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화. 시작
“어떻게 해야 보람을 구할 수 있죠?”
“이 수정은 내가 직접 힘을 써도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네……. 게다가 이 수정을 힘으로 깨버리면 수정에 담긴 에너지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아.”
“이 상황에 에너지가 중요합니까?”
이준이 분노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휴, 그건 자네가 우리 용족의 사정을 몰라서 그러네. 지금 용족은 큰 위기에 처해있네. 왕족의 혈통을 가진 보람이 각성해야만 용족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어.”
촉이 장로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전설속의 용족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할만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촉이 장로의 말에 이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자네는 보람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듯하니 믿고 말하지. 용족이 살아가는 공간인 구룡도는 지금 큰 위기에 빠져있네. 그리고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구룡도는 사실 전체의 4분의 1에 불과해.”
“4분의 1이요? 아직도 세배나 되는 땅이 더 남아있단 말입니까?”
“보람의 아버지가 실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룡도는 네 부분으로 나뉘게 되었네. 지금 이곳이 그 중 한 곳이고, 나머지는 알 수 없는 공간속을 떠다니고 있지.”
촉이 장로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땅들에도 우리 용족이 살아가고 있지.”
촉이 장로의 말대로라면, 이준이 본 것은 용족의 힘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고작 4분의 1로도 이 정도 전력이라니, 왜 용족이 고족과 영혼의 궁전에 맞설만한 최고의 세력으로 손꼽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네 개의 구룡도는 일정한 시간마다 한 번씩 한 곳에 모이게 되고, 그 때마다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야. 그리고 다른 도주(島主)들은 모두 자신이 전설의 용족을 통일시키려 하고 있네. 그렇게 우리는 이미 몇 년 째 심각한 분열 상태에 놓여있지. 이대로 가다가는 내분으로 인해 용족 전체가 무너질지도 몰라.”
“나머지 섬의 주인들도 모두 왕족 혈통을 가진 용족입니까?”
이준이 물었다.
“아니라곤 할 수 없네. 하지만 보람이 만큼 순수한 혈통은 아니야.”
촉이 장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보람이에게 급하게 용황열매를 흡수하도록 한 것도 사실 그 때문이었네. 보람이는 모두가 경계하는 가장 순수한 혈통의 왕족이니까. 다음 번 구룡도가 합쳐질 때까지 이 아이가 각성하지 못 하면 다른 왕족들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
“어쩐지…….”
이준은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만 아니었다면 봉황족과 지옥 이무기족이 감히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은 없었을걸세.”
말을 마친 촉이 장로는 또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전설의 용족이 이런 상황에 처해있었다니……. 그래도 투기 대륙에서 이 일을 아는 세력이 거의 없는 걸 보면 보안이 아주 철저하구나.’
이준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은 자네만 알고 있었으면 하네. 다른 곳에 알려지게 된다면 우리에게 원한을 품은 세력들이 모두 개입하려 들 것이네.”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촉이 장로의 말에 이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절 부르셨다는 건 제가 보람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죠? 혹시 이 일에 천지의 불꽃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까?”
용족이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연금술과 천지의 불꽃 때문이라는 것이 이준의 생각이었다. 자신도 이제 8레벨 연금종사가 되기는 했지만 용족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그보다 더 뛰어난 연금술사를 초빙할 수 있었을 것이니, 아마도 천지의 불꽃을 가진 8레벨 연금술사가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허허, 역시 이현의 후손답군.”
촉이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용황열매로 만들어진 수정층을 녹여 보람의 몸 속에 있는 것까지 모두 제거해내기 위해서는 천지의 불꽃이 필요하네. 그것도 천지의 불꽃 중 최소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불꽃이어야만 하지. 자네는 여러 개의 불꽃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그 불꽃들을 융합시키는데 성공한 상태이니, 우리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네. 거기다 보람이를 아주 아끼는 것 같으니……. 우리가 가장 믿을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네였던 것이지.”
이어지는 촉이 장로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용족의 운명은 자네에게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네, 부디 우리를 도와주게.”
이준을 바라보는 촉이 장로의 표정에는 간절함이 가득했고, 그 뒤에 서있던 흑치웅 역시 아주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촉이 장로님, 걱정 마십시오. 보람이가 제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저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장로님 말에 따를 것이니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반드시 보람을 살려내겠다는 의지가 묻어나는 이준의 말에 두 용족의 강자는 모두 환히 웃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현이 이씨 가문에 이렇게 훌륭한 후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주 기뻐할 것이야.”
“껄껄, 그 때 이현은 이씨 가문의 피를 모두 쏟아 부어서야 그 실력이 됐는데, 이준은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현을 뛰어넘는 일도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흑치웅이 웃으며 말하자 촉이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현이 이씨 가문에 남아있던 혈통의 힘을 모두 써버렸다고 탓하지 말거라. 그 때 그가 투성이 됐다면 이씨 가문의 혈통도 계속 유지 돼 고족과 같은 존재가 됐을 것이네.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 못 했지만, 당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을 한 것 뿐이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은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다만 지금은 그 일에 대해 물을 때가 아니었으니, 일단은 보람을 살리는데 집중해야 했다.
