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용황 열매
보람이 가리키는 곳에는 수풀만이 무성할 뿐,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은 보람이 이유 없이 그런 행동을 보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신비한 능력은 자신의 영혼 탐지 능력으로도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거야?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아라가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아쉽잖아.”
이준이 숲 속 깊은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보람을 보며 말했다.
이준의 허락을 받은 보람은 신나게 웃으며 숲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이준 일행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숲 속으로 진입했다.
숲속으로 들어서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강한 마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보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의 기운에 겁을 집어먹은 탓에 어떠한 마수도 이준 일행을 덮치지는 못 했다.
그렇게 십 분 정도를 달려 숲 속 깊은 곳으로 들어섰을 때, 아라가 입을 열었다.
“주위에서 느껴지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어.”
그녀의 말에 이준 역시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강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걱정 마. 우린 이미 숲 중심에 도착했어.”
보람이 앞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범한 초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볍게 손을 뻗자, 텅 빈 허공이 일렁이며 금빛 장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야?”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금빛 장막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마수의 영혼장막이야. 생전에 아주 강력했던 마수가 죽은 곳에만 생겨나지.”
보람이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표정으로 장막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마도 이 장막의 주인 역시 용족의 일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우리 일족의 기운 외에도 봉황 마수의 기운이 느껴져.”
그녀의 말에 이준 일행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이 곳에서 용족과 봉황족의 강자가 서로 싸움을 벌이다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열어보면 알겠죠.”
영진의 말에 보람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마수의 장막 위에 기이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막이 빠르게 흔들리더니 금빛 장막에 균열이 생겨났다.
“가자.”
장막을 제거한 보람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이준 일행 역시 그 뒤를 따라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 * *
장막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환해지더니 그들 앞에 황량한 평원이 나타났다.
평원의 토양은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붉었고, 곳곳에 석회 같은 물질로 만들어 진 새하얀 반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원의 중심에는 백 미터도 넘는 거대한 돌 제단이 위치해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투존 강자라 해도 압박감을 느낄만한 수준의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엄청난걸…….”
이준 일행을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거대한 제단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보람은 망설임 없이 제단을 향해 날아갔고, 이준 일행 역시 그녀의 뒤를 쫓아 제단으로 날아갔다.
제단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 안에서 흘러 나오는 은은한 향기에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제단의 중심에는 기다란 청색 계단이 놓여 있었다. 보람은 그 계단의 끝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느꼈다.
“후…….”
보람은 긴장된 얼굴로 빠르게 계단을 올라 제단의 끝에 도착했다.
제단 중앙에는 금색과 자주색이 섞인 석대가 있었다. 그 석대는 홈이 깊게 파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작은 묘목이 둥지를 튼 것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끝에는 자그마한 열매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열매의 절반은 금색으로 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절반은 자주색으로 되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금색부분에는 포효하는 용의 형상, 자주색 부분에는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봉황의 형상이 그러져 있었다.
용과 봉황이 그려진 열매라니. 약재에 대한 지식이라면 자신이 있는 이준이었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열매였다.
“설마 이 열매가 너를 부른거야?”
이준의 질문에 보람은 홀린 듯이 그 열매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용적의 고적에서만 볼 수 있는 용황의 열매야. 그리고 여기 그려진 봉황은 지금 봉황족의 선조격인 상고시대의 봉황이지. 이 열매는 용과 봉황의 생명력을 담고 있는 아주 진귀한 열매야. 우리 일족에서도 수천 년간 고작 다섯 개의 열매 밖에 찾지 못 했을 정도니까.”
초점 잃은 눈으로 용황 열매를 바라보던 보람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제단 아래 펼쳐진 광활한 대지를 바라봤다. 그 순간, 그녀는 적홍색 땅에 있던 하얀 물체들이 용과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 대지 위에 점점이 놓인 새하얀 돌들은 고리 모양으로 평원을 둘러싸고 있었고, 제단은 그 새하얀 돌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평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이준 일행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 곳이 용과 봉황의 무덤인거야?”
이준이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용과 봉황은 서로 상극이니까, 싸움을 벌이다 둘 모두 죽은 거겠지. 마수의 장막에서 용의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졌던 건 둘 중 용의 힘이 더 강했기 때문일 테고.”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용황 열매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 역시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용황 열매는 반드시 갖고 나가야 해. 봉황족에게 뺏긴다면 용족에게 위협이 될 테니까.”
보람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준 역시 그녀와 생각이 같았다. 이 열매가 무슨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최강의 마수라고 불리우는 두 마수의 힘이 깃든 열매이니 만큼 봉황족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들의 실력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될 테고, 이는 봉황족과 관계가 좋지 않은 이준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럼 얼른 가지고 나가자.”
하지만 이준과 보람이 막 봉황 열매를 챙기려던 찰나, 허공에서 격렬한 파동이 퍼져나가더니 저 멀리서 강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수의 장막을 뚫고 한 무리의 인영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은데…….”
장막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한 이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장막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봉연과 봉황족의 강자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용황 열매를 발견한 봉연과 백발의 사내는 곧바로 번개처럼 몸을 날려 제단으로 날아왔다.
“이준! 용황 열매를 내놔!”
봉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녀의 뒤에는 풍뢰각의 나정필을 비롯해 고적에 들어오기 전 주둔지에서 만났던 호랑이족과 늑대족의 2성 투존 족장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백발의 사내와 까만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서있었다.
