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화. 선조의 힘
그렇게 다른 강자들이 이준을 지키고 있던 투존들을 상대하고 있는 사이, 백발의 사내가 제단 위로 날아들며 이준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늘 봉황의 주먹!”
사내가 주먹을 내지르자, 눈부신 금빛 섬광이 폭발하며 이준을 덮쳤다.
“대지의 힘!”
이준 역시 이에 맞서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투기 중 하나를 사용했고, 두 사람의 무투기가 맞부딪히는 순간 천지를 집어삼킬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실력이 제법이구나!”
이준이 눈 하나 깜짝 않고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자, 사내의 등 뒤에서 봉황의 날개가 펼쳐지며 그의 몸이 돌연 시야에서 사라졌다.
봉황의 날개를 사용한 사내의 속도는 실로 번개를 방불케 했고, 마치 수십 명으로 늘어난 것처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이준의 몸을 가격했다.
그러나 이준의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자갈색의 화염이 가진 엄청난 방어력에 사내는 수십 번을 공격하고도 이준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 했다.
“하찮은 인간 녀석이 봉황 마수보다 더 강할 리가 없다!”
이준의 방어를 뚫지 못한 사내는 분노한 듯 포효를 내지르며 다시 한 번 이준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바로 그 때, 제단 위에 서있던 봉연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더니 자주색 피로 허공에 기이한 문양을 그렸다.
“피의 계약, 선조의 영혼 소환!”
봉연이 무릎을 꿇고 소리치자, 완성된 문양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 붉은 평원을 뒤덮더니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대지가 흔들리며 평원 위에 묻혀있던 거대한 봉황의 뼈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어디선가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정신이 아득해지며 이준 일행의 몸속에서 움직이던 염력이 무언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듯 서서히 멈춰섰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염력을 봉인당하는 것을 느낀 이준 일행은 황급히 전장을 벗어나 제단 위로 달아났다.
이준 일행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당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봉황 일족의 기운 위로 더욱 거대한 기운이 솟아오르며 봉연의 힘을 완전히 짓눌러 버렸다.
“봉황이라, 그래봤자 조금 큰 새 아니야? 전설의 용에 비할바는 못 되지.”
보람의 몸에서 눈부신 금빛 광채가 쏟아져 나오며 이준 일행의 염력을 억누르고 있던 기이한 힘을 몰아내자, 천화존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족과 봉황족의 힘이라니, 정말 놀랍군. 이 정도 힘이라면 틀림없이 둘 모두 투성 강자였던 것 같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평원 위에 있는 거대한 뼈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두 마수의 영혼이 가진 힘이 이토록 큰 것을 보니 천화존자의 말대로 둘 모두 투성급 강자였던 것이 분명했다.
보람이 용족 선조의 영혼을 소환하는 순간, 봉연과 황헌을 비롯한 봉황족의 사람들은 이준 일행이 어떻게 마수의 영혼 장막을 뚫고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해했다.
“당황하지 마라. 저 녀석은 아직 어린 아이일 뿐이다!”
황헌이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연아, 가거라. 우리 봉황족 선조의 힘을 보여주거라!”
노인의 외침에 나정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봉연이 정말로 저 용족의 꼬맹이를 죽여 버린다면 용족들이 자신들을 찾아와 복수를 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봉연은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헌의 명에 따라 보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보람을 향해 돌진하던 봉연이 힘차게 주먹을 휘두르자, 봉황의 맑은 울음소리와 함께 눈부신 황금빛 봉황이 나타나 제단 위에 있는 이준 일행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보람이 날아와 황금색 봉황을 향해 주먹을 움켜쥐자, 공간이 무너져 내리며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균열이 생겨나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봉황을 집어삼켰다.
이에 봉연은 공간의 균열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봉황을 향해 황급히 자신의 피를 흩뿌렸다.
봉연의 피가 봉황의 몸을 적시는 순간, 봉황의 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공간의 균열을 벗어나 다시 한 번 이준 일행을 향해 돌진했다.
“어딜!”
그러나 보람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손을 휘두르자, 자주색 용이 날아와 봉황의 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부서져라!”
보람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순간, 용에게 붙잡힌 봉황의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
“푸흡!”
그와 동시에 봉연의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터져 나오며 선조의 힘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선조의 힘이 사라지자, 봉연과 황헌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보람과 이준을 바라봤다.
“황 장로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때, 상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나정필이 황헌에게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황헌은 이를 악문채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갑시다!”
“하지만 용황 열매가!”
백발의 사내가 황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 이를 갈며 제단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쩌자는 말인가? 자네가 뺏어올 수 있겠나? 이 마수의 장막을 벗어나면 용족 놈들의 선조의 힘이 사라질 터이니 그 때를 노려보세.”
이어지는 황헌의 말에 사내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못 하고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
봉연을 비롯한 봉황족의 강자들이 달아나는 것을 본 보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내리치자, 새까만 공간의 균열이 미친 듯이 뻗어나가며 그들을 덮쳤다.
