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죽음의 광단
이준에 이어 당진이 나서서 적성이 선두에 설 것을 요구했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 역시 동의한다는 듯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먼저 손을 쓸 것을 요구하자, 적성의 얼굴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준을 쳐죽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적성은 분노로 이를 갈면서 마지못해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 맞는 말이오. 내가 앞장서겠소. 하지만 이번 일은 강자가 많을수록 유리하오. 우리는 모두 한 배에 탄 것이니 지금만큼은 다들 마음에 품고 있는 원한들을 내려놓아 주시오.”
“걱정 마시지요. 적성 존자님이 투성 해골의 손에 죽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적성이 앞으로 나서자, 이준이 조롱 섞인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어서 움직입시다. 투성 해골이 핏빛 안개 속에서 힘을 보충하고 있는 것 같소.”
이준 말에 분노한 적성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황헌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로 투성 강자의 해골 주위에 있던 핏빛 안개가 빠른 속도로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성 존자님!”
이준이 소리쳤다.
“알겠으니 닥치거라!”
적성은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이준을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대전의 중심이 있는 해골을 향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하지만 투성 강자의 해골이 은은한 붉은 빛이 도는 손을 앞으로 내밀자, 해일과도 같은 염력이 적성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에 적성은 재빨리 주먹을 쥐고 염력을 끌어 모아 해골의 팔뚝을 막아냈다.
쾅!
적성의 주먹과 해골의 팔이 부딪히는 순간, 적성의 몸이 저만치 뒤로 밀려났다.
5성 투존을 가볍게 밀어내는 모습에 자리에 있던 다른 강자들은 저도 모르게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체에 남은 영혼의 힘만으로도 이 정도 힘을 낼 수 있다면, 진짜 투성 강자의 힘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쉭!
그때, 핏빛 안개 속에서 그림자 몇 개가 번개처럼 튀어 나와 적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정체는 바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여섯 마리의 흡혈 요괴들이었다.
흡혈 요괴들이 나타나는 순간, 적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다들 안 움직이고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적성이 황급히 뒤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당진 곡주, 빙존자, 그리고 이준 선생, 우리가 힘을 합쳐 저 투성 해골을 처리하는 게 어떻겠소?”
상황을 지켜보던 황헌이 당진, 빙존자 등 5, 6성 투존의 실력을 가진 강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이는 다소 이상한 일이었다. 당진이나 빙존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작 1성 투존 밖에 되지 않는 이준에게 협공을 제안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준은 황헌이 자신을 끼워 넣은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황헌은 투성 강자와의 전투에 자신을 참가시켜 힘을 빼놓으려는 것이 분명했 다.
“예.”
이준이 적당한 핑계를 찾고 있는 사이, 당진과 빙존이 황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때문에 이준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요괴들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단 한 마리도 그쪽으로 보내지 않겠습니다.”
황헌이 도움을 청한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강자들이 말했다. 그들은 투성 해골을 상대할 정도의 실력은 되지 않지만, 흡혈 요괴를 막기에는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심해.”
아라가 조용히 속삭였다.
“응. 상황이 안 좋아진다면 내 걱정 말고 바로 피해. 난 괜찮으니까.”
이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당진과 함께 대전 안으로 날아가 투성 해골에 맞서기 시작했다.
곧이어 남은 강자들도 대전 안으로 들어가 흡혈 요괴들과 치열한 혈투를 벌였다.
황헌과 당진 등이 자신을 도우러 오는 것을 확인한 적성이 안도한 듯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괴물의 속도가 보통이 아니오. 다들 함께 움직여야하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헌의 어깨에서 커다란 날개가 펼쳐지더니 번개 같은 속도로 투성 강자의 해골 위로 날아갔다.
그의 뒤를 따라 당진, 빙존자, 적성, 이준이 차례로 공격을 쏟아 부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매서운 공격에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오며 해골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던 붉은 빛이 빠르게 옅어지기 시작했다.
쉭!
투존들의 협공에 당한 해골이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이준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자갈색 화염에 휩싸인 주먹으로 놈의 등을 강타했다. 그 순간, 해골의 몸에 서 뿜어져 나오던 흉흉한 붉은 빛이 빠르게 사라졌다.
바로 그때, 새하얀 뼈 위에 이상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이준의 눈에 들어왔다.
‘저 글씨는 설마…… 1격 무투기?’
해골의 뼈 위에 새겨져 있는 기이한 글자를 발견한 순간, 이준은 왜 적성이 투성 강자의 해골에 손을 대려 했는지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적성, 처음부터 1격 무투기가 이 해골에 기록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로군. 교활한 놈 같으니…….’
다시 한 번 자갈색 화염을 두른 주먹을 휘둘러 투성 강자의 해골을 내리치자, 붉은 빛이 사라지며 또 다른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달아 투성 강자의 해골을 공격한 이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골의 수많은 뼈 중 단 세 개의 뼈에만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글씨가 써진 갈비뼈가 총 세 개…….’
