 원반 위에 닿는 순간, 강렬한 빛이 번쩍이더니 무려 여덟 개의 별이 원반 위에 떠올랐다.
“하나, 둘, 셋……. 여덟 개!!”
그와 동시에 장내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장로들 역시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8품이라니……. 역시 사대 수장답군!”
“아가씨도 여덟 개 뿐이지 않았소? 고요한이 아가씨를 곧 따라잡겠구려.”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 전 일이지 않소. 지금은 또 얼마나 발전했을지 모르지.”
장로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이은과 고요한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고요한의 심사 결과에 이은 역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고요한, 흑연국 사대 수장, 8성 투존, 혈통등급 8품, 자금색 족문을 부여한다.”
곧이어 자금색 붓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이며 고요한의 이마에 신비한 문양이 새겨졌다.
“후!”
자금색 족문은 그리는 데에도 상당한 염력이 소모되었다. 붓이 마지막 점을 찍는 순간, 장로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고족 장로가 붓을 떼자, 고요한의 이마에서 고진의 자금색 족문보다 훨씬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족문이 완성되었으니 내려가 보게. 다음…….”
족문을 완성한 장로가 웃으며 손짓을 하는 순간, 고요한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응?”
세 장로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성인식에서 한 사람에게 도전장을 내밀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적막을 뚫고 고요한의 목소리가 광장 위에 울려 퍼지는 순간, 의석에 앉아 있던 이준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영천이나 임혁을 비롯한 흑연군의 총령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이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 장로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에 따르면 대결의 상대는 고족의 강자들 중에서 골라야 하네. 외부 사람을 상대로 고르려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해야 하고. 알고 있겠지?”
고요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히 이준이었다.
“내가 널 지목할 거란 건 너도 알고 있었겠지. 고족에서 인정을 받고 싶다면 네 실력을 보여줘라. 거절한다면 오늘 안에 스스로 고계를 떠나야 할 거야.”
고요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내의 모든 시선이 빠르게 이준을 향했다.
“저 자가 우리 약족에서 버린 사람의 제자야? 오늘 내가 저 녀석을 골라 연금대회는 그저 소꿉장난일 뿐이라는 걸 일깨워주려 했더니, 고요한이 채갔군.”
높은 곳에 서있던 몇 몇 사람들이 난간에 기댄 채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 마. 고요한의 손에서 살아나온다면 너에게도 기회가 주어지잖아.”
옆에 있던 한 여자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녀의 이마에 새겨진 특수한 무늬로 봤을 때 그녀 역시 약족의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하. 그러기엔 좀 힘들어 보이는 걸? 고요한 저 녀석의 손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몇 없거든.”
* * *
“쳇, 내 목표를 다 뺏어가다니. 버텨라, 이준. 그래야 나도 좀 즐기지.”
광장의 다른 쪽 구석에는 검은색 의복으로 온몸을 감싼 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씩 웃음을 짓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혼족의 젊은 강자, 혼야였다.
* * *
“역시……. 결국 참지 못하고 발톱을 드러내는군.”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화현 역시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그게 고요한이라니……. 이준 오늘 제대로 잘못 걸렸는데.”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5성 투존은 중주에서도 찾기 힘든 인재지만……. 상대가 고족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 * *
“고요한! 이준은 우리 손님이야. 너무 지나치잖아!”
참다못한 이은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싫다면 거절하면 그만 아닙니까?”
요한이 이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싫다고 말하면 이 경기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요한의 말에 이은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변했다. 이준이 정말 도전을 거절한다면 고족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아가씨. 고요한의 말대로입니다. 모든 것은 당사자의 뜻에 달려있지요.”
그때, 저 멀리서 고산 장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은은 이준이 고계로 오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수모를 당할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고계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한편, 장천수는 말없이 이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서천우가 그렇게 칭찬한 아카데미 최고의 천재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준, 내 도전을 받아들이겠느냐, 아니면 꼬리를 만 개처럼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가겠느냐?”
