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화. 고계 진입
“이곳에서 고성 산맥까지 반나절 정도는 걸린다고 하니까 잠깐 쉴 곳을 찾아보자.”
말을 마친 이준은 일행들과 함께 쉴 만한 곳을 찾았다.
비행정의 크기는 실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디를 가도 완전 무장한 흑연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족 입장에서는 외부인들이 고계에 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 하긴, 에너지가 이렇게 짙은데 누가 몰래 남아 수련을 할지도 모르는 거니까.’
이준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행정의 함수에 도착하니 한 장발의 사내가 찻잔 두 개가 놓인 탁자 앞에 앉아 조용히 차를 들이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족에서 오셨군요. 이리 앉으시지요.”
그때, 옅은 웃음소리가 이준의 귓가에 들려왔다.
이준은 잠시 자리에 멈춰 아라와 눈을 맞춘 뒤 그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고족의 사람입니까?”
장발의 사내는 아주 평범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제 이름은 고진이라고 합니다.”
장발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있는 흑연군의 전사들을 훑어보았다.
사내를 바라보는 흑연군 전사들의 눈빛에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했다. 심지어 둘째 총령인 임혁을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우러러보는 느낌이었다.
“흑연군 최고 총령이십니까?”
이준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러자 장발의 남자는 찻잔을 들어 올리던 손을 멈추고 씨익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족이군요.”
“여기서 날 기다렸다가 영천과의 일에 대해 따질 생각이었습니까?”
이준이 굳은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려주어 고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녀석들이 복수를 해달라며 저를 찾아올 리도 없고요.”
고진의 온화한 태도에 이준은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준이 만나온 모든 젊은 강자들 중 가장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금도 오만하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보기 드물게 온화하고 친절한 편에 속했다.
“왜 비행정에 이렇게 많은 흑연군 전사들을 태우고 있는 줄 아십니까?”
“이 사람들이 고계에 남을까봐 걱정이 되는 거겠지요.”
고진의 물음에 이준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건 이유 중 하나일 뿐이오. 고계에는 수많은 고족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데, 투제의 피를 가진 그들은 우리 고족의 뿌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중요한 존재들로, 우리는 외부 종족들이 그 피의 힘을 파괴할까 걱정하는 것이오. 그래서 이렇게 삼엄한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지요.”
고진은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추고 이준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주민들조차 그러할 진데, 고족의 핵심 구성원이라면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요. 그리고 그런 중요한 인물이 다른 종족의 사람들과 혼인을 하려 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고족의 규칙입니다.”
이준이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압니다. 하지만 저에게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군요. 말 몇 마디로 당신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우리에게 있어 투제의 피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해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고진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아가씨를 좋아한다면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족은 이미 몰락했으니…….”
고진의 말에 이준은 손가락에 끼워진 저장 반지를 천천히 매만지다 갑자기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투제의 피, 그게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의 말에 고진 역시 씩 웃음을 지었다.
“지금 고족이 이렇게 강성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어느 수준에 달해야 혈통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투성.”
고진이 짤막하게 답했다.
“그럼 내가 투성이 되도록 하죠.”
“너무 간단하게 말하시는군요. 제가 말씀드린 것은 반투성이 아니라 진정한 투성입니다.”
이준의 단호한 태도에 고진이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투존 최고급 강자는 우리 고족에도 넘쳐나지만, 일생을 다 바쳐도 투성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 확실히 뛰어난 사람이지만, 우리 고족에는 당신보다 더 뛰어난 인재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 중에도 진정한 투성이 되는자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요. 그런데도 본인이 투성이 될 수 있을 거라 자신하십니까?”
“당신들은 고족 사람들이지만 난 아니고, 당신들은 투제의 피로 강해진 사람들이지만 난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투성이 될 수 있을지, 아닌지는 시간이 증명해줄 겁니다.”
고진은 굳은 표정으로 한참동안 이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부디 투성이 되어주시기를 바라지요. 하지만 투성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아가씨와 멀어지시오.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니.”
“충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이씨 가문의 쓰레기로 불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포기해본 적이 없습니다. 투왕 시절부터 영혼의 궁전과 싸움을 벌여왔던 저인데, 투존이 된 지금 고족을 두려워할 것 같습니까?”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고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쾅!
그때, 갑자기 군함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군함 밖으로 녹음이 무성한 산맥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성산맥에 도착한 건가…….”
안개구름에 뒤덮인 산맥에 점점 가까워지자 이준의 가슴이 전에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산봉우리를 바라보자, 저 먼 곳에 청색 옷을 입은 여자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 순간, 이준은 그 청색 옷을 입은 여인이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고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산봉우리 위에 여신처럼 서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몇 년 동안 그녀가 직접 마중을 나온 사람은 이준이 처음이었다.
