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6화. 수라 수장
고겸익이라는 장로가 물러난 뒤, 이은은 맑은 눈망울로 먼 곳에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봤다. 저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에서는 희미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요한…….’
그 살기가 누구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알아차린 이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요. 이준 오라버니.”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힌 이은은 이준을 바라보며 다시 생긋 웃음을 지었다.
마침 이준 역시 그녀가 쳐다보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강한 사람이네.”
이준이 말했다. 그 역시 뛰어난 영혼 탐지능력으로 멀리 있는 산봉우리에서 누군가가 살기를 내뿜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군.’
이준은 말없이 주먹을 움켜쥔 채 생각에 잠겼다.
고성에서 영천, 임혁 등 젊은 강자들을 무찔렀지만, 그것만으로 고족에게 인정을 받을 수는 없었다.
고진 역시 흑연군에서 뛰어난 인재이기는 했지만, 장로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강한 실력을 가진 자들을 꺾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으로써는 흑연군의 4대 수장을 꺾는 것 외에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을 방법이 없어보였다.
“가자.”
천천히 시선을 거둔 이준이 이은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네.”
이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나비처럼 날아올라 앞으로 나아갔다. 곧이어 이준 일행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산맥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먼 곳에 위치한 푸른 산봉우리에 서있던 사내 중 하나가 이준 일행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허, 역시 이족의 사람답군. 물러설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
은색 옷의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도전이라…….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군. 할 수 없지. 내일 성인식에서 내가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말을 마치는 순간, 고요한의 몸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하하. 고족과 이족의 결투라니, 정말 오랜만의 일이군! 아주 재미있겠어!”
은색 옷의 남자 역시 마지막 말과 함께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 * *
이은의 뒤를 따라 대나무로 만들어진 고풍스런 건물앞에 도착하자, 한 노인이 환히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선배님!”
건물 앞에 서있는 익숙한 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처럼 이준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허허, 10년 만에 이준 도련님이 이렇게 크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주 진땀이 나는 군요.”
세형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얘기해요. 이곳은 제가 조용히 수련하는 곳이라 평소엔 사람들이 별로 안 와요. 다른 곳은 오라버니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이은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준 일행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건물 안에 있는 응접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세형이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일찍 고계에 오셨군요. 저는 20년은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과연 아가씨의 안목이 보통이 아닙니다. 지금 도련님의 실력이라면 아가씨도 안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는 이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오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아가씨와 일부 장로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죠.”
곧이어 세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매년 이씨 가문 사람들을 잡아 오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으니……. 다행히 아가씨의 실력이 일취월장한 덕에 반대파의 의견을 누를 수 있었습니다만…….”
“영로…….”
이은이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젓자, 노인이 민망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나이가 먹으니 말이 많아지는군요.”
미소를 띤 채 이은을 바라보던 이준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고생 많았어.”
이준의 따뜻한 말에 이은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몇 년간 겪어 온 고생이 그 한마디로 모두 보상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라버니, 내일 바로 성인식이 시작돼요. 원래 성인식은 손님들과 아무 상관이 없지만……. 이족 사람들과 저 때문에 이번 성인식에서는 오라버니에게 관심이 쏠릴 거예요.”
이은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성인식에 참가하는 고족의 젊은이들은 직접 사람을 골라 결투를 벌일 수 있어요. 원래대로라면 고족의 젊은 강자들끼리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는 자리이지만…….”
“그들이 고족의 다른 투사가 아니라 나를 고를 거라는 말이지?”
이준의 질문에 이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오라버니를 이길만한 강자는 많지 않아요. 하지만 흑연군의 4대 수장만큼은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그들은 모두 8성 투존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장차 흑연왕 후보로 꼽히는 고족 최고의 인재니까요.”
설명을 이어나가던 이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이 네 사람 중 오라버니에게 결투장을 내놓을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바로 흑연군의 수라라고 불리는 고요한이에요.”
“수라, 고요한이라…….”
조용히 고요한이라는 이름을 되새겨보던 이준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방금 산맥에서 살기를 내뿜던 자가 그 사람이지?”
“네.”
이은은 이준이 고요한의 기운을 알아챘다는 것에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한은 투제의 피를 아주 짙게 물려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고족의 장로들이 저와 혼인을 시키려는 사람도 바로 그 사람이고요.”
이은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자라면 분명 내일 성인식에서 오라버니를 지목할 거예요. 만일 그곳에서 오라버니를 쓰러뜨리면 중립을 지키던 고족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편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니까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준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패배한다면 이은을 잃게 되겠지만, 반대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요한을 쓰러뜨린다면 더 이상 둘의 관계를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 * *
밤하늘 위에 청량한 달빛이 물처럼 대지 위로 흘러내리며 산맥 전체를 비추었다.
