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익숙한 얼굴
“팔 천존, 가세!”
구 천존이 긴 숨을 들이마시며 팔 천존에게 조용히 외쳤다.
팔 천존이 부르르 몸을 떨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구 천존이 다시 한 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투성이라면 우리 둘이 상대해도 절대 이길 수 없소. 이곳에 남고 싶다면 혼자 남으시오!”
“가세!”
팔 천존 역시 두 사람이 목숨을 바쳐도 약로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공간을 가르고 사라지려는 찰나, 약로가 씨익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그리 쉽게 보내줄 것 같소?”
그 순간, 두 천존이 만든 공간 통로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또 한 번 두 사람의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터져 나왔다.
퇴로를 봉쇄당한 두 천존은 곧바로 인을 맺어 자신들의 피를 날카로운 피 화살로 바꾸어 약로를 향해 쏘아 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피로 만든 화살은 약로의 몸에 닿지도 못 하고 안개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약존! 오늘의 굴욕은 반드시 되갚아주마!”
약로가 피화살을 막는 사이 다시 공간 통로를 만드는데 성공한 두 천존은 그 말을 남기고 번개처럼 모습을 감췄다.
꼬리를 내린 개마냥 달아나는 두 천존의 모습에 약로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성운각을 둘러보던 약로가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좀 더 빨리 깨어났어야 했는데……. 이미 너무 많은 제자들이 죽고 말았구나.”
“개의치 마세요, 스승님. 오늘 스승님이 아니었다면 성운각은 이미 사라졌을 겁니다.”
약로의 어두운 표정을 본 이준이 위로하듯 말했다.
“다 네 덕분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반투성은커녕 원래 실력을 찾는 것도 어려웠을 게다.”
“영감, 이제 약존이 아니라 약성이라 불러야겠구만.”
풍존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약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선 이 상황을 수습해야겠네. 당분간은 영혼의 궁전 놈들이라 해도 쉽게 이곳을 넘보지는 못 하겠지.”
이어지는 약로의 말에 풍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무리 영혼의 궁전이라 해도 상대가 반투성인 이상 함부로 손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을 그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자네가 반투성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예전에 알고 지내던 늙은이들도 성운각으로 모여들겠지.”
성운각은 제법 오랜 시간 사대각의 자리에 머물렀지만, 여전히 고족이나 영혼의 궁전에 비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약로가 반투성이 된 이상, 수많은 투존이 성운각의 깃발 아래 모여들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약로는 평범한 반투성이 아니라 투존이던 시절부터 투기 대륙 최고의 연금술사로 손꼽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성운각의 힘은 고족이나 영혼의 궁전에 필적하는 수준에 이를지도 몰랐다.
* * *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이 돌아가고 난 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성운각에도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한편 중주에서는 연금탑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반투성이 성운각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돌며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성운각이 안정을 되찾은 뒤 삼일 후, 다양한 세력의 강자들이 성운각으로 모여 들었다.
특히 약로와 풍존과 친분이 있던 투존급 강자들을 장로나 명예 장로직으로 받아들이면서 성운각은 빠른 속도로 중주 최강의 세력 중 하나로 떠올랐다.
* * *
성운각에 수많은 강자들이 오고 가는 와중에도 이준은 뒷산 석탑에 들어가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십대의 나이에 2성 투존에 8레벨 연금술사라면 중주 최고의 인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으나, 영혼의 궁전의 천존들에 스스로 맞서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이준의 생각이었다.
“후…….”
석대 위에 앉아있던 이준은 긴 한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몸 속 가득 느껴지는 염력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어났느냐.”
그 때, 석탑 창문가에서 약로의 온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승님, 어찌 오셨습니까?”
약로를 발견한 이준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각을 관리하는 일은 풍존자가 더 잘 하지 않느냐.”
약로가 웃으며 말하자, 이준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이준이 저장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어 약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제 몸도 되찾으셨으니 저장 반지도 가지고 가셔야지요.”
약로는 자신 앞에 있는 저장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저장 반지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내가 평생 배운 것들을 모두 이 반지 속에 넣어뒀었다. 너도 이 안에 있는 것들 중 대부분을 배웠을 테니, 내가 돌려받아도 괜찮을 듯싶구나.”
약로가 저장 반지를 손가락에 낀 뒤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떤 물건들은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지. 내가 너에게 선물을 하나주마.”
말을 마친 약로가 저장 반지를 문지르자, 냉기와 열기를 동시에 내뿜는 기이한 화염이 솟아올랐다.
“스승님?”
“불개를 수련한 너에게 있어 천지의 불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반투성이 되었으니 얼음불꽃의 정수가 딱히 필요 없게 되었지.”
약로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승님 이러지 마세요.”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투사로써는 어떨지 몰라도, 연금술사에게 있어 천지의 불꽃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었다. 이는 8레벨, 아니 그 이상의 연금술사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약로는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얼음불꽃의 정수를 문질렀다. 그러자 이화가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약로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얼음 불꽃의 정수 속에 있는 영혼의 각인은 이미 지워버렸다. 하지만 오랫동안 내 손을 탔으니 다시 네 것으로 만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성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흡수하거라.”
