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준(准)1격 수련법
꽃내음이 가득한 고요한 정원에는 형형색색의 꽃봉오리들이 가득 피어나 있었고, 마당 가운데에 위치한 석정에는 세 여자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굳게 닫힌 석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준은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죠?”
나설아가 석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진율희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투존 강자들은 몇 개월 동안 가만히 앉아 수련을 하기도 하니까. 별일은 없을 거야.”
사실 이렇게 얘기했지만 그녀 역시 걱정스런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준이 들어간 밀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열기는 제 아무리 투존이라 해도 견딜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열탕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이준이니 큰일은 없겠거니 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휴, 진짜 걱정을 안 시키는 날이 없네.”
진율희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진율희, 나설아와 달리 예린의 표정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뱀의 눈을 통해 이준의 상황이 어떤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계속 저 상태일 것 같은데 그냥 가자.”
1시간 뒤, 진율희가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채 몇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곧이어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지면이 거세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승님! 지진이!”
“아냐! 밀실에서 전해진 진동이야!”
다음 순간, 밀실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진율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설아의 손목을 낚아채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니 이준이 들어간 밀실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쾅!
잠시 후, 밀실이 폭발하면서 뜨거운 김이 하늘 전체로 퍼져 나가더니, 이내 우렁찬 포효 소리가 온 산을 뒤덮었다.
이 소리를 들은 화종 사람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이럴수가! 성운각 소각주의 기운이!”
“4성 최고급까지 올라간 것 같은데, 한 달 만에 어떻게…….”
밀실에서 전해지는 강한 기운을 느낀 화종 장로들은 저도 모르게 찬 숨을 들이쉬었다. 투존에 이르면 보통 1성을 뛰어넘는데만 해도 족히 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2성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역시 약선의 제자는 다르구나.”
하늘 위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화종의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곧이어 기나긴 포효 소리가 사라지며 새파란 하늘 위에 두꺼운 먹구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럴수가…….”
그 순간, 화종의 대장로가 귀신에 홀린듯한 표정으로 밀실이 위치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재지변……. 1격 무투기가 탄생한 것인가!”
투기대륙에서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경우는 총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고급 연금비약의 출몰했을 때 비뢰가 가장 대표적인 천재지변이었다.
둘째, 투황에서 투종으로, 투종에서 투존으로 승급할 때와 같이 새로운 경지에 오를 때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경우 천재지변의 정도는 수련자의 강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투존급이 아닌 이상 천재지변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셋째, 이른바 1격 염력 수련법이나 1격 무투기가 나타났을 때 천재지변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는 1격 염력 수련법이나 1격 무투기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 낸’ 경우에만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고급 연금비약이 만들어 졌을 때 마땅히 느껴져야 할 약향이 느껴지지 않았고, 4성 투존 정도가 승급을 한다고 해서 이런 천재지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 1격 수련법이나 무투기가 탄생했다는 것 뿐이었다.
백발의 노부인은 놀란 눈으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밀실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가장 놀래킨 것은 반투성인 약선이라 해도 1격 무투기나 염력 수련법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4성 투존이 1격에 해당하는 수련법이나 무투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2성 투존의 실력으로 6성 투존을 쓰러뜨렸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 이었다.
“허……. 약선이 참으로 놀라운 아이를 제자로 거두었구나. 우리 화종의 새로운 종주가 저런 자와 연이 있다니, 천운이 따랐어.”
* * *
예측할 수 없었던 신기한 상황에 화종의 제자들 역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치가 빠른 몇몇 사람들은 기현상이 벌어진 밀실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펑!
그 때, 밀실이 다시 한 번 흔들리며 무시무시한 열기와 함께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거대한 연기 기둥의 꼭대기에는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 하나가 꼿꼿이 서있었다.
한 달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이준은 하늘에 나타난 이상 현상을 보고는 곧바로 미간에서 영혼의 힘을 끌어냈다. 그러자 하늘 위를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움직임을 멈추고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짙은 먹구름이 사라지자 깜깜하던 하늘에서 따스한 햇살이 내려와 산맥을 비췄다.
“1격 수련법으로 진화한 건가?”
이준은 자신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두 눈을 감고 염력을 운용해 보았다.
그 순간,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그를 향해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불순물이 가득했던 천지의 에너지는 천지의 불꽃에 닿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정화되어 홍수처럼 이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에너지를 정제하는 속도도, 흡수하는 속도도 모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져 있었고, 몸속의 염력이 이동하는 속도 역시 놀라울 정도로 빨라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염력 회오리 역시 놀라울 정도로 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화련을 사용해도 연금비약을 통해 염력을 보충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후…….”
