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9화. 8대 세력
흑치웅이 알려준 길을 따라 반나절 정도를 날아가니 익숙한 풍경이 이준의 시야에 나타났다.
이준이 성운각 근처에 다다르자, 성운각의 회의실 안에서 풍존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약로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돌아온 게냐?”
곧이어 회의실 안의 공간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이준과 예린이 걸어 나왔다.
“또 실력이 늘었구나.”
이준의 실력이 크게 늘어난 것을 확인한 풍존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소득이 꽤 많았나 보구나.”
하지만 약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는 듯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준은 두 스승에게 가볍게 예를 갖춘 뒤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전설속의 용족과 인연이 닿다니, 잘 되었구나.”
약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곳에서도 좋은 소식이 있었다.”
“네? 무슨 일이요?”
“정화의 불꽃과 관련된 일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준은 양쪽으로 찢어지는 입꼬리를 어찌할 수 없었다.
“정화의 불꽃이 표시된 마지막 지도조각을 구한 건가요?”
이준은 기쁜 얼굴로 물었다. 정화의 불꽃만 얻는다면 투존 최고급, 더 나아가 반투성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닐지도 몰랐다.
“정화의 불꽃의 소재를 알아내는 것이 그리 쉽겠느냐.”
하지만 약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지도 조각 세 개를 구한 것도 엄청난 것인데, 마지막 조각을 구하는 것이 그리 쉬울 리가 없지 않느냐.”
“휴우!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스승님이 말씀하신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이준이 기운이 쭉 빠져버린 목소리로 시무룩하게 물었다.
“마지막 조각을 얻진 못했지만 그와 관련된 소식을 찾았다.”
약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무슨 소식이요?”
이어지는 스승의 말에 울상이 되었던 이준의 표정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중주에서 한 번씩 특별한 경매가 열리는데, 어지간한 강자가 아니라면 감히 참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아주 비밀스러운 경매다. 설령 실력이 된다 하도 특별한 방법이 없다면 경매에 참가할 수 없지.”
약로는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이 경매에 참가하려면 최소한 투종 최고급 수준의 실력을 갖춰야지.”
“정말 엄청나군요.”
이준 역시 이런 경매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 지도조각이 그 경매에 나왔나요?”
“그렇다. 다행히도 내 지인들 중 하나가 이번에 그 경매에 지도조각이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주더구나. 그 지도조각의 마지막 주인은 이 지도가 정화의 불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단 한 장뿐이니 그 지도조각을 다른 물건과 바꿀 생각인 모양이더구나.”
“그 지도가 정화의 불꽃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아는데 그리 쉽게 넘겨줄까요?”
이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세 개의 지도 조각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상대방이 그 지도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상대방이 지도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상, 그렇게 쉽게 지도를 넘겨줄 리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얻은 유일한 정보인데, 놓친다면 영원히 정화의 불꽃을 찾을 방법이 없을 게다.”
“그렇겠죠…….”
정화의 불꽃은 지금까지 이준이 손에 넣은 그 어떤 천지의 불꽃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게다가 이 비밀 경매에서는 종종 1격 무투기도 거래되고 있으니, 다른 좋은 물건들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1격 무투기요?”
1격 무투기를 구할 수 있다는 말에 이준의 눈이 또다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비밀 경매는 언제 열리죠?”
“이제 1년도 안 남았을 게다.”
“아직 그렇게 오래 남았나요?”
이준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자, 약로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뭐 어쩌겠느냐. 급하게 천지의 불꽃이 필요하다면 새로운 불꽃을 찾거나 다른 사람의 불꽃을 빼앗을 수밖에 없다. 지금 투기 대륙에서 불의 협곡을 제외하면 어느 세력이 천지의 불꽃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 옆에 있던 풍존자가 장난스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라면 단연 염족(炎族)이 아니겠는가.”
약로가 웃으며 말했다.
“염족이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 8대 세력 중 하나다. 지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세력 중 하나지.”
“8대 세력이요?”
이준의 질문에 약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8대 세력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족(古族), 혼족(魂族)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존재하는 종족은 다섯 개가 있다. 바로 염족(炎族), 뇌족(雷族), 약족(藥族), 석족(石族) 그리고 영족(靈族)이다.”
스승의 입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세력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자 이준의 눈이 더욱 동그랗게 변했다. 하지만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방금 전 약로가 말해준 세력의 이름은 분명히 여덟 개가 아니라 일곱 개였다.
“스승님, 일곱 개밖에 말해주지 않으셨는데요. 마지막 하나는 어떤 세력인가요?”
이준의 그 질문에 약로는 말없이 이준을 바라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하나가 바로 너희 가문이다.”
