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3화. 고룡도(古龍島)
가볍게 두 사람을 처리한 흑치웅은 시시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구 천존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우. 순순히 꺼지겠느냐, 아니면 내 손 맛을 보겠느냐?”
“흑치웅, 이준은 전주님이 직접 지목한 자요. 당신이 저 녀석을 계속 지킬 수 있다 생각하는 거요?”
구 천존이 이를 악문 채 답하자, 흑치웅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시끄럽다. 장로님들께서 이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셨으니 나는 명을 수행할 뿐, 조용히 사라지겠느냐 아니면 나와 붙어보겠느냐.”
흑치웅의 오만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구 천존은 주먹을 움켜쥐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해보겠다 이거군. 좋아. 몇 년 사이에 얼마나 컸는지 한 번 보자.”
그 순간, 말없이 주먹을 움켜쥐는 구 천존의 모습을 바라보던 흑치웅의 몸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의 몸이 점점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흑치웅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에너지에 구 천존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이준……. 언제까지 운 좋게 달아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말을 마친 구 천존이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려는 찰나, 흑치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우. 돌아가서 네 윗사람에게 이준과 이씨 가문을 더 이상 따라다니지 말라고 전하거라. 영혼의 궁전과 이씨 가문의 문제는 이미 끝났다. 도를 지나치는 행동이 계속되면 앞으로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고 장로님들이 전해달라더군.”
흑치웅의 마지막 말에 구 천존은 눈을 얇게 뜨며 픽, 하고 웃었다.
“나에게 말해봤자 소용없소.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물러나지만, 고족이나 용족이라 해도 우리 영혼의 궁전이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말을 마친 구 천존은 그대로 공간을 가르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차가운 표정으로 구 천존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흑치웅은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준, 괜찮은가?”
“또 형님의 도움을 받게 됐네요.”
이준은 손을 모으며 인사를 올렸다.
“괜찮네. 이번에는 우리 용족이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찾아온 것이네. 도와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어떤 일인데 그리 급하게 저를 찾으십니까?”
이준의 질문에 흑치웅은 씨익 웃음을 지으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경위는 나와 함께 가면 알게 될 것이네.”
“예, 그런데 제 친구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이준이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예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하게.”
흑치웅은 고민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 천존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예린 혼자 돌아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준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하늘 요괴를 저장반지로 회수한 뒤 예린의 곁으로 날아갔다.
지옥 이무기족 강자들을 눈 안으로 거두어들인 예린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화지인을 내버려 둔채 긴장한 눈빛으로 흑치웅과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련님. 이 여자는 그냥 놔주나요? 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예린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간이 없어, 그냥 가자.”
하지만 이준은 싸늘한 눈으로 화지인을 훑어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흑치웅 형님, 갑시다.”
“그러지.”
흑치웅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손으로 공간 균열을 만들어 이준과 예린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홀로 남겨진 화지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쳐박힌 천명종의 두 강자를 향해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공간균열 속으로 들어가려던 흑치웅이 자리에 멈춰서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무서운 강풍이 공간을 뚫고 화지인의 몸을 강타했다.
“푸흡!”
가슴팍을 관통한 엄청난 힘에 화지인은 그대로 피를 쏟아내며 거대한 바위 위에 박혀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한 번 더 내 눈에 띈다면 그 때는 목숨을 거둬가겠다.”
흑치웅은 그 말만을 남기고 공간 균열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 *
흑치웅이 만들어낸 균열 속으로 들어가니 옅은 은빛으로 가득한 신비한 통로가 나타났다. 이준과 예린, 그리고 흑치웅은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기다란 통로를 쉴 새 없이 날아갔다.
‘한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긴 공간 통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이게 바로 용족의 힘이구나.’
끝없이 펼쳐진 공간 통로를 날아가던 이준은 연신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9성 투존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이만한 공간 통로를 만들 수는 없었다. 이 정도 길이의 공간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용족의 강자와 투성강자들 뿐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을 날아가자, 드디어 통로의 끝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 * *
공간 통로를 벗어나자, 순식간에 눈앞이 환해지며 녹음이 무성한 산봉우리가 눈 앞에 펼쳐졌다.
“이건…….”
세 사람의 발밑에 펼쳐진 울창한 숲은 마치 거대한 섬과도 같았다. 푸르른 숲 주위로는 은빛 장막이 둘러져 있었고, 그 장막 밖으로는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새까만 공간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이공간이었다.
물론 투성 강자들이 만든 공간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아주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어 투존 강자라 하더라도 이곳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용족이 그토록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은밀한 곳에 이공간을 만들어두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따라오게.”
흑치웅이 가볍게 손을 흔든 뒤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이준 도련님, 여기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져요.”
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준도 이 섬 곳곳에서 강한 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용족이 왜 투기 대륙 최강의 세력인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산봉우리 위에 도착하자 하얀 의복을 입은 용족의 강자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셋째 장로님, 왔습니다.”
