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화. 요화군자
모든 사람들이 넋을 놓은 표정으로 진율희의 손을 붙잡은 남자를 바라봤다.
“이준?! 여, 여길 어떻게 온 거야?!”
진율희가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네가 곤경에 처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설아가 찾아간 거야?”
이준이 말에 진율희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긴 화종이야! 네가 이렇게 함부로…….”
“날 이렇게 오래 숨겨뒀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진율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준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누가 널 숨겼다고 그래…….”
“누구냐! 이렇게 함부로 화종에 들어오다니.”
은색 의복의 여자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이준을 바라보며 외쳤다.
“진율희의 정인(情人)입니다.”
이준의 대답에 은색 의복을 입은 여자가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진율희. 남자가 없다더니……. 아주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구나.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는데, 종주 자리를 노리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지? 어찌됐든, 네 정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났으니 공평한 대결이 성사됐군. 이제 누구도 네 편을 들지 못할 거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진율희는 이준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를 화종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진율희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이준이 그녀를 막아섰다.
“나에게 맡겨.”
이준의 단호한 표정을 확인한 진율희는 무슨 말을 해도 그의 뜻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가한제국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표정을 한 이준은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꺾은 적이 없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휴……. 그래.”
“당신들이 이기면 진율희가 갖고 있는 염력을 넘겨줘야 하는데, 당신들이 지면 아무 대가가 없네요. 세상에 이런 거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준의 말에 은색 의복을 입은 여자는 눈을 얇게 뜨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지면 진율희가 화종을 떠나도 잡지 않겠어.”
“그것뿐이라면 시합을 진행할 필요가 없죠. 지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기면 얌전히 보내주겠다니, 산적 떼도 이런 제안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준의 당돌한 말에 여인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건방진 것! 감히 화종의 종주인 나에게! 네 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네 놈 뿐 아니라 네놈이 속한 세력에게도 책임을 물어야겠다!”
“성운각의 이준이다!”
성운각의 이준이라는 말에 여자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녀 역시 최근 성운각에 약존이 돌아왔으며, 그가 반투성이 되었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수제자이자 연금탑의 연금술 경연대회 우승자의 이름이 이준이라는 것도.
“내 이름은 이준, 스승님의 이름은 약선입니다. 스승님께서 친히 화종으로 저를 보내어 선배님들의 안부를 묻고 오라 하셨습니다.”
이준이 고개를 들고 화종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성한 산맥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말은 틀림없이 화종의 종주나 장로들이 아니라 산 속 어딘가에서 은거하고 있다는 화종의 선배들을 향한 것이었다.
최근 중주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의 등장에 화종의 제자들도 수군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약선의 제자였군. 나중에 시간이 될 때 성운각으로 한 번 찾아가도록 하지.”
잠시 후, 나이든 목소리가 산맥에서 광장으로 천천히 울려 퍼졌다.
이준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정중히 예를 표한 뒤 은색 의복의 여자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화지인. 이준 선생의 요구는 모두 들어주시게.”
곧이어 광장 북쪽에 있던 한 늙은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장신구로 봤을 때 지위가 꽤 높은 화종의 장로인 듯 보였다.
그녀의 말에 화지인이라 불린 은색 의복의 여자는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빨리 말하시오!”
“이번 시합에서 우리가 지게 된다면 진율희 몸속에 있는 염력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지만 당신들이 진다면 화종 종주의 자리를 진율희에게 넘기시오!”
“우리 화종 종주의 자리를 노리고 온 거였구나!”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지인의 얼굴이 살기로 물들었다.
“이준. 난 종주가 될 생각이 없어. 일 벌리지 마!”
진율희 역시 다급하게 이준의 팔을 붙잡았다.
“화 할머니께서 종주의 자리를 진율희에게 주셨는데 당신이 뻔뻔하게 종주의 옥패를 뺏어간 거잖소. 진율희는 화 할머니가 남겨주신 물건을 되찾아오는 것뿐이오!”
“이놈! 뚫린 입이라고!”
이준의 말에 화지인의 얼굴은 완전히 돌덩어리처럼 굳어버렸다. 화옥이 자신이 아닌 진율희 따위에게 종주 자리를 물려준 것만도 분통이 터지는데, 그것을 되찾아 오기 무섭게 성운각의 젊은 강자가 찾아와 다시 종주 자리를 내놓으라 하니 그녀로써는 화옥의 시신을 찾아 침이라도 뱉고 싶은 기분이었다.
바로 그 때, 요화군자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차갑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약선의 얼굴을 봐서라도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걱정 말고 덤벼보거라!”
그의 말에 이준은 씩 웃으며 진율희를 바라보았다.
“넌 조금 떨어져 있어. 내가 할게.”
“너? 너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진율희는 깜짝 놀라 이준을 바라보았다. 6성과 4성 투존을 2성 투존인 이준 혼자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넌 이제 막 투존이 되기도 했고, 전승 받은 염력도 아직 제대로 흡수하지 못 했잖아. 걱정하지 마. 금방 끝나니까.”
