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화. 혼란
화룡이 토해내는 무시무시한 열기에 화산 주위의 모든 것이 빠르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촉이 장로는 먼 곳에서 뒷짐을 진 채 굳은 표정으로 약솥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촉이, 자네는 정말로 저 자가 수정층을 연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때, 촉이의 귓가에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흑발과 백발의 두 노인이 서있었다.
“연금대회의 우승자라면 할 수 있을 것이오. 아직 어리지만 이틀 동안 보니 경험도 많고 의연한 게 보통 젊은이들과는 다르오.”
촉이 장로가 거대한 약솥 앞에 있는 이준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보람이 우리 용족에게 얼마나 중요한 아이인지는 자네도 알고 있겠지?”
엄숙한 표정으로 서있던 노인이 무겁게 다시 입을 열었다.
“기유 장로, 쓸데없는 걱정 마시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믿고 이 일을 맡길 수 있는 것은 이준 하나뿐이오.”
촉이 장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게다가 보람이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직접 이준을 불러 달라 부탁했소. 저 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의 목숨으로 장난칠만한 아이는 아니오. 저 아이가 이준을 믿는 데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소?”
“그러길 바라야지. 보람이 없다면 우리 용족은 절대 다시 하나가 되지 못할 거요.”
기유 장로라 불린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군다나 지금 대장로와 둘째 장로 모두 수련에 들어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오. 그들이 없다면 우리 동룡도도 우세를 차지하기 어렵단 말이오.”
그의 말에 촉이 장로의 입에서는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해도 달라질게 없지 않소. 우리가 할 일은 다른 섬의 도주들이 이 일을 방해하지 못 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뿐이오. 나머지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지.”
그의 말에 기유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연기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한편, 이준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보람을 감싼채 화염을 내뿜고 있는 화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보람의 상태를 지켜보던 이준이 번개처럼 인을 바꾸자, 약솥 안에 있던 거대한 자갈색 화룡의 몸이 돌연 자주색으로 변화했다.
크르릉!
자줏빛 용으로 변한 불의 용은 눈에 띄게 작아져 있었지만 화염의 온도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상승해 있었다.
곧이어 화룡의 입에서 자주색 화염이 뿜어져 나오고,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단단한 에너지 수정층이 녹아내리며 자금(紫金)색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좋아. 용황열매가 녹고 있어.”
* * *
그렇게 열흘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렸다.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이준은 조금도 쉬지 않고 불을 피웠다. 그 사이 염력이 두 번이나 바닥났지만 촉이 장로가 건네준 용의 피를 먹지 않고 준1격 수련법의 힘만으로 에너지를 보충한 덕에 앞으로 며칠이 더 걸린다 해도 쉬지 않고 작업을 이어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15일째 되는 날, 마침내 이준은 촉이 장로에게 받은 용의 피 한 방울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용의 피가 혀끝에 닿는 순간, 이준의 피부에서 금빛이 반짝거리더니 엄청난 에너지가 그의 몸을 휘감으며 혈관 안으로 홍수같은 염력이 쏟아졌다.
곧이어 뼈와 근육, 그리고 혈관이 빠르게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용의 피 안에 숨어있던 에너지인가……. 역시 대단해.”
용의 피 한방울 안에 담겨있는 에너지는 최고급 연금비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좋아. 그럼 계속 해볼까?”
이준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씩 웃으며 거대한 약솥을 바라보았다. 보람의 피부를 둘러싸고 있던 수정층은 이미 거의 사라진 상태였지만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순 없었다. 그녀의 몸속에는 여전히 수정층이 가득 돋아나 있었기 때문이다.
몸 안에 수정층을 녹이지 못한다면 보람은 결코 깨어날 수 없었다.
* * *
다시 보름이 지나자, 마침내 보람의 몸을 뒤덮고 있던 두터운 수정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긍정적인 변화에 고룡도(古龍島)에도 즐거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이 속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람의 몸속에 있는 수정층도 완전히 연소시킬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저 자는 분명 큰 사람이 될 것이오. 이씨 가문이 다시 빛을 발할지도 모르겠군. 이현, 이씨 가문에 복이 내렸구려.”