“허허, 이 얘기는 그만하지. 이준 군, 우선 잠시 쉬시오. 먼저 내가 필요한 것들을 준비할 터이니, 준비가 끝나면 바로 시작해줄 수 있겠나?”
촉이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예.”
이준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 후 제단 위에 조용히 누워있는 보람을 바라보았다.
“보람아, 걱정 마. 내가 꼭 구해줄게.”
말을 마친 촉이 장로는 보람의 수정체를 녹일 물건들을 급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준과 예린은 흑치웅의 안내를 받아 이틀 동안 고룡도(古龍島)에 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 * *
세 번째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 촉이 장로가 굳은 얼굴로 이준의 앞에 나타났다. 그의 굳은 표정을 보는 순간, 이준은 드디어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준 군, 나를 따라오게.”
촉이의 뒤를 따라 날아가던 이준은 오늘 고룡도(古龍島)의 분위기가 매우 엄숙하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텅텅 비어있던 하늘 위에 여러 명의 용족 강자들이 날아다니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촉이 장로의 말대로, 보람의 각성 여부가 용족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보람이에게 변고가 생길까봐 고룡도에 있는 최고의 실력자들을 엄선해 누구도 이 일을 방해하지 못 하도록 해두었네.”
그렇게 한참을 날아 들어가자, 주위의 온도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열기를 뿜어내는 화산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찼다.
‘이곳에 화산이 있다니…….’
이공간에 진짜 화산을 만들어내는 용족의 힘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십여 분을 날아가자 앞서가던 촉이 장로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산봉우리 꼭대기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슉!
그 때, 어디선가 새까만 그림자 하나가 날아와 이준과 촉이 장로앞에 멈춰섰다.
“철검존자님?! 어떻게 이곳에…….”
눈 앞에 나타난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이준이 귀신에 홀린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약로를 구하러 영혼의 궁전에 쳐들어갔을 당시 철검존자는 홀로 남아 흑백천존에게 맞섰고, 때문에 이준은 그가 그곳에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허허.”
촉이 장로가 소리 내어 웃자 철검존자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그럼 그 때 그 신비한 강자가 촉이 장로님?”
이준이 놀란 눈으로 촉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보람이가 떠난 후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몰래 따라다니고 있었다네.”
이준의 질문에 촉이 장로는 새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렇네. 철검은 자네들이 떠난 이후 내가 구해왔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촉이 장로님에게 도움을 받았었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니네.”
이준의 말에 촉이 장로는 손을 저으며 철검존자를 바라보았다.
“모두 준비 되었소?”
철검존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촉이 장로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새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분화구 앞에 멈춰 섰다.
그 뒤를 따르던 이준은 화산 입구에 떠있는 비취색 약솥을 발견했다. 거대한 약솥 안에는 온 몸에 수정이 돋아난 보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불속성의 에너지가 아주 짙어 이곳에서 천지의 불꽃을 사용하면 그 위력이 배로 강해지지.”
촉이 장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거대한 약솥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아주 뛰어난 화염 통제력이 있어야만 다치지 않고 보람의 몸에서 수정을 없앨 수 있을 것이네. 해낼 수 있겠는가?”
“예.”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염 통제 능력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였다.
이준의 확신에 찬 답변을 들은 촉이 장로는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그 동안 용족의 강자들과 내가 직접 이곳을 지킬 것이니 방해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네.”
촉이 장로의 손가락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던 이준은 산봉우리 곳곳에서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용황 수정층을 연소시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 염력 소모도 엄청날 것일세.”
말을 마친 촉이 장로는 새하얀 옥병을 꺼내 이준에게 건넸다.
“여기에는 내가 직접 연소시킨 용의 피가 들어있네. 염력을 순식간에 회복시켜줄 뿐만 아니라 체력을 단련하는 효과가 있으니 염력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야.”
조심스럽게 옥병을 받아든 이준은 그 안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에너지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보람이를 살려내겠습니다.”
이준은 겸손하게 인사를 올린 뒤 빠르게 화산 위로 올라가 약솥 앞에 앉았다.
* * *
거대한 약솥 앞에 자리 잡은 이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보람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낀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하얀색 불꽃이 섞인 자갈색 화염기둥이 갑자기 터져 나와 약솥 안으로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갔다.
천지의 불꽃이 나타나는 순간, 주위의 온도가 순식간에 치솟으며 거대한 나무들에 달려 있던 나뭇잎들이 메말라 떨어지기 시작했다.
약솥으로 들어간 화염 폭풍은 순식간에 한 곳에 모여 거대한 화룡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이준이 인을 바꾸자, 거대한 화룡이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며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보람의 몸을 감싸고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보람의 몸을 뒤덮고 있는 수정층은 아직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준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만일 이렇게 쉽게 녹을 것이었다면 촉이 장로가 그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