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화. 비약마수
2층에 도착한 순간, 아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준, 사람들에게 독을 없애는 연금비약을 나눠줘. 공기에 독이 가득해.”
아라의 말에 이준은 곧바로 해독 효과가 있는 연금비약을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2층의 공기에서는 약간 퀴퀴한 냄새가 느껴질 뿐, 독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라가 독 기운을 잘못 느낄 리는 없으니, 아마도 투성 강자가 준비해 놓은 함정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2층엔 사람이 많이 없더라니, 덫에 걸린 사람들이 있나보네.”
2층의 안쪽으로 들어가던 이준이 곳곳에 널린 시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부 색으로 보아하니 공기 중에 떠다니는 독성분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전각은 3층까지 있어. 귀한 것들은 분명 3층에 있을 텐데, 2층에 독이 있다면 3층도 분명 무언가 함정이 있을 거야. 다들 조심해.”
이준의 말에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아라가 아니었다면 중독이 되고 나서야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3층에서도 이런 행운이 따라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으니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후 이준 일행은 2층에 위치한 방들을 둘러보았지만, 이렇다 할 좋은 물건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2층의 함정을 돌파한 다른 강자들이 선수를 친 것 같았다.
한참을 둘러봐도 마땅한 수확이 없자 이준 일행은 발걸음을 돌려 3층으로 향했다.
전각의 3층은 2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고, 사방에 휘황찬란한 장식이 가득했다.
“독이 더 짙어졌어. 조심해.”
3층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아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3층에는 2층보다 더욱 적은 수의 사람만이 있었고, 가장 약한 사람도 투종 끝자락 수준의 실력자였다.
이준 일행이 등장하는 순간, 3층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3층에 전설속의 9레벨 연금비약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연금비약 제련실을 둘러보던 천화존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9레벨 연금비약은 투성 강자들도 보기 어려운 물건인데 있을 리가 없죠.”
이준은 씩 웃으며 아직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준이 들어간 방에는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아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던 이준은 오래된 조합표를 발견하고는 제대로 확인조차 해보지 않고 저장 반지 안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한가롭게 조합표 안의 내용을 살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는 아직 개봉되지 않은 연금비약도 있었다. 약병 사이로 흘러나오는 약향으로 미루어보아 7레벨 연금비약인 듯싶었지만, 어떤 연금비약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방을 모두 둘러본 이준 일행은 망설임 없이 다음 방으로, 또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총 8개의 방안을 둘러보는 동안 몇 개의 조합표와 7레벨 연금비약을 얻을 수 있었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성과였다.
이준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구석에 위치한 연금비약 제련실로 들어갔다. 제련실의 크기는 다른 방보다 훨씬 작았으며, 이미 누군가 들른 듯 방안의 물건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가자.”
이번에도 별다른 것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이준이 막 방 밖을 나서려는 순간, 돌연 하얀 그림자 하나가 구석에서 튀어나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이준은 화들짝 놀라 주먹에 불꽃을 피워내며 새하얀 물체를 노려봤다.
새하얀 물체의 정체는 솜털이 복슬복슬하게 돋아난 고양이처럼 생긴 마수였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마수답지 않게 귀엽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생김새였다.
새하얀 마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준은 곧바로 몸을 돌려 다른 방으로 향하려 했다. 귀여운 애완동물이라도 구하고 싶어 이곳에 온 게 아니라면 이런 것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막 방문을 벗어나려는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번뜩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어째서 투성 강자가 온갖 진귀한 연금비약을 모아둔 창고에 이런 토실토실한 마수를 기르고 있단 말인가?
방을 나서려던 이준이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그 마수를 들여다보고 있자,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
하지만 이준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동안이나 가만히 앉아 그 솜털 같은 마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스라치듯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이거, 연금비약이야!”
이준의 말에 아라는 물론이고 천화존자마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린채 그 마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것은…… 살아있는 마수가 아닌가?”
하얀 마수는 동그란 눈을 연신 깜빡이며 마치 새끼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이준 일행을 바라봤다. 연금비약이라고 하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정말 이게 연금비약이라고?”
아라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되묻자, 이준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확실해. 아무런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지만, 이 방에 떠도는 약향의 근원이 이놈이야.”
“9레벨 연금비약은 살아있는 생명과도 같다더니……. 설마 이런 의미였단 말인가?”
천화존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눈덩이처럼 굴러다니는 마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으음……. 저도 확신은 못 하겠어요. 하지만 최소한 팔색, 아니면 구색 비뢰를 맞은 연금비약인 것 같아요. 8레벨 최고 수준이나 9레벨 연금비약이겠죠.”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아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런 물건이라면 고적 안에 있는 다른 강자들도 모두 탐을 낼 거야.”
아라의 말을 들은 이준은 곧바로 영진을 바라보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에 영진은 한 치의 망실임도 없이 대문 밖으로 나가 그 앞을 지켰다. 다른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오지 못 하도록 지키려는 것이다.
