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4화. 천상무덤
3일 동안 이준 일행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임혁 역시 그들의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혼야라는 혼전 사람이 나타난 이후, 이준의 정신은 모두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혼야의 태도로 보아 그는 분명 혼족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강자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7성 투존 강자 두 명의 수호를 받고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혼야의 말 덕분에 이현의 죽음에 관한 수수께끼도 풀 수 있었다. 아마도 영혼의 궁전과 이씨 가문의 악연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임이 확실했다.
스승님과 아버지의 일에 이어 자신의 선조의 일까지……. 확실히 영혼의 궁전, 혼족과는 끝장을 봐야할 것 같았다.
* * *
셋째 날 아침이 밝기 무섭게 고성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이 바로 고계로 향하는 통로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호기심이 가득 한 눈으로 그 신비한 곳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 일행 역시 빠르게 출발할 채비를 마친 뒤 숙소를 빠져 나와 엄청난 인파 사이에 섞여 도시 중심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고성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호수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의 물은 아주 맑고 깨끗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수심에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여러분. 고계가 곧 열립니다. 고계는 아주 넓으니 함부로 돌아다니다간 방향을 잃고 말 겁니다. 게다가 길을 잘못 들면 공허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 있으니 모두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호수 중앙에 어제 만났던 고손 장로가 나타나 큰소리로 외쳤다.
“고계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나와 각자 여러분을 모시고 고계의 중심인 ‘고성산맥’으로 데려다 줄 겁니다. 고계 안에는 고족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여나 고족과 마찰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는 다들 알 거라 믿습니다.”
고손의 말에 호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족의 주민들은 고족의 최하층이지만 가장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번영하면서 고계 안에 있는 고계의 주민들이 셀 수 없이 많아졌다. 그들의 몸속에는 아주 극소량의 투제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투제의 피가 강해지면 백성들도 진정한 고족의 전사가 될 수 있지.”
천화존자가 웃으며 고족의 주민에 대해 설명했다.
“고족이 오랫동안 쇠락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네요.”
그의 설명에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조용하던 호수가 갑자기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허공이 일그러지며 호수 깊은 곳에서 눈부신 빛기둥이 터져 나왔다.
쿵!
곧이어 호수 위 공간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공간 대문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고계로 통하는 공간 대문이 열렸습니다. 모두 들어가시지요!”
거대한 공간 대문을 바라보던 고손이 힘차게 외쳤다.
고손의 목소리가 호수 전체에 울려 퍼지자,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대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
사람들이 들어갔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준은 그제야 씩 웃으며 수면 위를 밟고 공간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공간대문 주위는 흑연군 전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가장 앞에 서있는 것은 바로 영천과 임혁이었다. 양호익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날 당한 부상으로 요양 중인 것이 틀림없었다.
이준 일행이 다가오자 임혁은 두 눈을 얇게 뜨며 눈을 부라렸지만, 고손 장로가 있어서인지 직접 손을 쓰지는 못 했다.
“이준. 얌전히 구는게 좋을 거야. 고계 안에서 널 처리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준이 자신의 옆을 지나가자, 임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이 많네요, 둘째 총령. 제 앞가림이나 잘 하시죠.”
이준 역시 지지않고 그렇게 맞받아친 뒤 그대로 공간대문 속으로 사라졌다.
“하!”
이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임혁은 주먹을 움켜쥔 채 분노로 몸을 떨었다.
“개 같은 놈. 어디 고계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지 두고 보자.”
* * *
새파란 하늘 위에는 하얀 구름이 솜사탕처럼 달려 있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초원 위에 있는 풀들이 파도처럼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쉭!
잠시 후, 고요한 하늘 위에 커다란 공간 대문이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가 고계인가? 천지 에너지가 외부세계와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짙어.”
“역시 투성 강자가 만든 공간답군.”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고 있는 사이, 이준 일행도 공간대문을 빠져나와 짙은 에너지를 느끼고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지에너지가 엄청난 걸. 여기서 수련한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실력을 올릴 수 있겠어.”
이준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이런 이공간은 투기대륙처럼 크진 않기 때문에 에너지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다. 그래서 훨씬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거란다.”
천화존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쾅!
그 때, 저 멀리에서 굉음이 들려오더니 커다란 먹구름이 하늘 전체를 집어삼킬 듯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건…… 비행정?”
하지만 곧 이준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 먹구름이 진짜 구름이 아니라 고족의 비행정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고족이야. 중주의 다른 세력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어…….’
콰르릉!
곧이어 비행정이 하늘 위에 서서히 멈춰서더니 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허, 여러분. 모두 올라타시지요.”