산맥의 중앙에 자리한 수십 개의 건물들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면 전당과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는 적막만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어두운 산봉우리에서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저 멀리서 빛을 발하고 있는 고족의 건물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안 들어갔어요?”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들려오더니 청색 옷을 입은 여인이 나무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고계라고 해서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바깥세상과 크게 차이는 없네.”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고개를 돌려 이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받아야 하는 압력은 외부세계보다 훨씬 심해요. 고성 산맥은 모든 고족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성지로 추앙받는 곳이에요. 그래서 몇 년 사이 수많은 백성들이 자신의 후손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죠.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감도 큰 법……. 그동안 자신의 몸에 흐르는 투제의 피가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자결한 사람들도 제법 많이 봤죠.”
이은이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먼 곳에서 보이는 전당을 바라보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고족도, 고계도, 생각한 것만큼 편하지는 않은가 보네.”
아라가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 이은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준 말하는 거지? 습관 됐어. 나도 그 녀석에게 빚진 게 많으니까. 어떻게 해야 그 빚을 다 갚을지 고민하고 있어.”
“고마워요.”
이은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아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로 저 녀석과 결혼할 생각이야? 고족의 내부 문제는 둘째 치고, 같이 다니다보니 이준 저 녀석 여자 문제가 꽤 복잡한 것 같은데 말이야.”
아라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이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오라버니 주변에 여자가 많이 따르는 것 같기는 하더라고요. 하지만 언니는 그냥 친구고, 예린이라는 아이는 그냥 오라버니를 따라다니는 시종 같던걸요. 만일 바람을 피는 거라면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죠.”
말을 마친 이은은 아라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제대로 자초지종을 알아보지도 않고 화부터 내고 싶지도 않고요. 어찌됐든 내일이 성인식이니 얼른 쉬세요. 앞으로도 오라버니를 지켜주세요.”
이은이 화를 삭이고 히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넌?”
이은은 이어지는 아라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말없이 몸을 돌려 산 중턱에 위치한 숙소를 향해 날아갔다.
조용히 이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날아갔다.
* * *
햇빛이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할 무렵, 고성산맥 상공에서 수백 개의 그림자가 날아다니며 경쾌한 북소리가 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끼익-.
굳게 닫혀있던 문이 서서히 열리며 깔끔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이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라버니, 잘 쉬셨어요?”
문을 열자, 이미 잠에서 깨 기다리고 있던 이은이 빙긋 웃으며 이준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이준이 붉어진 얼굴로 조용히 이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성인식이 곧 시작되지?”
“네. 우리도 가요.”
이은이 웃으며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새하얀 독각수(獨角兽)가 두 날개를 길게 펼치고 날아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이은과 이준 일행은 빠르게 독각수의 등에 올라 전당을 향해 유성처럼 날아갔다.
몇 분 만에 수많은 전당이 위치한 곳에 도착한 독각수는 이은의 손짓에 따라 전당의 중심지대에 서서히 내려앉았다.
이준 일행이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집중됐다.
“가요.”
이은은 사람들의 시선을 가르고 이준 일행과 함께 기이한 기운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광장 중심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광장 주위에는 검은색 갑옷을 입은 흑연군 전사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광장 주위에는 일찍 도착한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이은은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듯 그대로 광장 중심에 있는 의석으로 향했다. 이준 일행 역시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뒤를 따라 광장의 중심부로 걸어갔다.
챙!
그러나 이은이 의석에 앉기 무섭게 뒤에서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금색 갑옷을 입은 두 전사가 장창을 이용해 이준 일행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이준의 앞을 막아선 두 고족 전사의 모습에 이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비켜!”
이은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자, 두 전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가씨. 그곳은 외부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입니다……. 용서하시지요.”
그때,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고겸익과 비슷하게 생긴 노인 하나가 뒷짐을 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아가씨, 가형(家兄)의 말이 맞습니다. 이준 군은 아가씨의 친한 친구지만 이곳에 들어갈 자격은…….”
곧이어 그의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말을 한 것은 바로 고겸익 장로였다.
고겸익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은의 눈에서 날카로운 금색 화염이 폭발했다.
“고겸익, 고허익. 자네들이 누굴 괴롭히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우리 가람 아카데미의 제자를 건드리는 것은 그냥 지나갈 수 없지.”
이은과 두 장로가 날 선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서있을 때, 또 다른 목소리 하나가 하늘 위에 울려 퍼졌다.
“장천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두 장로가 굳은 표정으로 하늘 위를 바라보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