‘투존 다섯…….’
이준은 속으로 조용히 적의 실력을 가늠해보며 저장반지를 문질렀다. 고적에 들어오기 전에 얻은 하늘 요괴 열 마리에 천화존자와 영진, 아라, 자신의 힘을 합치면 투존 다섯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계집년, 뺏어가고 싶다면 날 먼저 쓰러뜨려야 할 거다!”
봉연 일행이 제단으로 다가오자, 영진의 몸이 빠르게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10미터는 족히 되는 거인으로 변했다.
“용웅이었구나. 용족의 피가 조금 섞였다고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군!”
백발의 사내가 본 모습을 드러낸 영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진에 이어 아라와 천화존자가 제단 위로 날아오르며 3성 투존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허, 우리 쪽에 투존이 없다고 생각하는 겐가?”
이준 측에서 두 명의 투존이 나오자, 나정필을 필두로 호랑이족과 늑대족의 족장이 염력을 폭발시키며 그 앞을 막아섰다.
바로 그 때, 아라와 천화존자의 등 뒤로 황금색의 요괴 하나와 십여 개의 은빛 요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한 개의 요괴가 내뿜어내는 휘황찬란한 광채는 보고만 있어도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열한 마리의 요괴가 나타나는 순간 나정필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고적을 지키던 요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다니, 그에게는 이준의 모든 행동이 한없이 얄밉게만 느껴졌다.
요괴를 내보낸 이준은 곧바로 자갈색 화염을 뿜어내며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준의 모습을 본 봉연의 표정은 실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사대각 대회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었건만, 이준은 불과 몇 년만에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수준까지 성장해 있었다.
“이번 일은 황헌 장로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겠군요.”
뜨거운 화염을 뿜어내는 이준을 바라보던 백발의 사내가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던 검은 옷의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단 위로 시선을 옮겼다.
“허허, 하늘이 주신 기회구려. 전설 속의 보물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말을 마친 노인이 걸음을 내딛자, 그의 몸에서 5성 투존의 염력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 물러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네. 순순히 물러나게.”
노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제단 위에 울려 퍼지는 순간, 이준 일행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어찌하면 좋겠나?”
천화존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미 혼령 열매를 손에 넣은 상황에서 굳이 5성 투존을 상대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결정권자는 이준이었으니 그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봉황족에게 용황 열매를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5성 투존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저희 쪽이 더 강한 것 같으니 한 번 해보죠.”
“허허……. 건방진 젊은이로군. 내 경고를 무시했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되어있겠지?”
이준의 말을 듣고 있던 황헌이 싸늘하게 웃으며 손을 휘두르자, 섬뜩한 살기가 온 하늘을 뒤덮었다.
황헌이 앞으로 나서는 순간, 나정필을 비롯한 다른 투존들의 얼굴에도 살기가 어렸다.
“저 노인은 요괴들에게 맡겨야겠어.”
이준의 두 눈에도 한기가 가득해졌다. 상대방 중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바로 저 황헌이라는 노인이었으니, 요괴들에게 그를 상대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이준이 재빠르게 손으로 인결을 그리자 허공에 떠있던 요괴들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대전 밖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원형의 진영을 이루기 시작했다.
“허!”
이준의 기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진영의 중심에서 번쩍이는 빛이 터져 나와 요괴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격하게.”
말없이 이 광경을 바라보던 황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에 나정필을 비롯한 봉연측의 강자들은 곧바로 허공을 가르며 제단을 향해 날아갔다.
“어딜 가느냐!”
그 순간, 영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제단으로 향하는 세 투존의 앞을 막아섰다.
“허, 용웅의 힘은 산을 가를 정도라고 하던데, 어디 정말 그런지 보자!”
영진이 자신들의 앞을 막자, 호랑이족 족장의 몸이 호랑이의 형상으로 변화하더니 유성처럼 빠르게 영진을 향해 돌진했다.
쾅!
두 마수는 곧바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서로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나정필은 나에게 맡겨.”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아라가 회색 안개를 내뿜으며 나정필에게로 날아갔다.
“늑대족 장로는 나에게 맡기고 자네는 봉황 일족의 강자들을 상대하게.”
영진과 아라의 상대가 정해지자, 천화존자 역시 자신의 상대를 정해 전투를 시작했다.
“연아, 천지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느냐?”
그 때, 흑색 의복의 노인이 천지를 둘러보며 봉연에게 물었다. 이에 봉연은 주위를 살펴보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 걱정 마시고 저에게 맡겨주세요.”
“그래. 용황 열매를 무사히 가져갈 수 있는지는 너에게 달렸다.”
말을 마친 황헌은 곧바로 거대한 봉황처럼 날아오르며 사방으로 피처럼 붉은 염력을 흩뿌렸고, 요괴들의 몸에서도 더욱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요괴 따위로 감히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금빛을 내뿜는 이준의 요괴를 필두로 줄줄이 달려드는 요괴들의 모습에 노인은 코웃음을 치며 주먹을 내뿜었다.
쾅!
곧이어 5성 투존과 이준의 하늘 요괴가 맞부딪히며 거대한 충격파가 하늘 가득 퍼져 나갔다.
하늘 요괴가 가진 상상 이상의 힘에 5성 투존인 황헌마저 놀란 듯 눈을 크게 치켜뜨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