이준이 말했다. 지금 진율희의 몸속에서는 강력한 염력이 느껴졌지만, 아직 그것의 십분의 일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을 상대하다가 부상이라도 입어 흡수하지 못한 염력이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목숨을 잃고 말 것이 분명했다.
진율희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을 쳐다보았지만 그를 믿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이준의 눈동자에서 새하얀 화염이 타오르며 주위의 기온이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좋다.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오늘 약선의 제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봐야겠다.”
그 순간, 요화군자가 미친 사람마냥 섬뜩한 웃음을 터뜨리며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요화군자가 돌진해오는 순간, 이준의 어깨에서 청홍색 뼈 날개가 펼쳐지더니 번개처럼 하늘로 날아올라 요화군자를 가볍게 따돌렸다.
그러자 요화군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하늘 위에 떠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선이 도망치는 것만 가르쳐 주던가?”
“무엇을 가르치셨고 무엇을 배웠는지는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친 이준은 웃으며 곧바로 자신의 요괴 군단을 소환했다.
“하늘 요괴……. 화지인, 당신은 진율희를 상대해. 저 녀석은 내가 맡지.”
하지만 요화군자는 열한 마리나 되는 하늘 요괴를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응.”
화지인은 고개를 끄덕이곤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진율희를 노려봤다.
“나쁜 년. 네 년의 어디가 나보다 나아서 그 할멈이 너를 종주로 정했는지 한 번 보자!”
말을 마친 화지인이 진율희를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금빛 요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채 주먹을 날렸다.
채앵!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화지인은 황급히 염력을 끌어올려 요괴의 공격을 막아냈다.
“요괴?”
요괴의 엄청난 힘이 그녀의 팔에 전해지는 순간, 화지인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화지인. 안심하고 그 요괴 녀석을 상대하고 있어. 이 녀석을 붙잡으면 그 요괴도 멈출 거야.”
하늘 위에 있던 요화군자가 싸늘한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이어 그의 손에 들린 부채에서 남색 빛이 터져 나오더니 칼날 같은 바람이 허공을 가르며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준은 뼈 날개를 펄럭여 가볍게 요화군자의 공격을 피했다. 풍뢰각의 비전인 번개의 움직임과 봉황족의 날개가 결합된 그의 속도는 설령 6성 투존이라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이번 싸움은 반드시 속전속결로 끝내야해…….”
이준이 긴 숨을 들이 마시며 두 손으로 인을 맺자, 그의 손에서 뜨거운 불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아났다.
“천계의 불꽃. 제 1장! 제 2장! 제 3장!”
천계의 불꽃을 시전하자, 그의 실력이 순식간에 4성 투존으로 폭등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세 개의 불꽃을 불러낸 뒤 잇달아 입에서 새하얀 화염을 토해냈다.
무려 네 개에 달하는 천지의 불꽃이 떠오르자, 주위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사람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준의 몸 앞에 떠 있는 네 개의 천지의 불꽃을 발견한 순간, 요화군자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어떻게 한 사람이 네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을 동시에 다룰 수 있단 말인가?
“태풍의 균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요화군자는 곧바로 자신이 가진 최강의 무투기 중 하나를 사용했다.
그가 인을 맺자, 거대한 부채 앞에 새까만 균열이 생겨나더니 번개처럼 이준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이준은 하늘 위를 어지러이 날아다니며 그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불꽃을 융합시켰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손 위에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작은 연꽃 하나가 피어났다.
화련이 완성되는 순간 요화군자는 물론이고 화종의 장로들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연꽃 모양의 무투기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에너지와 열기를 감지한 것이다. 이 정도의 에너지라면 6성 투존인 투화존자라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온 하늘을 헤집고 달아다니던 이준의 몸이 우뚝 허공 위에 멈춰 섰다.
“자, 이제 제 차례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 위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던 화련이 더욱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허공 위에 시커먼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계를 만들어라!”
화련에서 에너지가 분출되기 시작하자, 화종 장로들은 황급히 염력을 분출해 광장 주변에 단단한 염력 방어막을 만들었다.
요화군자 역시 화련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느끼고는 창백하게 질린 채 주먹을 바르쥐었다. 하지만 6성 투존인 그가 겨우 2성 투존을 상대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너무 득의양양하지 말거라. 내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것 같으냐!”
말을 마친 요화군자가 빠르게 인을 맺자, 그의 몸에서 염력이 터져 나와 거대한 거인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천명공법. 천지기체화!”
거인을 소환하면서 엄청난 양의 염력을 소모한 요화군자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요화군자가 만들어 낸 거인의 크기는 무려 백 미터에 달했으며, 마치 하늘을 등 뒤에 짊어진 듯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죽어라!”
요화군자가 인결을 바꾸는 순간, 거인이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온 천지에 광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펑!
곧이어 거인이 거대한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자,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이준을 향해 엄청난 강풍이 몰아쳤다.
역시 6성 투존 강자의 위력이었다.
한편, 2성 투존 밖에 되지 않는 이준이 요화군자를 이렇게까지 궁지로 몰아넣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화종의 장로들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해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결계를 거두어들인다면 오늘 화종의 은신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