진짜 1격 무투기가 기록된 위치를 확인한 순간, 이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좀만 더 힘내시오.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오.”
투존들의 협공에 의해 해골의 몸을 뒤덮고 있던 붉은 기운이 서서히 걷혀가자, 적성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황헌을 비롯한 다른 투존들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투존 다섯이 달려들어 공격을 퍼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기운을 걷어내는데 성공했을 뿐, 해골의 뼈에는 아직 금조차 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펑펑펑!
형형색색의 염력이 유성처럼 허공을 가르며 투성의 몸에 맞부딪히자, 무서운 힘이 폭발하며 단단한 대전에 팔뚝만한 균열이 가득 생겨났다.
다섯 명의 공격에 해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핏빛은 점점 옅어졌지만, 새빨간 두 눈은 점점 더 격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해골의 몸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적성을 비롯한 투존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폭우처럼 공격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준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제 아무리 시체 위에 영혼의 힘이 덧씌워진 것뿐이라지만, 투성 강자의 힘이 이 정도일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장 대전을 빠져 나가!”
잠시 후, 무언가를 느낀 이준이 고개를 돌려 아라가 있는 곳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외침을 들은 아라 일행은 물을 새도 없이 대전 밖으로 날아갔다.
크르릉!
그와 동시에 해골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섬뜩한 목소리가 뼈 밖에 없는 목구멍을 타고 새어나왔다.
“죽음의 광단!”
섬뜩한 목소리가 고막을 꿰뚫는 순간, 이준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해골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달아났다.
“무투기다! 어서 달아나!”
당진 역시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새파랗게 질려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따.
“이런 개 같은…….”
이준과 당진이 달아나자 적성 역시 욕설을 내뱉으며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투존들이 새파랗게 질려 달아나는 모습에 대전 안에 있던 다른 강자들도 황급히 달아났다.
잠시 후, 주위에 있던 핏빛 안개가 미친 듯이 해골의 오른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해골의 손 위에 검은색 구체 하나가 생겨났다.
곧이어 투성 해골은 검은 구체가 생겨난 오른손을 들어 올린 뒤 대전 바닥을 세차게 내리쳤다.
하지만 엄청난 힘으로 내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모두가 이 기묘한 현상에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불길한 기운을 내뿜던 검은 구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방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쉭쉭쉭!
검은 광단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돌바닥이든, 돌기둥이든 사람이든,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서 도망쳐!”
“으악!”
자리에 있던 강자들은 사력을 다해 달아났지만, 검은 광단을 따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광단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강자들을 소용돌이처럼 빨아들였고, 빨려 들어간 강자들은 광단에 몸이 닿는 순간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검은 광단 안으로 빨려 들어가 소리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투성 강자의 힘 앞에 이준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쉭!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섬뜩한 검은 빛이 이준의 발치까지 따라왔다. 검은 광단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대전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이준의 속도로도 더 이상 달아날 수가 없었다.
‘젠장! 흡인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벗어나지 못하면 잡아먹히고 말 거야.’
이대로 달아나다가는 꼼짝없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 판단한 이준은 자신이 가진 모든 무투기를 시전했다.
“태양검!”
“산의 힘! 바다의 힘!”
하지만 검은 광단은 이준이 혼신의 힘을 담아 사용한 무투기마저 모두 빨아들이며 더욱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다가왔다.
“번개의 분신!”
검은 광단이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려는 찰나, 영혼 분신이 이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쾅!
은색으로 빛나는 분신은 혼신의 힘을 다해 본체를 향해 주먹을 날렸고, 이준은 그 주먹의 추진력을 이용해 더욱 빠른 속도로 광단의 범위 밖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이준의 발판이 된 번개 분신은 그대로 검은 광단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까악!”
그때, 이준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황헌의 입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그의 몸이 순식간에 인간에서 봉황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본 모습을 드러낸 황헌은 미친 듯이 날개를 펄럭이며 간신히 광단을 따돌리고 대전 밖 복도에 고꾸라졌다.
당진, 빙존자, 적성 역시 그의 뒤를 따라 죽을힘을 다해 대전 밖으로 빠져 나갔다.
간신히 대전 밖으로 나오는데 성공한 강자들은 숨조차 돌리지 못 하고 대전 안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 검은 광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광단은 대전 안의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뒤에야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대전을 바라보는 이준의 몸에서는 식은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준의 시야에 해골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흉흉한 붉은 빛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마치 해골에 남아있던 마지막 한줌의 힘마저 모두 사용하고 이제는 정말 아무런 힘도 없는 뼈 조각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1격 무투기!’
그 순간, 새하얀 해골을 바라보는 이준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해골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한 이준이 어떻게 하면 남몰래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적성의 입가에도 미소가 내려앉아 있었다. 투성 강자가 남긴 영혼의 힘이 모두 사라지면서 해골이 움직임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전 해골의 무시무시한 힘을 직접 느꼈으니 섣불리 다가오지는 못 하고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