흑치웅은 그 노인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후 이준을 가리켰다.
“이 자가 바로 보람의 친구, 이준입니다.”
“허허, 이렇게 황급히 부르게 되어 참으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얀 의복을 입은 장로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 분은 우리 용족의 셋째 장로, 촉이님이시다.”
“아닙니다, 촉이 장로님. 보람이는 저의 친구이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만사 제쳐두고 오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리고 제가 한참 후배인데 어째서 말을 높이십니까, 부담스러우니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온화해 보이는 촉이 장로에게서 느껴지는 묵직한 위압감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투존 최고급 강자는 되겠어. 아니, 전설의 용족에는 숨어있는 전설이 많으니 스승님과 마찬가지로 반투성일지도 몰라.’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촉이 장로는 예린을 보자마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뱀의 눈을 가진 아이라니……. 게다가 이 냄새는 고대 하늘 뱀의 냄새인데……. 이 세상에 아직도 고대 하늘 뱀의 영혼이 존재하다니, 실로 놀랍구나.”
촉이 장로가 놀란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예린은 조심스럽게 장로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녀의 몸속에 잠들어있던 고대 하늘 뱀의 영혼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예린이 알기로는 아주 오래 전, 고대 하늘 뱀과 용족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녀의 몸속에 잠들어있던 하늘 뱀의 영혼이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당황한 예린이 황급히 하늘 뱀의 영혼을 억누르자, 촉이 장로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걱정 마시오, 꼬마 아가씨. 고대 하늘뱀과 우리의 원한은 이미 끝났소. 하지만 보통 흉악한 놈들이 아니니 지배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좋겠소.”
“예.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촉이 장로님, 보람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자, 촉이 장로가 장탄식을 내뱉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황열매가 말썽을 일으켰다네.”
‘역시…….’
촉이 장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공간 통로를 지나는 동안 혹시 용황열매로 인해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자신의 예상이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보람의 아버지는 우리 용족의 왕으로, 어느 날 갑자기 보람이와 함께 실종되고 말았지. 우리가 보람이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선생이 그 아이와 함께 중주로 오고 난 이후라네.”
“실종이요?”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번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가 보람을 발견한 것은 흑각성이었고, 고대 봉황 마수의 시체를 발견한 것 역시 흑각성 인근이었다. 그리고 봉황 마수와 용족은 마수계를 양분하고 있는 세력이니, 그 고대 봉황 마수와 보람의 아버지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보람의 아버지는 용족의 왕인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딸마저 놔두고 그대로 사라졌단 말인가?
“용황열매는 용족과 봉황 마수 둘 모두의 피를 흡수해야만 아주 낮은 확률로 생겨나는 열매라네.”
이준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촉이 장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람이가 용황 열매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부터 그녀에게 이 힘을 물려주기로 결정했지. 어차피 보람이 성체가 되면 새로운 왕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린 탓에 용황열매에게 잠식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
촉이 장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결국 보람이의 몸이 용황열매의 힘을 모두 흡수하지 못해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네. 일단 따라오게.”
이준의 말에 촉이 장로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이끌고 산봉우리에 위치한 한 석전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간 끝에 그들은 대전 깊은 곳에 멈춰 섰다.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대전 중심에는 높은 제단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 작은 소녀가 얌전히 누워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순간, 이준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지금 보람의 몸 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수정이 돋아나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몸의 겉부분 뿐만 아니라 체내 깊은 곳까지 수정체로 완전히 뒤덮여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하…….”
굳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제단 위를 바라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보람에게서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만일 미세하게 느껴지는 영혼의 파동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 때, 촉이 장로가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용황열매가 보람의 온몸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네. 만일 열매에 담긴 에너지를 모두 흡수하지 못하면 영원히 저렇게 살아가야 하지. 우리가 너무 경솔했어……. 아무리 급하다 해도 아직 어린 아이에게 그 열매를 먹여서는 안 됐는데…….”
촉이 장로의 목소리에는 깊은 후회가 묻어나고 있었다.
“예전에 용황열매를 흡수한 사람이 있습니까?”
한참을 말없이 보람을 관찰하던 이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있긴 하지만 단 두 번뿐일세. 그 중 한 번은 봉황 마수족의 강자가 열매를 먹었고, 이로 인해 용족은 수백 년 간 열세에 처했네. 이후 우리 용족에서도 용황열매를 먹은 강자가 나타났고, 두 강자가 일전을 벌여 두 사람 모두 죽고 말았지.”
촉이 장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날 이후, 용족이 다시 봉황족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했고, 그 이후로는 다시는 용황열매를 보지 못했지.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로 그 열매가 나타난 걸세.”
“두 번 밖에 없군요.”
이준은 눈썹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