잠시 후, 불순물이 가득한 공기가 이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예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에 이준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투기를 몇 개나 가지고 있었지만, 염력의 양과 염력을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인해 그 위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강력한 무투기를 몇 번이나 연달아 쓰더라도 염력이 바닥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준이 생각하기에 ‘불개’는 진정한 1격 무투기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완벽한 1격 염력 수련법이라면 단번에 백 미터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어야 했지만, 지금 그의 염력 통제 능력은 그 정도 수준에 이르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기껏해야 2격 최고급에서 1격 하급에 간신히 발을 걸친 수준이었다. 물론, 준 1격 무투기 정도만 해도 엄청난 보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흐음…….”
생각을 마친 이준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자신의 실력이 몇 성 투존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4성이라…….’
얼음불꽃의 정수를 흡수하고도 2성 정도 밖에 오르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이준의 이런 생각을 다른 강자들이 듣는다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할지도 몰랐다. 보통 투존강자들이 1성 올리는데 십 년, 심지어 수십 년 걸리는 것을 단 한 달 만에 2성이나 올렸는데 그것마저 아쉬워한다면 욕심이 너무 많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휴……. 4성이면 됐지, 뭐.”
이준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찾을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실력을 높일 기회가 있을 것이니, 너무 조급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물론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찾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구 천존이나 팔 천존을 만나도 스스로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점 이었다.
“언제까지 멍하니 서있을 거야?”
그 때, 등 뒤에서 진율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은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서있는 그녀를 바라보곤 씩 웃으며 덥썩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이준이 당황한 얼굴로 진율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만히 있어봐. 네 몸 속의 염력 봉인 상태가 어떤지 보려는 거잖아.”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이준을 바라보던 진율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손에 힘을 풀었다.
그 순간, 이준의 영혼의 힘이 진율희의 몸 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스승님은 화 할머니가 8성, 9성 투존 강자일거라 하셨어. 그러니 그 분이 남긴 염력 역시 대단하겠지.’
진율희의 몸 안에 떠돌고 있는 염력의 양을 확인한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몸속에 있는 염력을 모두 흡수한다면 대체 몇 성을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그 방대한 염력에는 강한 봉인이 걸려있어 완전히 봉인을 풀고 그 에너지를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염력의 양이 엄청나. 하지만 봉인도 그만큼 강하네. 이래서야 쓰라고 준 건지 쓰지 말라고 준 건지 헷갈릴 정도야.”
“알다시피 내 능력으론 봉인을 풀 방법이 없어. 그저 봉인에서 새어나오는 염력을 흡수하는 수밖에 없지. 하지만 이렇게 해도 내 수련 속도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
진율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이 염력은 최대한 빨리 모두 연소시켜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네 몸 안에 있는 염력을 노리는 건 그 화지인이라는 여자 뿐만이 아닐 테니까.”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진율희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녀 역시 이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조급해도 화 할머니가 남긴 봉인을 제거할 방법을 모르니 딱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걱정 마. 봉인에 관련된 일은 내가 처리하고 갈 테니까. 그래야 내가 마음 놓고 돌아가지.”
그녀의 표정을 눈치 챈 이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고맙긴.”
이준의 짤막한 대답에 진율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 * *
화종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준은 화종의 대장로를 찾아가 사죄를 드렸다. 하지만 화지인이 천명종과 연합을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던 대장로와 화종의 장로들은 이준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고맙다며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화종의 장로들에게 다시 한 번 성운각과의 연합이 성사됐음을 확인 받은 이준은 곧바로 진율희의 방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몸에 봉인되어 있는 염력을 흡수하도록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봉인에 틈을 만들어 볼게. 아마 꽤 아플거야. 잘 참을 수 있지?”
이준이 푹신한 침상 위에 앉아있는 진율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율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잠시 후, 이준의 두 손가락에서 하얀색 불씨에 둘러싸인 자갈색 화염이 서서히 솟아났다.
“집중해! 내가 지금 봉인을 풀 테니까 혈관을 잘 지켜.”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진율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준이 화염에 휩싸인 손가락으로 진율희의 등을 누르는 순간 그녀의 등에서 자홍색 반점이 나타나더니, 그 안으로 뜨거운 화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갔다.
갑작스레 몸 안으로 흘러든 엄청난 열기에 진율희는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으며 온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염력으로 혈관을 보호했다.
진율희의 혈관에 흘러든 천지의 불꽃은 빠르게 봉인이 있는 곳에 도달해 더욱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용암과도 같은 온도를 가진 불꽃이 봉인에 닿자, 진율희는 참지 못하고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