요한이 이준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후…….”
계속되는 요한의 재촉에 이준은 짜증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준…….”
고요한의 공포스런 힘을 느낀 아라의 두 눈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준의 실력을 믿기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의 실력이 너무 막강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야…….”
이준은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라를 향해 가볍게 웃음을 지어보인 뒤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이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잘 됐어. 고족 사람들에게 내 실력을 보여줄 좋은 기회야.”
이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요한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는 점점 더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허. 담력이 제법이구나. 걱정말거라.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내가 구해주마.”
곁에 있던 장천수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원장님.”
이준은 씩 웃으며 인사를 남긴 뒤 곧바로 널따란 광장 안으로 날아갔다.
이준이 자신의 앞에 당당히 착지하자, 고요한의 얼굴에 더욱 더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왜 내가 너에게 결투를 신청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압니다.”
이준의 짤막한 답변에 요한의 몸에서 곧바로 서늘한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널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이 대결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요한의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살의가 가득했다.
“네.”
하지만 이준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또다시 짤막한 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이준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공기가 꽁꽁 얼어붙더니 고요한의 몸이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이준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이번 상대는 혼전의 구 천존보다도 강했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해도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 고요한의 손에 지게 된다면 이은과 영영 헤어져야 했으니 결코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준이 두 주먹을 움켜쥐는 순간, 자갈색의 화염이 폭발하며 고요한의 염력으로 인해 싸늘해진 공기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쾅!
하지만 이준이 자갈색의 화염을 앞으로 날리려는 찰나, 공간의 균열을 가르고 냉기를 머금은 손 하나가 나타나 그의 손목을 내리쳤다.
두 손이 충돌하는 순간 폭풍이 터져 나오며 거대한 광장의 바닥이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
거대한 균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광장 안에 있던 세 장로는 재빠르게 상공으로 올라가 광장에서 벗어났다.
“하!”
이준은 외마디 기합소리를 외치며 번개처럼 뒤로 몸을 날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이미 피로 물든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역력했다. 확실히 5성 투존인 이준의 실력으로 8성 투존인 고요한에게 대적하는 것은 무리인 듯싶었다.
“산의 힘!”
고요한이 빠르게 손을 움직여 인을 맺자, 눈부신 빛덩어리가 이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상대의 공격을 막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이준은 곧바로 번개의 움직임을 최대치로 시전하며 더욱 빠른 속도로 달아나며 잽싸게 인을 맺었다.
‘천계현의 불꽃, 제 1장! 제 2장! 제 3장!’
“육합자의 검!”
다음 순간, 이준의 손에 새까만 송곳이 나타나더니 치밀한 검막이 그의 온 몸을 감쌌다.
콰과광!
엄청난 에너지 인결이 검은 검막 위에 쏟아지며 사방으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펑!
곧이어 우렁찬 폭음이 울려 퍼지며 검은 그림자 하나가 광장 위에 내려앉았다.
“태양검!”
자리에 멈춰선 이준은 굳은 얼굴로 다시 한 번 검은 송곳을 휘둘렀다. 그러자 백 미터가 넘는 화염 폭풍이 터져 나와 고요한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내 도전을 받아들인 것이냐!”
고요한이 차갑게 웃으며 주먹을 움켜지자, 새하얀 얼음이 터져 나와 그의 팔을 완전히 뒤덮었다.
쾅!
거대한 화염 폭풍과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고요한의 주먹이 맞부딪히며 허공 위에 또다시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결과는 이번에도 이준의 패배였다. 새하얀 얼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자갈색 화염은 빠른 속도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이런 게 너의…….”
그러나 고요한이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자갈색의 화염 속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기이한 화염 연꽃 하나가 튀어나왔다.
“가라!”
이준이 인결을 바꾸자, 화련이 육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팽창하며 무시무시한 화염폭풍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쾅!
화염 폭풍이 터져 나오는 순간, 광장 바닥에 백 미터도 넘는 구덩이가 생겨나며 광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염력 장막이 거세게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