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화. 뜻밖의 재회
‘정말로 마수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건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게다가 어떻게 열 명이나 되는 강자들을 이렇게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숨겨둘 수 있었지?’
그들을 가만히 훑어보던 이준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여자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는 강자들은 심지어 요괴처럼 이성이 사라진 상태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저 신비한 흰털 마수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우리가 나설까?”
옆에 있던 아라가 살기로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거나 저 여자가 도망가는 일이 없도록 주변을 지키고 있어줘.”
그러나 이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뒤 자신의 요괴 무리를 불러냈다.
“또 얼마나 대단한 걸 갖고 있나 보여주지 그래?”
요괴들을 이용해 지옥 이무기족의 강자들을 저지한 이준은 곧바로 검은 그림자에게 돌진해 다시 한 번 화염에 휩싸인 주먹을 날렸다.
아까 전 한 번의 격돌로 자갈색 화염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이준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빠르게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준은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오며 집요하게 주먹을 날려댔고, 결국 더 이상 피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낀 괴한은 이를 악물고 빠르게 인을 맺기 시작했다.
“탈혼법!”
그녀가 인을 맺는 순간, 눈부신 초록빛이 터져 나와 이준의 몸을 밝게 비췄다.
괴한이 내뿜은 빛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이준은 황급히 화염으로 몸을 감싸며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천지의 화염으로 몸을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준은 급히 영혼의 힘을 움직여 그 이상한 느낌을 억눌렀다.
“젠장, 이건 대체 무슨 무투기야!”
그간 운남종부터 시작해 각종 마수들과 중주의 유명 세력들을 비롯해 영혼의 궁전까지, 온갖 적들과 싸워온 이준이었지만 이토록 이상한 공격을 당하는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간신히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제어한 이준은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러 괴한을 공격하려 했지만, 또 다시 초록빛이 터져 나와 그의 공격을 막았다.
쾅!
하지만 미처 막아내지 못한 힘이 그녀를 뒤로 밀어냈고, 그로 인해 제련실의 대들보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어서 마수를 내놔!”
“꿈 깨!”
그러나 검은 그림자가 다시 한 번 인을 맺자, 또 다시 기이한 녹색 빛이 번쩍이며 그녀의 손 안에 들려있던 하얀 마수가 거짓말처럼 종적을 감췄다.
“요괴의 눈동자!”
곧이어 그녀의 귀신가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가면 위로 얼굴 크기만 한 녹색 눈알이 나타났다. 커다란 녹색 눈알의 눈동자 주위에는 뱀 세 마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이상한 기운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 거대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준은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당황한 이준은 황급히 영혼 무투기를 사용해 눈동자를 공격했다.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일반적인 무투기로는 영혼을 조종하는 그 기이한 힘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쉬익!
인을 맺자, 그의 영혼의 힘이 주먹 모양으로 변해 눈동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이준의 영혼 무투기가 괴상한 눈과 부딪히는 순간, 그 눈이 격하게 떨리더니 검은 그림자의 가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강한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대로 날아가 단단한 벽에 부딪히며 빨간 피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녀의 귀신가면 역시 두 동강이 났다.
상대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이준은 검은 송곳을 꺼낸 뒤 그녀의 목 부분에 가져다대며 물었다.
“이제 가져가도 되는 거지?”
“안 돼!”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준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귀신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녀의 신비한 녹색 눈에는 작은 점 세 개가 눈동자를 감싸고 천천히 맴돌고 있었다.
“이건…… 뱀의 눈동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찬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너…… 예린이야?”
뱀의 눈동자는 아라의 재난독체보다 더욱 희귀한 것으로, 이준이 가한제국에 있을 당시 구해주었던 ‘예린’이라는 소녀가 가지고 있던 신비한 힘이 깃든 눈동자였다.
이후 이준은 예린을 보호해 주려 했지만 사막에서 돌아왔을 때는 문씨 가문에서 그녀를 데려간 상태였고, 문씨 가문에 쳐들어갔을 때는 다시 하늘 뱀족에서 그녀를 데려간 뒤였다.
그런데 그때 사라졌던 예린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며 의심 섞인 눈초리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너,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그녀의 반응에 이준의 눈동자가 더욱 크게 흔들렸다.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이 그때 그 여리고 약했던 소녀라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래?”
그 때, 아라가 이준에게 다가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쉬익!
몰라볼 정도로 자라난 예린을 바라보는 이준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내려앉았다. 그 신비한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이렇게 코앞에 두고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것 같은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던 이준이 갑자기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예린 역시 영문을 알지 못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으며 상대의 반응을 살피던 이준은 피식 웃으며 검은 송곳을 들어 그녀의 눈 앞에 흔들어 보였다.