“뭐해! 빨리 저 녀석을 잡아야지!”
영진이 문을 지키는 것을 확인한 보람이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진정하라는 듯한 손짓을 해보였다.
“아니야, 마수의 형태로 변할 정도의 에너지를 가진 놈이야. 자칫 잘못하면 이대로 달아나 버릴지도 몰라.”
“그럼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아라의 질문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4레벨 연금비약이 들어있는 옥병 하나를 꺼내 그것을 마수에게 던져 주었다.
연금비약이 자신에게 데굴데굴 굴러오자, 흰털 마수는 살짝 놀라 거리를 두고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이준의 예상과 달리 그 마수는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레벨이 낮은 연금비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행동에 이준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아라와 보람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연금비약 주제에 까다롭기는…….”
이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6레벨 연금비약 하나를 꺼내 던져주자, 하얀 마수는 또 다시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다가 그것을 날름 집어삼켰다.
6레벨 연금비약을 맛 본 흰털 마수는 아직 성에 차지 않은 듯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며 이준을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고적의 기록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연금비약 마수들은 연금비약을 주식으로 삼기 때문에 연금비약으로 길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준이 6레벨 연금비약을 계속해서 던져주자, 마수는 신이 나서 그것을 넙죽 넙죽 받아먹었다. 결국 이준은 순식간에 10개에 가까운 연금비약을 털리고 말았다.
“이거 너무 탕진하는데…….”
이준이 6레벨 연금비약을 계속해서 던져대자, 천화존자는 괜스레 마음이 아려왔다. 밖에서는 6레벨 연금비약만 해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 아니던가.
“저 입맛 까다로운 녀석이 6레벨 이하면 먹질 않는데 어쩔 수 없죠.”
이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천화존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렇게 10분간 이준은 무려 20개의 6레벨 연금비약과 8개의 7레벨 연금비약을 먹이로 주었다.
이준도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흰털 마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리를 펴고 작은 손으로 배를 두드렸다.
드디어 배가 찬 흰털 마수를 바라보던 이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흰털마수는 이준을 따라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아직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이준은 그제야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는 곧바로 생골의 비약이 들어있는 약병을 꺼내들었다.
생골의 비약 향을 맡는 순간, 마수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이준을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놈이 막 이준의 품에 안기려는 찰나, 검은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와 흰털 마수를 낚아채갔다.
다 잡은 사냥감을 놓친 이준은 분노에 휩싸여 자갈색 화염을 몸에 두른 채 괴한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하지만 검은 그림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태연하게 주먹을 들어 이준의 주먹을 막은 뒤 저만치 뒤로 물러나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비약 마수는 내가 오랫동안 찾던 녀석이야!”
검은 그림자를 노려보던 이준은 그녀의 얼굴에 씌워진 귀신 가면을 보는 순간 눈을 번뜩였다.
“또 너구나!”
괴한의 정체는 바로 보람을 습격했던 그 정체불명의 여자였다.
“너! 그 때 날 건드렸던 그 계집이지!”
보람 역시 그녀를 알아보고는 곧바로 소리를 질렀고, 그와 동시에 천화존자와 아라가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그녀의 앞뒤를 막아섰다.
“그 물건을 다시 우리에게 넘겨. 그럼 지난 번 저 애를 건드린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
이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자, 괴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이 마수는 내가 먼저 찾던 거야. 꼭 내가 뺏은 것처럼 말하네! 내가 순순히 넘겨줄 것 같아?”
“야! 주인도 없는 물건인데 먼저 본 사람이 임자지! 그럼 그 마수를 내려놓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 보자고!”
보람이 소리쳤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는 피식 웃음을 지을 뿐 마수를 놔주지 않았다. 이대로 놔주면 마수가 이준에게 가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난 넘겨줄 생각 없어.”
귀신 가면을 쓴 여인이 신비한 녹색 빛이 반짝이는 눈으로 이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준의 눈빛도 점차 싸늘하게 변했다. 저 신기한 마수를 잡아 잘 키운다면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9레벨 연금비약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 무력을 써서라도 반드시 마수를 회수해야 했다.
“좋아, 그럼 힘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준의 몸에서 자갈색 화염이 솟아나더니 번개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괴한의 가슴팍에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의 속도 역시 만만치 않았고, 이준의 주먹은 결국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흥, 해보려면 해보시지.”
곧이어 가면 아래에 감춰진 얼굴에서 신비한 녹색 빛이 번쩍이더니 돌연 10개 정도의 그림자가 나타나 이준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위험을 감지한 이준은 빠르게 몸을 날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피했다.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투존 둘과 투종 여덟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옥 이무기족……?’
그들의 정체가 지옥 이무기족의 강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이준은 그간 실종된 지옥 이무기족의 강자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줄 알았던 지옥 이무기족의 강자들이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