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화. 혼령나무
순식간에 침입자를 처리한 요괴들은 빠르게 주먹을 거두고 다시 은빛 요괴로 변해 자리를 지켰다.
투존 강자를 단숨에 날려 보내는 하늘 요괴의 실력에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낯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한편, 이준은 마치 비술을 사용한 것처럼 순식간에 실력이 올라가는 요괴의 모습을 보고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다. 자신의 요괴도 저런 비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5성 투존을 만나더라도 두려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어줘.”
이준은 아라에게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몸을 날려 앞에 있는 사람들을 제치고 석문과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아무도 나서지 않겠다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예요!”
이준이 나서는 것을 본 봉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에 백발의 남자는 말없이 피식 웃음을 짓더니 이준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하늘 요괴를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이준은 요괴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준이 노리는 것은 요괴들을 부수고 고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을 지키고 있는 요괴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요괴의 몸에는 제조자의 영혼의 각인이 새겨져있으며, 그 각인을 없애고 자신의 영혼의 힘으로 새로운 각인을 새겨 넣는다면 요괴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각인이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는 요괴를 만든 사람만이 알고 있었으니,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허! 역시 요괴를 조종하려는 속셈이었군!”
이준의 몸에서 영혼의 힘이 확산되자, 백발의 남자는 곧바로 하늘 요괴를 향해 몸을 날려 전력으로 주먹을 날렸다. 이준에게 하늘 요괴를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이 자리에서 모조리 부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사내가 주먹을 날리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져 나오며 귀를 찌르는 바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자식, 너도 요괴를 가지고 있었구나!”
백발의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금색 요괴를 제외한 나머지 열 마리의 은빛 요괴가 모두 이준의 저장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영혼의 각인이 약해진 것인지, 투성 강자가 요괴들에게 각인을 제대로 걸어두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괴를 손에 넣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 쉬워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넋이 나간 채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2, 3분 만에 투종 최고급 하늘요괴 열 마리를 손에 넣었으니 배가 아픈 것이 당연했다.
특히 나정필, 빙존자 등 이준과 원한이 있는 사람들은 유달리 표정이 좋지 않았다.
끼익-.
잠시 후, 굳게 닫혀있던 두꺼운 철문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벌어진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섬뜩한 기운에 자리에 있던 강자들은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 요괴를 손에 넣은 이준은 이미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요괴만 손에 넣고 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 이준의 모습에 자리에 있던 강자들은 더욱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대문이 완전히 활짝 열렸지만,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잠시 후, 함정을 간파한 강자들이 하나 둘 용암 호수의 수면을 뚫고 아래로 내려와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안이 사람으로 가득차기 시작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이번에는 어떤 비명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자.”
특별한 함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아라와 일행들을 이끌고 그 문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지나자, 또 다시 거대한 대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 안에는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통로가 있었고, 대전 안에 들어선 강자들은 저마다 그 길들 중 하나를 선택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보람아, 뭐 좀 알겠어?”
이준이 끝도 없이 늘어서있는 수십 개의 통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대전 안에도 틀림없이 함정이 가득할 테니,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저쪽에서 약재 냄새가 나.”
보람이 코를 킁킁 거리며 말했다.
“가보자.”
“응.”
이준의 말에 보람은 고개를 끄덕인 뒤 대전 왼쪽에 있는 한 통로를 선택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 양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방들이 있었는데, 이준이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그 안에서 2격 무투기와 수련법을 손에 넣은 몇몇 강자들이 입이 귀에 걸린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 일행의 목적은 오로지 혼령 열매 하나였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계속해서 보람의 뒤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보람이 멈춰선 곳에는 석문이 하나 있었는데, 석문 위에 가득한 이끼에서 오랜 세월이 느껴졌다.
“여기서 약재 냄새가 나.”
보람이 그 석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준은 그 석문을 천천히 훑어보며 함정이 없는지 확인해보고는 조심스럽게 석문을 열었다.
쿠구궁!
이끼가 가득한 석문이 서서히 열리자, 코를 찌르는 짙은 약향이 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약향을 맡은 이준은 눈을 번쩍이며 문을 있는 힘껏 열어젖혔다.
석문 뒤에 감춰져 있던 것은 밀실이 아니라 희귀한 약재가 가득한 숲 이었다.
“와……. 만약산맥은 발끝도 못 따라가겠는데.”
문 뒤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영진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
이준은 누군가 이 방의 존재를 알아차릴까 싶어 황급히 문을 닫은 뒤 눈앞에 펼쳐진 널따란 숲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보람은 이미 숲 안으로 뛰어들어 버섯처럼 생긴 약재를 입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이준은 이곳에 있는 약재들을 모두 저장반지 안에 쓸어 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러 참으며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먼저 혼령열매를 찾아야 해!”
* * *
기이한 향으로 덮인 숲 속은 가끔씩 작은 마수들이 튀어나올 뿐,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준은 거대한 숲 곳곳에서 느껴지는 마수들의 흉악한 기운에 이곳이 결코 만만치 않은 곳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마수들의 기운이 느껴져. 조심해야 해.”