이에 황헌은 자신의 염력을 모조리 폭발시켜 주먹을 내질렀지만, 5성 투존인 그의 실력으로도 선조의 힘을 빌린 보람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 하고 곧바로 피를 토하고 말았다.
“어서, 어서 달아나게!”
간신히 달아난 황헌은 봉연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마수의 장막을 벗어났고, 나정필과 다른 투존들 역시 새파랗게 질린 채 부리나케 바깥으로 달아났다.
5성 투존을 일격에 박살내 버리는 모습에 이준 일행은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다가 멍한 표정으로 보람을 바라봤다.
용족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죽은 지 수천 년 이상 지난 선조의 힘을 빌린 것만으로 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는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흥…….”
마지막 사람까지 그 곳을 빠져나가자 보람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괜찮아?”
이준은 황급히 보람을 부축하며 저장반지에서 연금비약을 꺼내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괜찮아. 선조의 힘이 너무 강해서 나에겐 아직 무리였나 봐.”
연금비약을 삼킨 보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래도 그 영감에게 제대로 한방 먹여줬으니 고적에서 다시 만난다 해도 절대 제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거야.”
“응.”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람의 등을 살살 두드려 주었다.
“걱정 마. 절대로 용황 열매를 놈들에게 내주는 일은 없을거야.”
“아니야. 고적 밖으로 나간 뒤에도 저놈들은 절대 용황 열매를 포기하지 않을거야. 나도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야겠어. 우리 힘만으로는 봉황족의 강자들을 당해낼 수 없어.”
보람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와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고 생각한 이준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응. 용족 강자들이 와준다면 제 아무리 봉황족이라해도 어쩌지 못할거야.”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른 일이 또 생기기 전에 먼저 용황 열매를 챙기자.”
보람은 고개를 끄덕이곤 비틀거리며 열매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손가락을깨물어 피를 낸 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용황 열매에 가져다 대자, 열매가 금빛과 자주색의 액체로 변해 그녀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전설의 용황 열매를 흡수한 보람의 몸에는 용황 열매 모양의 문양이 생겨났다.
“힘이 너무 강해서 잠깐동안만 봉인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어서 우리 가문의 장로님을 모셔와 해결해야겠어.”
생각 이상으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자, 이준의 마음속에서 잠시 미루어 두었던 1격 무투기에 대한 욕심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우선 여길 벗어나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1격 무투기를 찾아보자.”
이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혼령 열매도, 용황 열매도 손에 넣었으니 더 이상 이 숲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이준은 다시 한 번 전설의 봉황 마수와 용이 묻힌 평원을 바라보곤 빠르게 마수의 장막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숲으로 돌아온 이준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람의 공격에 의해 입은 부상이 컸는지, 주위에서 봉황족 강자들의 기운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멀리 도망간 걸 보니 꽤나 크게 다쳤나보네.”
“응.”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 인기척이 커지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마수들도 모두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왔던 길을 되돌아 출구로 향했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이준 일행은 다른 세력들의 강자들을 수도 없이 마주쳤다. 그들은 이준 일행이 숲속 깊은 곳에서 튀어나오자 눈을 번뜩이며 바라보기는 했지만, 차마 앞길을 막아서지는 못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하자, 20여분 만에 이곳으로 들어올 때 지났던 석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봉황족 강자들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보니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나간 듯 보였다.
석문이 열리자, 이준 일행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숲 속을 둘러보았다. 봉황 족도, 용족도 없으니 숲속에 있던 마수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세력들이 마수들에 의해 어떤 피해를 입든, 이준이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널따란 복도로 나온 그들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복도와 양쪽 방들을 둘러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어디 가?”
아라가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진짜 귀한 것들은 대전 중심에 있을 거야.”
이준은 잠시 고민하다 복도 반대편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말끔했던 복도는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복도 곳곳에 위치한 방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대전의 중심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보물을 찾으러 들어온 다른 세력들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들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 이었다.
“연금비약이야…….”
그들의 뒤를 따라가던 이준은 어디선가 풍겨오는 익숙한 냄새를 느끼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금비약 냄새가 아주 짙은 걸 보니 연금비약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가 있는 것 같아.”
“진짜?”
‘연금비약’이라는 말에 모두 눈을 반짝였다. 투성 강자가 모아 놓은 연금비약 이 가득한 창고라니, 모두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가자. 나도 고대의 연금 비약이 어떤 건지 한 번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속도를 높여 앞서가던 세력들을 하나하나 추월해 나갔다.
대전의 복도는 미로처럼 복잡했지만, 냄새를 따라가니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약향의 근원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멈춰선 곳 앞에는 오래된 기운이 물씬 풍기는 거대한 전각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그리고 전각의 입구에는 옛스러운 느낌이 잔뜩 묻어나는 글씨체로 쓰여진 ‘비약전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아쉽게도 이준 일행이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전각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 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가니 전각의 1층은 이미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연금비약을 찾으러 온 자들이 서로 싸움을 벌인 흔적임이 분명했다.
1층에서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이준은 곧바로 전각 안쪽의 계단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