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3화. 염족
“이럴 수가…….”
정원 한켠에 서있던 영천과 5총령은 입을 다물지 못 하고 숯덩이가 되어버린 양호익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거야!”
영천이 주먹을 바르쥐며 중얼거렸다. 이준이 자신의 실력을 앞질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5성 최고급 투존인 양호익을 이렇게 쉽게 쓰러뜨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였다.
“흠……. 이 정도면 아가씨가 자신만만하게 그런 말을 할만한 걸.”
5총령의 말에 영천의 표정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 사이, 이준에게 당해 쓰러져 있던 양호익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옷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있었고 입 주변에는 혈흔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그의 패배였다.
하지만 양호익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핏대가 선 두 눈으로 이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5성 투존 최고급 수준의 실력에 고족의 고급 무투기까지 사용했는데, 고작 5성 투존에 불과한 이준에게 어찌 이렇게 무참하게 패배할 수 있단 말인가.
“엿 같은 놈,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는 이미 분노와 수치심으로 제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평생 처음 겪는 일 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보다 실력이 낮은 5성 투존이 아닌가. 만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런 놈에게 졌다는 것이 고계에 알려지면 자신은 총령의 자리를 내려놔야 할지도 몰랐다.
펑!
그러나 이준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양호익이 선혈을 토해내며 바람에 나뒹구는 나뭇잎마냥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 * *
“큭큭……. 양호익은 역시 멍청하다니까.”
양호익이 이준에게 달려들었다가 비참하게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러다니자, 정원 한켠에 있던 곳에서 아주 조그맣게 그를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 곳에는 남자 셋과 여자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서있었고, 그들의 이마에서는 화염의 기운을 머금은 신비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조금 전 들려온 양호익을 비웃은 것은 네 사람 중 헤벌쭉하게 웃고 있는 남자였다.
“영혼의 힘이 심상치 않아. 저 정도 수준의 영혼탐지 능력이라면 어지간한 속도로는 절대 놈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겠군.”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면 그의 곁에 서있는 담홍빛 의복을 입은 여인은 두 사람의 대결에 관심조차 없다는 듯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화유진, 네가 보기에는 저 녀석의 실력이 어떤 것 같아?”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여자에게 물었다.
“글쎄, 난 저 녀석의 실력보다 불꽃에 더 눈길이 가는걸.”
“허…….”
화유진의 말에 그녀와 함께 앉아있던 세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 * *
온몸이 피로 물든 양호익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분노를 참지 못한 그가 몸을 날리려는 찰나, 돌연 싸늘한 목소리가 정원 안에 울려 퍼졌다.
“양호익!”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양호익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네 놈이 아주 고족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구나!”
곧이어 텅 빈 허공에 균열이 생겨나더니 은색 갑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둘째 형님!”
사내가 나타나자, 정원 한쪽에서 이준과 양호익의 대결을 바라보던 영천과 다섯째 총령이 번개처럼 날아와 예를 갖췄다.
“하!”
둘째 총령은 두 사람을 보고는 더욱 살기로 눈을 빛내며 이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준, 고족의 땅에서 이런 소란을 일으키다니, 배짱이 아주 대단하군.”
“고족이 먼저 제안한 시합입니다. 내가 더 강한 것도 문제가 됩니까?”
이준의 대답에 그는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흑연군 둘째 총령, 임혁이라고 하네. 나와도 한 번 붙어보겠소?”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된 김에 확실한 실력 차를 보여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이준은 임혁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고계에 가기 전에 자신의 실력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는다면 고계에 가서 더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물러나서는 고족의 장로들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공개적으로 자신과 혼인을 맺겠다고 선언한 이은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임혁, 뭐 하는 짓이냐!”
하지만 그 순간, 벽력같은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며 회색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고손 장로님.”
갑자기 나타난 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임혁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이놈들! 감히 초대장을 받아온 손님을 괴롭혀? 고족의 예법에 이런 것도 있었단 말이냐!”
고손이라 불린 노인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노인의 불호령에 임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이준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네 이놈! 어서 사과하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고손이 한 번 더 고함을 치자, 임혁은 눈에 핏대를 세운 채로 이준을 향해 건성건성 고개를 숙이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양호익을 부축해 자리를 떠났다.
임혁을 돌려보낸 고손은 곧바로 이준에게 다가와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족의 사람이 다시 우리 고족에 왔구려.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됐소. 아가씨의 일 때문에 우리 고족의 젊은이들이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오. 이 늙은이의 체면을 봐서라도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오.”
고손의 정중한 태도에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괜찮습니다. 이제라도 말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노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이준은 저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을 노려보는 기운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원 한켠에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자 하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미간에서는 기이한 문양이 빛을 내뿜으며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이준의 몸속에 자리한 천지의 불꽃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지의 불꽃이잖아……. 설마 스승님이 말한 염족의 강자인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의 눈에서 화염이 일렁이더니 주위의 공기가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허공에서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여인의 앞에 놓여있던 탁자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무슨 일이야?”