한 달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숙련된 솜씨로 천지의 불꽃을 조종하는 이준을 바라보던 촉이 장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때, 어디선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석오, 감히 동룡도에 쳐들어오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그 순간, 촉이 장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굳어갔다.
“결국 왔구나…….”
새까만 허공에서 눈부신 빛이 반짝이더니 고룡도 밖에 서서히 멈춰 섰다.
빛이 사라지자, 화려한 금색 갑옷을 입은 강자들과 상반신을 모두 드러낸 건장한 용족의 사내들이 우뚝 서있었다.
“서룡도와 남룡도 사람들이다.”
구룡도 안에서 분노 섞인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하석오, 감히 동룡도에 쳐들어오다니!”
곧이어 공간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촉이 장로와 대화를 나눴던 기유 장로였다.
“허허, 기유. 난 그저 왕족 혈통의 대인을 서룡도로 모시라는 명령을 받고 온 것뿐이니 나에게 노하지 마시오.”
금색 갑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보호막 안에 있는 기유를 보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서룡도의 왕이 진정한 왕족을 서룡도에 연금(軟禁)할 생각인가보군? 허, 왕족 혈통의 하인에 지나지 않던 자가 감히 자신을 용족의 왕이라 칭하다니, 무서운 게 없나보구려!”
기유 장로가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흥, 서룡도의 왕도 왕족의 혈통이오. 적어도 자네와 같은 평범한 혈통보다는 왕족에 가깝지. 어디 평범한 혈통을 가진 자가 통솔하고 있는 동룡도의 장로 따위가!”
하석오라 불린 사내가 오만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네 이놈! 용족의 왕은 과거 용황(龍皇) 대인뿐이다!”
그러자 기유 장로가 눈을 치켜뜨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흥, 닥쳐라. 너 따위와 입씨름을 할 시간이 없다. 죽고 싶지 않다면 왕족의 혈통을 내게 넘겨라.”
“건방진 놈, 감히 너 따위가!”
하석오의 말에 기유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지더니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그의 손안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허, 기유. 동룡도는 네 개의 세력 중 가장 약한 곳이 아니던가? 감히 우리 서룡도의 용갑군(龍甲軍)에게 대적하겠다는 것인가?”
하석오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화려한 금빛 갑옷을 입은 용족의 강자들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바로 그 때, 화산 주위에서 이준을 지키고 있던 촉이가 번개처럼 몸을 날려 기유의 곁에 나타났다.
“서룡도의 용갑군(龍甲軍)과 남룡도의 만용군(蠻龍軍)……. 네 놈들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구나.”
“하하, 역시 촉이 장로에게 들키고 말았군.”
촉이가 날아오자, 새까만 허공에 거대한 균열이 나타나더니 새하얀 피부를 가진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만암…….”
새하얀 피부의 노인을 발견한 촉이 장로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촉이 장로, 우린 명령을 받고 온 것이니 어서 왕족의 핏줄을 내놓으시오. 삼대 용왕 중 누구도 용족이 다시 통일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소.”
만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때, 한 사람이 하늘 위로 빠르게 날아오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네 이놈들! 대장로와 둘째 장로가 수련 중이 아니라면 네놈들이 이렇게 찾아와 행패를 부릴 수 있었겠느냐!”
흑치웅을 발견한 하석오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만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소.”
그 순간, 하석오가 입은 갑옷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져 나오더니 해일과도 같은 에너지가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용갑군, 왕족의 핏줄을 내 앞에 끌고 오라!”
하석오의 외침에 갑옷을 입은 용족의 강자들이 일제히 매서운 기운을 뿜어내며 고룡도 안으로 돌진했다.
“우리도 움직입시다.”
만암 역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만암의 명령에 이번에는 상반신을 모두 드러낸 용족 강자들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들의 두꺼운 팔이 부르르 떨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주색 용비늘이 팔뚝을 뒤덮었다.