커다란 나무 위에 착지한 이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칫, 마수가 뭐라고. 걱정 마. 내가 있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보람은 입술을 삐죽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거침없이 숲속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갑시다. 여기선 보람을 따르는 게 좀 더 안전해요.”
말을 마친 이준은 씩 웃으며 그녀의 뒤를 빠르게 따라갔다.
* * *
이준 일행은 제법 빠른 속도로 한참을 날아갔지만, 거대한 숲은 여전히 그 끝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과연 투성 강자가 만든 공간은 무언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방대한 넓이였다.
몇 번씩 커다란 마수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보람과 마주치는 순간 어떠한 마수들도 그들의 앞을 막지 못 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던 이준이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북쪽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멈춰섰다.
“왜 그래?”
아라가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왔어. 꽤 많은데…….”
“저기! 저기야!”
그 순간, 보람이 황급히 어딘가를 가리키며 이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확실해?”
이준의 심장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응, 확실해.”
보람은 고개를 끄덕인 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숲 속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십 분 정도 거침없이 달려가던 보람은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더니 그 앞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보람의 뒤를 따라 내려온 이준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이준의 눈앞에 놓인 것은 바로 십 미터 크기의 호수였다.
신비한 옥색으로 반짝이는 맑은 호수의 중심부에는 기묘하게 생긴 작은 나무가 놓여 있는 작은 섬이 하나 있었다.
탁한 은색을 띠고 있는 작은 나무는 모든 나뭇가지들을 넝쿨처럼 뻗어 금빛 열매 하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정말 혼령열매야.”
기괴한 나무를 발견하는 순간 이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찾았으면 얼른 움직여야지, 왜 가만히 있습니까! 헤헤.”
“잠깐, 마수가 있을지도 몰라. 진짜 혼령열매라면 주위에 지키고 있는 마수가 있을테니까.”
보람이 영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녀가 작은 주먹으로 호수 위를 강하게 내려치자. 고요한 호수 위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나더니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 상어라니. 외부 세계에서는 이미 모습을 감춘 지 오랜데…….”
보람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하듯 말했다.
거대한 상어처럼 생긴 마수의 비늘은 청색을 띠고 있었으며, 정수리에는 검은 뿔이 달려있었다. 놈의 얼굴에 달린 날카로운 검은 뿔에서는 기이한 푸른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준이 아는 바에 따르면, 하늘 상어 역시 몸속에 용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상고 시대의 마수 중 하나였다.
“여기서 하늘 상어를 볼 줄이야…….”
하지만 보람은 상고시대의 마수를 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맡을게.”
7레벨 최고급 마수는 투존 강자에 가까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물론 현재 이준 일행의 전력이라면 하늘 상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보람이 있으니 불필요하게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말을 마친 보람이 호수 위로 걸어가자,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보라색 빛이 용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크기는 작았지만, 틀림없이 모든 마수들의 정점에 선 존재인 용의 모습이었다.
곧이어 보람은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 천천히 하늘 상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늘 상어는 몹시 아쉬운 듯 서글픈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보람에게서 느껴지는 용의 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으음. 이 녀석에게 뭐라도 주고 갈까? 너무 불쌍한데…….”
하늘 상어의 표정에 마음이 약해진 보람이 이준을 보며 물었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보람 곁으로 날아온 뒤 하늘 상어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혼령열매가 꼭 필요해서 그러니 선배님께서 조금만 양해해 주십시오. 대신 마수에게 좋은 연금비약 두 개와 마수의 풀잎을 드리겠습니다.”
마수의 풀잎이라는 말에 하늘상어는 눈을 번뜩이며 격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준이 웃으며 연금비약과 옥함을 내밀자, 하늘 상어는 커다란 입을 쩍 벌려 그것들은 집어삼킨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호수로 돌아갔다.
평화로운 방식으로 열매를 지키고 있던 마수를 해결한 이준은 신이 나서 혼령 나무가 서있는 작은 섬으로 날아갔다.
혼령 나무는 자신의 나뭇가지들을 이용해 마치 아이를 품은 어머니마냥 두 개의 열매를 감싸고 있었고, 그 열매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신비로운 향기가 은은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서 가지고 나가자.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보니 사람들이 곧 몰려올 것 같아.”
이준의 뒤를 따라 섬으로 날아온 아라가 말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혼령나무의 나뭇가지를 잘라 목함을 만들었다. 혼령열매를 보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혼령나무로 만들어진 목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목함을 완성한 이준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 안에 혼령열매를 담아 자신의 저장 반지 속에 넣었다.
“이제 됐어. 가자.”
하지만 혼령열매를 챙긴 이준이 자리를 뜨려는 찰나, 보람이 돌연 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숲속 깊은 곳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왜 그래?”
“저기서…… 무언가 날 부르고 있어.”
보람이 초점없는 흐릿한 눈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