“이준씨, 만일 투성이 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큰 시련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니, 부디 투성이 되어주십시오.”
이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진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새삼 이은이 얼마나 큰 결단을 내린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 * *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산맥의 상공 위에 거대한 군함이 서서히 멈춰서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군함 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뱃머리로 모여 발밑에 펼쳐진 험준한 산맥을 바라보았다. 산맥에서 퍼져 나오는 강한 기운에 많은 사람들은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고족의 근거지답게 곳곳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허허, 고족 귀빈 여러분. 모두 내리시지요!”
군함 안에 울려 퍼지는 노인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공손히 답한 뒤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산맥의 중앙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곳은 바로 고족이 손님들을 대접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준은 여전히 자리에 멈춰선 채 저 멀리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산봉우리 위에 있던 이은이 군함 앞으로 선녀처럼 사뿐히 날아왔다.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과 의아함이 섞인 눈빛으로 갑자기 나타난 어여쁜 여인을 바라보았다.
꿈에도 그리던 익숙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자, 이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오라버니.”
이은이 군함 위에 내려앉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이준의 입가에 더욱 환한 미소가 번져갔다.
“갈수록 예뻐지네.”
이준이 손을 뻗어 이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쩐지 고족의 젊은 강자들이 저 녀석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더라니……. 저 여자가 바로 고족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그 아이 맞지?”
군함 한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염족(炎族) 청년 하나가 감탄하듯 말했다.
“허허, 이준은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이 수준까지 올라온 진정한 강자야. 우리도 긴장해야하는 수준까지 오른 녀석이라고. 일반인은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저 녀석이라면 염족이 되살아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화현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던 고족의 강자들은 말없이 이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따라와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은이 산맥을 향해 날아가며 말했다.
이에 이준은 못 당하겠다는 듯 절레 절레 고개를 저은 뒤 그녀의 뒤를 따라 산맥 안으로 날아갔다.
“좋아. 이렇게 된 거 고족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자고!”
그러나 이은의 뒤를 쫓아 산맥으로 날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멀리서 무형의 에너지가 터져 나왔다.
펑!
정체 모를 강자가 뿜어낸 기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이준의 몸에서 뜨거운 화염이 폭발하며 새파란 하늘 위에 자갈색의 화염이 구름처럼 퍼져나갔다.
“흠……. 불꽃의 위력이 아주 제법인걸.”
온 하늘을 뒤덮은 자갈색 화염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에 반응하듯, 화유진의 이마에 그려진 화염 문양이 춤을 추듯 꿈틀거렸다.
뜨거운 열기로 무형의 에너지를 몰아낸 이준은 자신을 향해 손을 쓴 자가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만나자마자 고족의 손님에게 손을 쓰다니! 장로라는 자들이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그때, 앞서가던 이은이 차가운 눈빛으로 산맥 깊은 곳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오해입니다, 아가씨. 오랜만에 이족의 사람을 만나니 잠시 그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곧이어 허공 위에 회색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8성 투존…….’
노인의 싸늘한 시선을 느낀 이준은 속으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강자들은 물론이고, 장로들마저 자신을 좋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고겸익 장로. 오늘은 귀빈들이 오시는 날인데 너무 무례하지 않소! 물러가시오. 다음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
그때, 산맥 깊은 곳에서 또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겸익은 당황한 듯 이은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이준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몸을 돌려 빠르게 사라졌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고겸익이 떠나자 이은이 이준을 향해 날아오며 물었다.
“괜찮아.”
“휴……. 이제 제가 왜 실력을 키우기 전까지는 이곳에 오면 안된다고 말했는지 알겠죠?”
이은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내 실력이라면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테니까.”
자신감 넘치는 이준의 태도에 이은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결코 쉽지는 않을테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어떠한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으리란 마음이 샘솟았다.
* * *
험준한 산봉우리 위에서는 한 사람이 뒷짐을 진 채 이준과 이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색과 흰색이 뒤섞인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두 눈이 드러났다.
“이준, 이제야 왔구나.”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은색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고요한, 이은과 저 녀석의 감정이 꽤나 깊어 보이는데, 이대로 포기할 텐가?”
은색 옷을 입은 사내는 흑백 머리카락의 남자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족의 사람이 아니니 이은과 함께 할 수 없다. 고집을 피우겠다면 내가 직접 쓴맛을 보여주지.”
“만약 저 녀석이 떨어지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면?”
“별수 있나. 죽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