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화. 투성의 골수
화염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약로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이준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새로운 몸과 완벽하게 결합해 되살아나는 것은 이제 스승의 몫이었다.
‘스승님, 힘내십시오.’
잠시 휴식을 취한 이준은 곁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연금비약을 삼킨 뒤 눈을 감고 수련 상태로 들어갔다.
이준이 수련 상태로 들어가자 석탑 안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약로의 새로운 몸이 될 그릇이 불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 체력을 완전히 회복한 이준이 눈을 떴다.
석대 위의 스승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몸을 만드는데 사용한 재료가 재료인만큼 융합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했으니, 이준은 조금도 초조해 하지 않고 가만히 석대 위에서 불타고 있는 스승의 몸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별의 불꽃을 얻으며 실력이 폭등했지만, 2성 투존이 되려면 최소한 반 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 안에 영혼의 궁전이 쳐들어올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었다.
빠른 속도로 실력을 높이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가 행방을 알고 있는 천지의 불꽃은 모골의 손에 있는 ‘바다의 불꽃’이 유일했다. 하지만 모골의 행방을 알지 못 하니 바다의 불꽃을 손에 넣을 방법이 없었다.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은 눈을 반짝이며 저장반지에서 아주 오래된 지도 세 장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수 년 동안 모아왔던 신비한 지도의 일부였다. 이 지도에는 천지의 불꽃 중에서도 3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정화의 불꽃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정화의 불꽃’은 약로도 본 적이 없는 환상의 불꽃이었다. 이준 역시 몇 년 동안 수많은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이것과 관련된 정보를 전혀 얻어낼 수 없었다. 아마 이 손에 있는 지도마저 없었다면 정화의 불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불꽃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이 세 장으로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어.”
이준은 찢어진 지도 세 장을 조심히 내려놓고 한참동안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광활한 투기 대륙에서 이런 지형을 가진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그 누구도 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휴. 마지막 장을 찾아야만 그나마 정화의 불꽃이 어디 있는지 짐작이라도 할텐데…….”
하늘의 도움으로 이 세 장을 모을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지도와 관련된 정보를 전혀 얻을 수가 없었다. 사실 마지막 장이 정말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휴…….”
이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지도 조작을 다시 저장반지에 넣었다.
곧이어 이준은 고적 안에서 얻은 투성의 하얀 뼈 조각을 꺼내들었다. 사실 이 뼈 조각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 뼈 안에 숨겨진 ‘투성의 골수’ 때문이었다.
이준은 삼천불꽃을 이용해 모아둔 뼈 조각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천지의 불꽃의 도움이 있어도 투성의 뼈에서 골수를 빼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약로의 몸이 완성 될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제련 작업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틀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수련 상태에서 깨어난 이준은 화염 속에서 점점 회색이 되어가는 뼈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화염 속에 손을 넣어 손가락으로 가볍게 뼈를 눌러보자, 재가 된 뼛조각이 떨어져 나가며 엄지손가락 크기만한 말캉한 액체 덩어리 세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캉한 액체 덩어리에서는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농후한 에너지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준은 흥분된 눈빛으로 그 중 두 개를 약병 안에 넣고 나머지 하나를 입속에 집어넣었다.
투성 강자의 골수가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엄청난 에너지가 해일처럼 이준의 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들어오자, 그의 몸이 뜨거워지며 머리 위에서 새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3일 후, 투성 강자의 골수 안에 담긴 에너지를 모두 흡수하는데 성공한 이준은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실력은 어느새 1성 투존 최고 수준에서 2성 투존으로 성장해 있었다.
7레벨, 8레벨 연금비약 중에서도 투존을 승급시켜줄 수 있는 연금비약은 많지 않았으니, 투성 강자의 골수 안에 담긴 에너지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었다.
“후…….”
긴 한숨을 내쉰 이준은 다시 약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스승은 여전히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으음……. 들어간 재료가 재료다 보니 스승님도 쉽게 끝내시지 못 하네.’
잠시 고민하던 이준은 스승님 혼자 융합을 마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때, 돌연 석탑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뒤흔들리며 어디선가 살기를 가득 품은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운각. 이준과 약선을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
쾅!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린 이준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석탑 밖을 바라보았다.
“적성!”
성운봉에 있던 모든 제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특수한 운석으로 만들어진 결계 때문에 바깥 상황이 보이진 않았지만, 오늘 성운각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광장에서는 풍존을 비롯한 투존들이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혼의 궁전 놈들이 왔소.”
천화존자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이번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몰살시킬 작정을하고 온 것 같네요.”
수많은 강자들의 기운을 느낀 아라가 말했다.
