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9화. 종주
“이게 바로 6성 투존 힘의 최대 한계인가.”
이준이 옅은 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서는 파멸의 힘이 담긴 화련이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가라.”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옅은 갈색의 화련이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거인을 향해 날아갔다.
“없어져라!”
그와 동시에 요화군자 역시 다시 한 번 인결을 바꾸었고, 거인의 몸 앞에 거대한 회오리가 형성되어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화련과 맞부딪혔다.
그 순간, 천지가 흔들릴 정도로 강한 굉음이 터져 나오면서 산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크게 요동쳤다.
지옥불과도 같은 열기를 내뿜는 화염 폭풍이 하늘을 휩쓸기 시작하자, 백 미터도 넘는 거인의 몸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쾅!
요화군자가 이를 악물고 화련을 막아내고 있던 그 때, 연갈색의 화염이 굉음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을 휩쓸었다.
쾅!
화련이 토해내는 무시무시한 열기와 에너지에 거인의 팔다리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화염파도가 사방을 휩쓸며 모든 수분을 증발시켜 버렸다.
그리고 요화군자가 무언가 손을 써보기도 전에 염력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으윽! 어떻게 이럴 수가……!”
거인이 없어지는 찰나, 요화군자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파멸의 힘이 담긴 거대한 화염 파도는 놀랄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의 몸을 덮쳤다.
요화군자는 이를 악문 채 마지막 남은 염력을 전부 폭발시켜 빠르게 화종의 장로들이 펼쳐 둔 결계 밖으로 몸을 날렸다.
쾅!
그러나 연갈색의 화염 파도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마냥 화종의 장로들이 만든 방어막을 불태우며 계속해서 요화군자의 뒤를 쫓았다.
6성 투존이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무투기를 박살낸 것으로도 모자라 화종의 장로들이 힘을 합쳐 만든 방어막마저 순식간에 불태워버리는 화련의 위력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이대로 가면 화종의 본거지는 흔적도 없이 불타 없어질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때, 옅은 한숨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더니 투명한 소용돌이가 나타나 화염파도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대장로님!”
화종의 장로들이 기쁜 얼굴로 외쳤다.
“이준. 우리 화종을 없앨 생각이냐?”
하늘 위에서 백발의 노부인이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노부인이 스승님이 말했던 화종의 선배라는 것을 느낀 이준은 빠르게 염력을 거두어들인 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상대가 6성 투존이니 저도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저장반지에서 연금비약을 몇 개 꺼내 입에 넣은 뒤 요괴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화지인을 바라보았다.
화지인은 이준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귀신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준이 6성 투존인 요화군자를 이렇게 쉽게 이기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먼 곳에 있던 요화군자가 비틀거리며 광장 위로 날아왔다. 하지만 일단 광장 밖으로 밀려났으니, 이번 대결은 그의 패배라고 할 수 있었다.
곧이어 이준도 하늘에서 내려와 말없이 화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화지인은 여전히 대결을 포기하지 않은 듯 진율희를 노려보고 있었고, 이에 이준의 손에서 또 다시 네 개의 불꽃이 피어났다.
“내가 졌어!”
이준이 6성 투존인 요화군자의 목숨을 빼앗을 뻔 했던 무투기를 다시 한 번 사용하려 하자, 화지인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임무 성공이지?”
이준이 고개를 돌려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진율희를 향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잘난 체 하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네.”
진율희는 창백해진 이준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 때, 하늘 위에 있던 화종의 대장로가 화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졌으니 옥패를 진율희에게 넘겨라.”
화지인은 주먹을 꽉 쥔 채 말없이 진율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뺌을 할 수도 없었으니, 결국 저장 반지에서 옥패를 꺼내 진율희에게 던지고 말았다.
옥패가 진율희에게 넘어가자, 화종의 장로들이 일제히 진율희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외쳤다.
“진율희 종주님을 뵙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화종의 종주로 인정했지만, 정작 진율희는 자신의 눈앞에 떠있는 옥패를 붙잡지 않고 있었다.
종주의 자리에는 정말 관심이 없는데다, 종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운남종의 일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받아.”
곁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이준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받으라고?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날카로운 진율희의 한마디에 이준은 난감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하…….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 때 내가 운남종을 없애지 않았다면 우리 가문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너한테는 정말 미안해.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만사 제쳐두고 날아와서 널 도와주는 거잖아!”
“난 그런 거 몰라.”
그 일을 언급하자, 진율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 역시 이준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종파가 자신의 대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어차피 네가 화종의 종주가 되지 않으면 화종은 또 다시 누가 종주가 되느냐 하는 문제로 피를 흘려야 할 거야. 지금 네가 하는 짓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 뿐이라고.”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진율희는 분한 듯 이를 갈다가 결국 옥패를 받아든 뒤 백발의 노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장로님, 저는 어디까지나 임시 종주입니다. 앞으로 저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곧바로 종주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겠습니다.”