그 때, 근처에 있던 아라가 황급히 달려와 이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이준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역시 8대 세력 중 하나답게 엄청난 화염이야.’
“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을 느낀 이준은 그대로 일행을 이끌고 정원을 빠져 나갔다.
“화유진, 어때?”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얀 의복의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아주 강한 불꽃이야.”
화유진이라는 여자의 호수처럼 잔잔한 눈망울에 또 다시 불꽃이 일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의 홍연의 불꽃과 저 녀석의 불꽃 중에 뭐가 위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걸.”
“넌 거기에만 관심 있구나.”
하얀 의복을 입은 사내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준은 분명 이족의 사람일 거야. 이미 끝장난 집안인 줄 알았는데 저런 실력자가 나오다니……. 아주 재미있네.”
“이족은 고족과 가장 가까운 세력이었지만, 그것도 다 옛날 얘기지. 고족 장로들의 반대가 없었다면 이곳에 남아있는 이현의 무덤도 이미 사라졌을 거야.”
헤벌쭉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을 쳤다.
“투성 최고급 강자의 무덤인데, 제 아무리 고족이라 해도 별 수 있겠어?”
하얀 의복을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20년에 한 번 열리는 고계의 천상무덤 뿐이야. 8대 세력의 사람들은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응. 다른 세력의 강자들도 모두 그걸 노리고 이곳에 온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뭐가 좋다고 고족의 성년식을 축하하러 오겠어.”
말을 마친 하얀 의복을 입은 남자는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와 함께 있던 염족의 젊은 강자들도 느긋하게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골치 아프네. 설마하니 초대받아 온 손님에게 싸움을 걸 줄이야. 그 장로님이 아니었다면 그 임혁인지 뭔지 하는 총령도 너와 사생결단을 낼 기세였어.”
침실로 돌아가는 길에 아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예상했던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자고.”
하지만 정작 이준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둘째 총령이라는 임혁의 실력은 6성 투존 정도로, 그 정도라면 지금의 이준에게 있어 큰 위협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걱정하는 건 8대 총령이 아니라 그 4대 수장이야. 그들이야말로 흑연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니까. 흑연왕이 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 바로 반투성 강자라는 거야.”
아라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반투성이라…….”
이준은 순간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굳은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일 그들이 투존 최고급 강자를 넘어 반투성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여간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어쩌겠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봐야지.”
이준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바로 그 때, 저 멀리 음험한 기운을 내뿜는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준이 그들을 발견한 것과 거의 동시에 아라와 천화존자도 그들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염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네가 바로 이족의 이준이지?”
선두에 서있는 사람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구지?”
이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그러자 선두에 있던 흑색 의복의 남자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사내의 몸에서 아주 익숙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영혼의 궁전?”
“난 그 이름보다 혼족이라고 불러주는 게 좋은데 말이지.”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몸에서 자갈색의 화염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정해. 난 너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그저 우리 혼족을 곤경에 빠뜨렸던 이족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직접 보고 싶어서 온 것뿐이야.”
“다 봤으면 이제 꺼져.”
아라가 차갑게 웃으며 손을 휘두르자, 공간이 갈라지며 회색의 염력이 검은 옷을 입은 혼족의 강자를 향해 날아갔다.
“무엄하구나!”
하지만 아라의 염력이 그에게 닿기도 전에 곁에 있던 두 사람이 칠흑 같은 쇠사슬을 휘둘러 회색 염력을 막아냈다.
쾅!
회색 염력과 검은 사슬이 맞부딪히는 순간, 무시무시한 강풍이 사방을 휩쓸며 주위의 나무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성질이 불같은 여자군. 난 그저 경고를 하러 온 것 뿐이야. 망가질대로 망가진 이족 따위가 혼족의 앞을 막아섰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쥐 죽은 듯이 얌전히 있으라고 말이지.”
선두에 있던 흑색 의복의 남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자, 새카만 망토 사이로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다.
“걱정 마. 곧 그 말을 주워 담고 싶어지게 만들어주지.”
이준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군. 하지만 네 마지막은 이현과 별 다를 게 없을 것 같은데…….”
흑색 의복을 입은 남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들의 몸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내 이름은 혼야다. 기억 해둬. 네 조상인 이현을 죽인 사람이 바로 우리 조상님이지. 그리고 이번에 널 없앨 사람은 아마 내가 될 것 같군.”
허공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준은 무표정으로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숙소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전에 없는 살의로 불타고 있었다.
‘혼야라고 했지. 고계의 이현 조상님의 무덤 곁에 네 무덤을 만들어주마.’
아라는 앞서가는 이준의 뒷모습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