하지만 풍존의 표정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영혼의 궁전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존이 천천히 인을 맺자, 성운각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일그러지며 결계 바깥 쪽에 있는 적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성운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집어삼켰다. 성운각 밖은 이미 백 명에 가까운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적성도 왔네요.”
수많은 검은 형체들 중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아라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봤던 흑, 백 천존도 보이는 구려.”
풍존의 말에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정말로 망혼산맥에서 봤던 흑, 백 천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천존이 세 명이나 몰려오다니, 우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긴 아나보군.”
풍존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각주님,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저렇게 많은 강자들을 이끌고 찾아온 것을 보니 그냥 사람만 데려가려고 온 것 같진 않습니다.”
성운각 장로 한 명이 다가와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성운각을 없애버릴 생각이 없었으면 천존 강자가 세 사람이나 올 필요는 없겠지.”
* * *
“풍존, 좋은 말로 할 때 이준과 약선을 데리고 나오시오. 설마 이 성운각의 결계가 정말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아니겠지?”
적성이 싸늘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광활한 숲 뿐이었지만, 적성은 이곳에 공간 결계가 쳐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계 안쪽에서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자, 적성이 흑백천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이서 이 결계를 파괴해 주시오. 오늘 성운각을 완전히 피바다로 만들어버리고 우리 영혼의 궁전에게 저항한 자들이 어떤 최후를 맞는지 만천하에 보여줍시다.”
그의 말에 흑, 백 천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번개처럼 인을 맺기 시작했다.
곧이어 세 천존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나오며 성운각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 위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부서져라!”
적성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자, 무시무시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단단한 공간 결계 위에 조금씩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 *
“결계가 세 사람의 공격을 버티지 못 하는 구려.”
결계 안에 있던 풍존이 무너져가는 공간 결계를 바라보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에 적들은 천존 셋에 투존 일곱, 십 수 명의 투종 강자들을 끌고 왔소. 특히 저 세 명의 천존은 무시무시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오.”
풍존이 이를 악물고 흑백천존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흑백 천존은 내가 맡겠소.”
“각주님 혼자서 5성 투존 둘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나 성운각 장로들은 사색이 되어 그럴 말렸다.
“아니오. 약선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번다면, 분명히 승산이 있을 것이오.”
풍존이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준과 약로가 석탑에 들어간 지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 둘 중 누구도 석탑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석탑에서 나오는 시간이 더 이상 늦어진다면…… 오늘 성운각은 멸망을 피할 수 없을것이다.
* * *
“적성은 제가 맡고 흑백 천존 중 한 명은 천지요괴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또 남은 한 사람은 아라와 천화존자 선생님이 맡아주세요.”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은! 이준 소각주님!? 소각주님이 나오셨다.”
“됐어! 이제 저 놈들에게 맞설 수 있겠어!”
이준이 나타나는 순간, 성운각의 제자들이 미친 듯이 환호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성운각의 젊은 제자들에게 있어 이준은 단순히 젊은 투존이 아닌, 성운각의 미래를 짊어진 영웅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왔느냐? 약선은?”
풍존이 기쁜 얼굴로 급히 물었다.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이준은 고개를 저으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결계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천존은 제가 맡을 게요. 아라 언니는 다른 투존 강자들을 막아주세요.”
그때, 곁에 있던 예린이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저에게 맡겨주세요.”
예린의 결연한 태도에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예린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아라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아무 이유 없이 예린을 천존과 싸우게 놔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정해지자, 이준은 곧바로 저장 반지에서 열한 마리의 요괴를 소환했다.
“선생님, 결계를 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결계가 파괴되겠어요.”
이준의 말에 풍존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을 맺었다.
그러자 공간 결계가 격렬하게 흔들리다 사라지더니 이내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안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결계가 사라지자 적성은 차갑게 웃으며 산봉우리 위에 우뚝 서있는 이준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준! 오늘은 어떻게 빠져나갈 셈이냐!”
이준은 표정 변화 없이 하늘을 뒤덮은 검은 안개를 바라봤다.
공간 결계 밖에는 어느새 다른 세력의 강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있었다.
영혼의 궁전 강자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든 모양이었다.
“적성, 오늘도 실패한다면 어떤 결과가 자넬 기다릴지 누구보다 잘 알 것이오.”
“나도 알고 있소!”
흑백 천존의 말에 적성은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한 뒤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성운각을 피로 물들여라!”
“예!”
적성의 명에 따라 수많은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백 여 명의 강자들이 동시에 쇠사슬을 내뿜자, 성운각의 하늘 전체가 새까만 쇠사슬로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