“걱정 말거라. 난 종주님의 안목을 믿는다. 염력도, 옥패도 모두 너에게 물려주었을 때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백발의 노부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화지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진율희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대장로님. 제가 몇 년을 고생하여 천명종과 화종의 연합이 성사되기 직전인데, 이렇게 종주를 바꿔버리다니요. 게다가 이준은 요화군자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천명종에서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백발의 노부인의 얼굴이 걱정스런 기색이 어렸다. 현재 화종의 실력으로는 천명종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화군자는 천명종의 사람이었고, 화지인과 그의 혼사를 통해 두 세력이 연합을 이루기로 되어 있었다.
“호랑이와 친구가 되면 나중에는 결국 호랑이의 먹잇감이 되고 말 겁니다.”
그 때, 화지인과 요화군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이준이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대장로님. 천명종의 성격은 대장로님도 잘 아실 겁니다. 만일 연합을 이루게 된다면 결국 화종은 천명종에 흡수되고 말 것입니다.”
“이준! 네 놈이 뭘 안다고!”
화지인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이준은 그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백발의 노부인을 향해 다시 한 번 말했다.
“대장로님만 괜찮으시다면 성운각과 화종이 연맹을 맺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저희 스승님의 실력은 이미 중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선배님과 스승님이 과거에 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희 스승님이 절대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부인의 시선이 화지인에게로 향했다.
“이제 화종의 종주는 진율희이다. 잠시라고는 하나 화종의 종주자리를 맡았던 자가 다른 종파의 이름을 빌어 대장로를 협박하려 하다니, 왜 전임 종주가 너를 화종의 종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는지 알겠구나.”
대장로의 싸늘한 한마디에 화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대장로님이 선택하신 일이니 후회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 때, 화지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요화군자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소.”
노부인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녀의 반응에 요화군자 역시 분을 참지 못 하고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이 상태로 이준과 대장로의 공격을 받는다면 목숨조차 건사할 수 없었으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결국 요화군자는 한참동안 말없이 이준을 노려보다 화종을 떠났고, 화지인 역시 그 뒤를 따라 산봉우리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노부인이 광장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앞으로 진율희가 바로 우리 화종의 종주다. 모든 제자들은 그녀의 명령에 복종하라!”
“예!”
광장을 빼곡히 채운 화종 제자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종주님!”
상황이 정리되자, 이준이 장난스레 미소를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진율희를 놀려댔다.
“종주님? 왜 말이 없으시죠?”
이준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진율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 * *
진율희의 취임식은 성대하지 않았지만 정식으로 화종 장로들의 인가를 받아 진행된만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의식이 끝난 뒤, 이준은 급하게 돌아가지 않고 진율희에게 조용한 방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얼음 불꽃의 정수에 남아있는 저항력을 완전히 없애버린 후 삼천불꽃과 얼음불꽃의 정수를 융합시키기 위해서였다.
화종은 외부인들이 쉽게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인데다가 화종과 성운각의 연합이 성사되었으니 얼음 불꽃의 정수를 완전히 흡수하는 작업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 * *
조용한 방 안에는 머리를 맑게 해주는 은은한 향기가 가득했다.
지금 이준은 곧바로 얼음 불꽃의 정수를 융합시키지 않고 돌로 된 침대 위에 앉아 염력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요화군자와의 싸움에서 생각보다 많은 염력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삼십 분 후, 이준의 입에서 탁한 공기가 새어나오며 눈동자에서 새하얀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준이 인결을 바꾸며 다시 눈을 감자, 빠른 속도로 방안의 온도가 치솟았다.
오늘 얼음 불꽃의 정수를 무사히 융합시킨다면, 그의 염력 수련법인 ‘불개’는 1격 무투기로 거듭날지도 몰랐다.
건조하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방 안, 돌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준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새하얀 화염이 솟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얼음불꽃의 정수를 흡수하는 것은 이미 이화 세 개를 가지고 있는 이준에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천불꽃이 활활 타오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 불꽃의 정수가 서서히 자갈색의 화염과 융합되기 시작했다.
이 속도라면 한 달 안에 성공적으로 얼음불꽃의 정수를 융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삼천불꽃과 얼음 불꽃의 정수가 융합되기 시작하자 방안은 더욱 더 뜨겁게 달아 올랐고, 두 불꽃이 융합되면서 얼음 불꽃의 정수 안에 깃들어있던 천지의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이준의 몸에 녹아들었다.
* * *
그렇게 이준이 밀실 안에 들어간지 대략 한 달,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에 의해 돌로 만들어진 탁상과 의자마저 녹아내린지 오래였다.
돌침대 역시 뜨거운 온도에 반 정도 녹아있었지만, 침대 중심에 앉아있는 이준은 여전히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뚝뚝-.
탁상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미세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돌침대에 앉아있는 이준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십 일이라는 시간이 더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