약로가 얼음불꽃의 정수를 이준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우선 네 영혼의 힘으로 각인을 새기고, 몸속에 보관했다가 저항력이 사라지면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거라.”
이준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졌다. 얼음 불꽃의 정수는 스승이 가진 모든 물건들 중 가장 귀한 것이었으며, 뭇 연금술사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약로 역시 과거에 목숨을 걸고 얼음 불꽃의 정수를 손에 넣지 않았던가? 스승의 진심어린 애정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만 지금 네 실력으론 이 불꽃을 삼켜도 크게 성장하진 않을 테니 그것이 조금 아쉽구나.”
약로가 조금 아쉬운 듯 말했다.
“됐다. 어서 영혼 인결을 새겨라.”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준도 별 수 없었다. 일단 영혼의 각인을 지워버린 이상 이준이 삼키지 않는다면 얼음 불꽃의 정수가 달아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이준은 두 눈을 감은 채 새하얀 화염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자신의 영혼의 힘으로 각인을 새기기 시작했다.
곧이어 새하얀 불꽃이 이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삼천 불꽃과 융합이 되지 않고 몸속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이기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아, 정화의 불꽃과 관련된 지도는 모두 모았느냐?”
약로의 질문에 이준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흑각성에서 하나 찾은 후로 전혀 단서를 얻지 못 했습니다.”
“정화의 불꽃은 나도 본 적이 없다. 만일 그 불꽃을 얻게 된다면 네 실력도 틀림없이 크게 올라갈 수 있을 테니 열심히 찾아보거라.”
약로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누가 널 찾아 성운각에 왔는데, 한 번 만나보겠느냐?”
잠시 후, 약로가 무언가 떠오른 듯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구요?”
“나설아다.”
약로의 대답을 듣는 순간, 이준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설아의 성격에 아무 일 없이 자신을 찾아올 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준의 머릿속에 불현 듯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진율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 * *
응접실 안에는 담청색 옷을 입은 여자가 의자에 어색하게 앉아 이리저리 둘러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끼익.
곧이어 굳게 닫혀있던 응접실 문이 서서히 열리며 낯익은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나설아는 그 청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긴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최근 중주에서 이준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의 못에서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준이 이렇게까지 대단한 강자가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사실 이준의 성장 속도는 그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잘 지냈어? 그때…… 피의 못에서 나와 보니 넌 이미 떠났더라고.”
이준이 응접실로 들어와 그녀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그때 일이 있어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어.”
나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전에 자신이 파혼을 요구했던 소년이 이제는 중주를 호령하는 성운각의 소각주이니,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무슨 일이야? 아무 일 없이 나를 찾아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준의 물음에 나설아는 주먹을 꼭 쥐고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스승님을 도와줬으면 해서 왔어.”
“역시……. 제대로 설명해 봐.”
“스승님께서는 반대하셨는데 내가 멋대로 널 찾아온 거야.”
나설아가 더듬더듬 말을 꺼내자, 이준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율희의 성격이라면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스승님과 내가 중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화종에 들어갔다고 말했었지……. 그 곳은 항상 산 속 깊은 곳에 은거하며 결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세력이니까.”
나설아는 어두운 얼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스승님이 화종의 명예 장로직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이유였어. 나도 스승님을 따라 그곳에 들어갔지. 우리는 화종 근처의 산속에서 살았고, 평소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 그런데 스승님이 산속에서 동굴 하나를 발견했어. 그 곳에는 두 다리가 잘린 할머니가 살고 계셨지.”
이준은 말없이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할머니는 스승님을 발견하는 순간 바로 공격을 했어. 하지만 스승님은 그 할머니께 계속해서 음식을 갖다 드렸지. 스승님은 그 후로 2년간 매일 같이 할머니를 보살펴 드렸어. 결국 처음에는 스승님을 믿지 않았던 할머니도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지.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우리랑 산지 1년 정도가 지났을 때였어. 할머니는 자기를 ‘화 할머니’라고 부르면 된다고 하셨지.”
나설아는 이 대목에서 긴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문제는 최근에 할머니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생겼어. 화 할머니께서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며 신기한 무투기로 자신의 마지막 염력을 스승님의 몸 속에 봉인한 뒤에 화종의 종주가 되라며 옥패 하나를 주셨지.
정말 놀라운 것은, 화 할머니가 투존 최고급 수준의 강자였다는 거야. 하지만 그 때까지 스승님도 나도, 할머니가 투존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 했지. 뭔가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기운을 완벽하게 감추셨던 것 같아.”
“그런데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문제가 생긴 거군.”
이준의 질문에 나설아는 또 다시 긴 한숨을 내뱉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스승님은 화종의 종주가 될 마음이 없다며 할머니의 장례를 치러주고 계속해서 나와 단 둘이 산속에서 살아갔어. 하지만 갑자기 6개월 전에 화종의 종주가 나타나 옥패를 내놓으라고 하더라고. 스승님은 흔쾌히 옥패를 내주셨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화 할머니가 스승님 몸속에 봉인해둔 염력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순간 나설아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