노인이 말을 마치자 비행정을 둘러싸고 잇던 먹구름이 서서히 갈라지더니 군함의 형체가 드러났다. 사람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빠르게 비행정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정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했으며, 그 안에는 흑연군의 전사들이 긴 창을 든 채 경비를 서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탑승하자, 조금 전 들려왔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선체가 흔들리며 격렬한 공간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간 속을 날고 있어.”
“허허, 이 비행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북공선이라고 합니다. 투존 최고급 강자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지요.”
이준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 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여왔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새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씩 웃으며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선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정원에서 봤던 염족의 사내였다.
“설명 감사합니다.”
상대의 태도에서 딱히 적의가 느껴지지 않자, 이준 역시 웃으며 예를 갖췄다.
“허허, 아닙니다. 화현이라 합니다.”
하얀 의복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준입니…….”
이준은 웃으며 대답하려 하자 화현은 갑자기 손을 저었다.
“연금대회 우승자 이준, 허허, 모를 리가 있습니까.”
“염족의 분이시지요?”
이준의 질문에 화현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염족과 이족의 사이가 아주 돈독했다고 들었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군요. 이번에 고계에 온 것은 천상무덤 때문이십니까?”
“천상무덤이요?”
천상무덤의 존재를 모르는 듯한 이준의 반응에 화현은 잠시 멈칫하다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경솔했군요. 이현 선배님이 돌아가신 후, 이족은 한 번도 고계에 오질 않았지요.”
“천상무덤이 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이준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곧 알게 될테니 제가 말씀을 드려도 되겠지요. 천상무덤은 고계의 아주 오래된 유적입니다. 이곳에는 수많은 강자들의 무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이족의 대선배인 이현님의 무덤도 있지요.”
이준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천상무덤이 자신의 선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고계에 온 목표 중 하나가 선조의 무덤을 방문해 보는 것이었는데, 화현의 말로 미루어보아 아마 어렵지 않게 이현의 무덤에 가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상무덤 안에는 옛 강자들의 힘이 남아있지요. 그들이 새겨둔 봉인을 공격하면 그 안의 힘을 흡수할 수도 있고, 실력도 높일 수 있지요.”
화현이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그 봉인은 고급 연금비약보다 강력하고, 계속 흡수한다고 효과가 떨어지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천상무덤의 시간이 외부세계보다 훨씬 느리다는 겁니다. 천상무덤에서의 5일이 이곳에선 하루 밖에 되지 않죠.”
“뭐라구요?”
순간 이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화현의 말대로라면, 그 안에서 한 달을 보내도 외부세계에서는 겨우 6일 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 안에서 백 년을 수련한다 해도 외부에서는 고작 20년 밖에 흐르지 않을 테니, 충분한 인내력이 있다면 투성이 되어 나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허, 하지만 20년에 한 번만 나타나 3년 후면 다시 사라집니다. 외부세계의 시간으로는 반 년 정도의 시간 밖에는 들어가 있을 수 없지요.”
화현이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이 천상무덤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은 고대 8대 세력의 사람들 뿐, 다른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준 군은 이족의 후예이니 그곳에 들어갈 자격이 있겠군요.”
“이족은 이미 몰락한지 오래인데,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
화현의 말에 이준의 가슴이 더욱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3년이면 아주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족이 몰락했어도 8대 세력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곳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은 이준 군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화현의 말에 이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허허, 별 거 아닙니다. 정말 천상무덤에 들어가게 된다면 협력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다른 종족들은 우리 염족과 원한이 깊으니, 이족의 후예와 손을 잡는 편이 저희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화현의 말은 그 안에서 위험이 있다면 손을 잡자는 의미였다. 아마 이준 일행이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준 역시 고족의 젊은 강자들과 혼족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염족의 실력자들에게 도움을 받는 편이 좋았으니, 염족과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혼족과 약족을 조심하시오. 혼족은 과거 이족과 철천지원수였습니다. 이족이 몰락한 것도 그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약족은 당신의 스승, 약선과 관계가 좋지 않으니 당신에게 무언가 손을 쓸지도 모릅니다. 제가 알기로 이번에 약족에서 보낸 사람은 분명 약족에서 ‘인약자(人藥子)’라고 불리는 약성지일 겁니다.”
‘인약자, 약성지……. 호칭과 이름이 참 이상하네.’
이준은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며 못 마땅하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
“이름은 이상해보여도 8레벨 중급 연금술사입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화현의 충고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8레벨 중급이라면 확실히 괜찮은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공격한다면, 그들이 버린 약선의 제자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화현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이준은 한참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도 저 녀석의 실력을 읽을 수 없다니……. 역시 대단하구나.”
화현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사라지자, 천화존자가 이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말에 이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화현도 분명 7성 이상의 투존 강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6성 투존인 천화존자가 그의 실력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준은 그 때 봤던 면사를 쓴 여자의 실력이 더 궁금했다.
그래도 화현의 행동으로 보아 염족은 그에게 호의적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