“꼬맹이, 이거 생각 안 나?”
예린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얼굴 앞에 있는 검은 송곳을 바라봤다.
“가한 제국, 타르 사막, 사막의 칼날 용병단.”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그녀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 하다가 더듬더듬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름을 끄집어냈다.
“이, 이준 도련님?”
“기억났나봐?”
이준은 씩 웃으며 예린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몇 년 안 본 사이에 다 컸네.”
예린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하늘 뱀족에게 끌려간 이후, 이준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문씨 가문까지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예린은 스스로를 그저 이준이 불쌍해서 거둬 준 하찮은 하녀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늘 무시 받고 외면당하던, 심지어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 하던 자신을 거둬주었을 뿐 아니라 기꺼이 목숨을 걸고 문씨 가문에 맞서주기까지 했었다. 그런 이준을 그녀가 어찌 잊겠는가?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아라를 비롯한 이준의 일행들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옥 이무기족과 보람을 습격한 괴한이 이준과 아는 사이라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이게 뭔 상황이야?”
보람의 질문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다쳤지?”
“도련님…….”
이준의 다정한 태도에 예린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도련님은 무슨, 괜찮다면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돼.”
“아……아뇨. 아무래도 이준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요.”
예린은 급히 고개를 저으며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예린이 마수들을 지배하는 삼대 세력 중 하나인 지옥 이무기족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인물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하늘 뱀족들이 널 데려갔다고 해서 걱정했어.”
“네, 하늘 뱀족 사람들은 저에게 아주 잘해줬어요.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떠나게 되었지만…….”
예린은 자신이 이곳까지 흘러오게 된 연유를 밝히지 않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말은 일부는 거짓이었고, 일부는 사실이었다. 하늘 뱀족 사람들은 그녀가 가진 뱀의 눈동자의 힘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고, 때문에 그녀를 차기 족장 후보로 키워왔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마을의 장로들이 전 족장의 아들과 그녀를 결혼시키려 하는 바람에 하늘 뱀족 마을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하늘 뱀족 마을을 떠난 예린은 가한제국으로 돌아갔지만, 가한제국은 이미 그녀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거기서 어린 시절 자신을 거두어주었던 ‘이준’이 이제는 가한제국 전체를 호령하는 세력의 수장이 되었고, 지금은 중주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무작정 이준을 쫓아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물론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이준을 만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지만.
“그…… 이준 도련님, 저…….”
예린의 눈에서 갑자기 초록빛이 번쩍이더니 그녀의 손 위에 다시 새하얀 마수가 나타났다. 예린이 손에서 힘을 빼자 마수는 허겁지겁 이준의 품으로 뛰어들어 겁에 질린 커다란 눈망울로 예린을 보았다.
이준은 마수를 쓰다듬으며 질문을 던졌다.
“비약 마수가 필요한 거야?”
예린은 잠시 망설이며 고개를 저었다가 이준이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자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아이의 피로 몸속의 독을 해독할 생각이었어요.”
“독?”
이준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 줘봐. 한 번 보자.”
예린의 손을 붙잡은 이준은 그녀의 몸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독 성분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건 대체 무슨 독이야?”
이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지옥 이무기족의 이무기 독이에요. 해독방법이 없는 독으로 불리죠.”
예린이 말했다.
“아니야. 해독제가 없는 독이라는 건 없어.”
이준은 예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단호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이무기의 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약 마수의 피라면 무슨 독이든 다 치료할 수 있다고 들어서 여기까지 와본 거예요. 설마 진짜 이런 신기한 생물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예린이 이준의 품에 안긴 마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이것만으로 그 독을 제거할 수는 없을 거야.”
그 때,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라가 입을 열었다.
“응. 하지만 비약마수의 피라면 확실히 이무기의 독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거야. 아마 추가적으로 뭔가 더 다른 처방이 필요한 거겠지.”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라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왜 지옥 이무기들을 건드린 거야?”
“제가 건드린게 아니라, 그들이 절 먼저 공격했어요!”
이준의 질문에 예린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지옥 이무기족의 장로가 제 눈을 보자마자 절 잡아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반항을 한 것뿐이라고요!”
“뱀의 눈동자잖아. 채린 언니나 나 정도 되면 모를까, 대부분의 마수들은 뱀의 눈동자를 탐내겠지. 아니, 두려워한다고 봐야하나? 대부분의 마수들은 뱀의 눈동자를 보면 없애든 손에 넣든, 둘 중 하나를 택할 거야. 결코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
보람은 여전히 예린이 자신을 공격했던 것이 마음속에 남아있는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이준은 웃으며 예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걱정 마. 방법이 없진 않을 거야. 하지만 고적을 빠져나가서 도와줄게. 여기서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 괜찮지?”
“네.”
예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