“저들을 잡아라!”
“예!”
촉이 장로가 굳은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자 동룡도의 강자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이내 하늘 위에서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굉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쾅!
흑치웅이 만용군의 강자를 쓰러뜨리고 빠르게 후퇴하려던 그 때, 촉이 장로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흑치웅, 이곳은 나에게 맡기고 자네는 이준을 지키게.”
촉이 장로가 말했다. 흑치웅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방향을 틀어 고룡도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촉이, 자네는 내가 맡아주지.”
흑치웅이 떠나는 순간, 하얀 피부를 가진 만암이 촉이 장로 앞에 서서히 나타났다. 곧이어 만암의 몸에 자주색 용비늘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손끝에서 날카로운 용의 발톱이 돋아났다.
“오랜만이군. 지금은 투존이 되었을지 모르겠구나!”
잠시 후, 공간이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만암의 날카로운 발톱이 촉이 장로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쾅쾅쾅!
고룡도 전체에 굉음이 울려 퍼지고, 하늘 위에는 형형색색의 염력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그와 반대로 동룡도 깊은 곳에는 여전히 고요한 적막이 맴돌고 있다.
거대한 화산 입구에서는 끊임없이 열기가 피어오르며 보람의 몸 속에 자리한 수정층을 녹여내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이준과 보람을 바라보던 흑치웅은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주위에 있던 용족의 강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준을 방해해선 안 된다. 저들을 막아라!”
흑치웅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산봉우리 안에서 수십 개의 그림자가 뛰쳐나와 화산 안에 진입한 다른 섬의 강자들을 덮쳤다.
하지만 화산 안으로 들어온 강자들을 막아내는데 성공했음에도 흑치웅의 표정은 더욱 더 어두워져만 갔다. 서룡도와 남룡도의 용족들이 몰려왔다는 것은 북룡도의 강자들 역시 곧 가세할 것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두 섬의 강자들을 막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북룡도의 강자들까지 가세한다면 보람을 지켜낼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약솥 앞에 앉아있는 이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흑치웅은 주먹을 꽉 쥐며 천천히 염력을 끌어올렸다.
이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준이 너무 늦지 않게 보람을 깨워주는 것뿐이었다.
격렬한 에너지 파동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는 와중에도 이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인결을 바꾸고 있었다.
흑치웅은 흐릿한 눈으로 인결을 바꾸는 이준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준은 이미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지만, 보람을 살리기 위해 그야말로 마지막 남은 한줌의 염력까지 모두 쥐어짜내고 있었다.
“정말 독하게 버텨내는군. 이번 일이 끝나면 의형제를 맺고 지켜주겠다.”
흑치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쾅!
그 때,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섬뜩한 웃음소리가 흑치웅의 귓등을 때렸다.
“하하, 여기 있었구나!”
웃음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흑치웅의 얼굴이 전에 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용갑군 대장 하차익…….”
흑치웅이 말없이 손을 휘두르자, 마지막으로 그의 곁에 남아있던 용족의 강자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진형을 갖춘 채 금빛 갑옷을 입은 사내를 노려봤다.
“흑치웅? 여기서 너를 다시 만날 줄이야.”
자신의 앞을 막아선 흑치웅을 바라보던 하차익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는 순간, 흉흉한 살기를 내뿜는 그림자들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진형을 갖추고 있는 동룡도의 강자들을 덮쳤다.
곧이어 하차익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흑치웅의 눈앞에 나타났다.
“흑치웅, 얌전히 왕족의 핏줄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동룡도는 피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
말없이 하차익을 바라보던 흑치웅은 곧바로 염력을 폭발시키며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다.
“하차익! 네 놈 따위에게 우리 용족의 왕을 넘겨줄 것 같으냐!”
쿵!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폭풍처럼 사방을 휩쓸고, 두 개의 그림자가 정신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주먹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이 부딪힐 때마다 거대한 파문이 일어나며 굉음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약솥 앞에 앉아 있는 이준은 온 산을 뒤집어 놓을 것 같은 소란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고 화염을 조종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