이씨 가문이 상고 시대 8대 세력 중 하나였다는 말에 이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기대륙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제국에서도 이류(二流) 도시에 살던 이씨 가문이 과거 투기 대륙 전체를 호령하던 8대 세력 중 하나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상고 시대에는 너희 가문을 이씨 가문이 아니라 이족이라고 불렀었지. 이족의 최고 강자는 투제였고, 그 피를 물려받은 후손들 역시 투제의 피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현이 그 피에 담긴 힘을 모두 써버리며 이족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약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투제의 피라도 그 힘이 영원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 혈통을 계속 유지해가려면 후손 중에 다시 투제가 나타나 투제의 피에 새로운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족에서 최초의 투제가 나타난 이후 단 한 번도 새로운 투제가 나타나지 않았지. 나도 너의 곁에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머물렀지만 투제의 피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이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 것이지, 투제의 피가 도움을 주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허허, 하지만 난 네가 이족의 새로운 투제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너로 인해 이씨 가문에는 다시 한 번 투제의 피가 흐를 것이다.”
스승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어깨를 두드리자, 이준은 온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스승님은 어떻게 8대 세력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계십니까? 이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 아닌가요?”
이준이 갑자기 약로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8대 가문의 이름을 듣다보니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허, 이 녀석…….”
“혹시 스승님과 약족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찻잔을 쥐고 있던 약로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해갔다.
“난 약족의 사람이 맞다. 하지만 약족에게 버려졌다.”
“버려졌다고요?”
이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약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스승님의 연금술은 투기 대륙 최고 수준인데, 어떻게 약족이 스승님을 버릴 수 있죠?”
한참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약로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투제의 피 때문이었다…….”
약로의 표정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도 없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약족에는 투제의 피를 얼마나 많이 이어받았느냐로 신분이 갈린다. 나는 투제의 힘을 거의 이어받지 못했던 탓에 약족 내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사람 중 하나였단다. 그러다가 임무에 실패해 약족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지. 내가 연금술에 모든 정신을 쏟아부은 것은 사실 일족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투기대륙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이후에도 약족은 나를 찾지 않았지.”
여기까지 말을 마친 약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차를 들이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약족은 날 낳아주고 길러준 곳이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제 와서는 약족 사람들도, 영혼의 궁전 놈들도 대부분 내가 약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모를 게다.”
묵묵히 스승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스승님의 실력이라면 약족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무도 막을 수 없지 않을까요?”
“그곳에 돌아간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나의 목표는 투제의 피가 있어야만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말을 마친 약로는 이준을 바라보며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내 제자는 이미 아주 훌륭하게 그것을 증명해내고 있지. 그러니 스승인 나도 더욱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
스승의 다정한 말에 이준은 다시 한번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됐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꾸나. 이제 너도 이런 이야기를 알만한 실력이 되었으니 말해준 것이다. 어떤 일들은 실력이 없는 자에게는 모르는 편이 나으니까 말이다.”
약로는 이 이야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어찌됐든, 염족은 투기대륙에서 가장 많은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네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고, 그중 두 개는 천지의 불꽃 중 10위 안에 드는 강력한 화염이다.”
“네 개요?”
약로의 말에 이준의 눈이 두 배는 커졌다. 한 세력이 네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약족도 두 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고시대의 연금술에 아주 정통하지. 물론 약족의 젊은이들 중에는 너만 한 연금술사는 흔치 않지만 말이다. 많아야 다섯 정도 될 것이다.”
약로가 웃으며 말했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연금술사가 다섯이라는 말에 이준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금탑의 연금술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만큼, 비슷한 나이 또래 중에는 자신과 연금술로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자는 없을 것이라고 내심 자부해 왔던 터라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어찌됐든, 염족의 불꽃은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염족의 불꽃에는 모두 그들의 각인이 새겨져 있고, 그 각인은 불의 협곡의 구룡 불꽃에 새겨진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니 말이다. 설령 손에 넣는다 해도 네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약로의 말에 이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의 각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8대 세력의 불꽃을 빼앗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 결국 비밀 경매가 시작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이준이 포기한 듯 말하자 약로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비밀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네가 다녀올 곳이 있다.”
“어디요?”
“고족, 고계다.”
약로의 입에서 나온 두 단어를 듣는 순간 이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한 달 후에 고족에서 20년마다 열리는 성인식이 시작된다. 이 성인식에 참가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고족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고족의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네 여자 친구도 그 성년식에 참가할 것이고 말이다.”
“고족의 초대장을 받을 수 있는 세력은 많지 않다. 이번에 내가 반투성이 되지 않았다면 성운각도 초대를 받지 못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