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화. 또 다른 통로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욱 큰 문제는 그들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누구 하나 지난날의 원한을 잊지 않은 듯 살기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미쳐버리겠군. 빙하곡주에 현명종주, 풍뢰각에 봉황 마수까지…….”
그들을 바라보는 이준의 표정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준?”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누군가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이준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 들렸다.
“당화연?”
이준을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바로 불의 협곡의 후계자인 당화연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불의 협곡의 곡주인 당진도 이곳에 있다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곁에는 당진이 서있었다.
“허허, 이준 선생. 아주 오랜만이구려. 그간 잘 지내셨소?”
당진이 불의 협곡 강자들을 이끌고 이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당 곡주님.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되는군요.”
자신에게 호의적인 세력의 등장에 이준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불의 협곡은 중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세력이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도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게 이준의 생각이었다.
“2년 남짓한 사이 연금대회 우승자가 된 것으로도 모자라 투존이 되다니, 정말 놀랍소.”
당진의 칭찬에 이준은 민망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운이 따랐습니다. 그보다 곡주님께서도 고적에 들어가려고 오신 것 입니까?”
“허허, 투성 강자가 남긴 고적인데, 당연히 와봐야 하지 않겠소?”
빙긋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당진은 이준을 바라보는 살기등등한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준 선생,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시오?”
“네……. 염치없지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 답례는 절대 부족하지 않게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하시오. 내 딸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지요. 게다가 이준 선생 정도의 실력자라면 저희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정말 감사합니다 곡주님.”
사실 당진이 이준을 선뜻 돕겠다고 한 것은 꼭 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서른도 되기 전에 투존이 된 연금탑의 연금술 경연대회 우승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고적에서 보물을 얻는 것 이상으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준도 바보가 아니니 그런 당진의 속내를 어느 정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불의 협곡과 손을 잡지 않고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겠는가?
게다가 당진은 상당히 신의가 있는 인물이었다. 일이 끝나고 고적 안에서 얻은 것들을 나눈다 하더라도 억지를 부릴 일은 없을 것이고, 안에서 자신을 배신할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고 할 수 있었으니 거래의 상대로 이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쿵…….
서로의 속내를 읽은 당진과 이준의 동맹이 성립하는 순간, 조용한 대전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천근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며 새까만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문이 열렸다!”
대문이 열리기 무섭게 주위에 있던 강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통로 안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준과 당진을 비롯해 거대한 세력의 일원들이나 투존 강자들은 누구 하나 섣불리 대문 안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투성 강자의 고적이 이렇게 쉽게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쾅!
아니나 다를까, 이준의 예상대로 사람들이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까만 통로가 붉게 달아오르며 사방에서 파란색 불기둥이 터져 나왔고, 섣불리 통로 안에 발을 디딘 사람들이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막 통로 안으로 들어가려던 사람도 깜짝 놀라 급히 멈춰 섰지만, 뒤에서 돌진하던 사람들이 그들을 떠밀며 대전 바깥에서는 한바탕 큰 소란이 일었다.
“허, 이깟 불길로 우릴 막겠다고?”
그 때, 몇 몇 투존 강자들이 코웃음을 치며 염력으로 몸을 보호한 채 불길을 뚫고 대전 안으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허허, 이준 선생, 선생에게는 천지의 불꽃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이준의 곁에서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당진이 구룡불꽃을 소환해 불의 협곡의 강자들을 감싸며 말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준 역시 웃으며 삼천불꽃을 소환해 자신의 일행들을 보호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이준 선생, 불꽃이…….”
이준의 삼천불꽃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구룡불꽃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 당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준비를 끝마친 이준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당진을 뒤로 한 채 곧바로 통로 안으로 몸을 날렸다.
불길 속으로 들어서자 주위의 온도가 미친 듯이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불기둥을 뚫고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돌연 돌바닥이 사라지고 시뻘건 용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끔찍한 열기를 내뿜는 용암호수는 끊임없이 폭발을 일으키며 거대한 불기둥을 토해냈고, 통로의 초입에 있던 불꽃을 어렵지 않게 뚫고 들어온 강자들 중 상당수가 그 불기둥에 맞아 뼈조차 남기지 못하고 타죽고 말았다.
그러나 삼천불꽃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준 일행에게는 용암호수의 불기둥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자갈색 화염에 둘러싸인 이준 일행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폭음과 사람들의 비명을 뒤로한 채 빠른 속도로 대전의 더욱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저 앞에 가는 자는 빙하곡 사람들이 아니더냐?”
그렇게 몇 분 정도를 더 날아갔을 때, 천화존자가 앞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따라 눈을 치켜들고 앞을 바라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아주 익숙한 하얀색 얼음 안개가 보였다. 빙하곡 특유의 얼음 염력이었다.
“허!”
이준의 시선을 느낌 빙존자는 속도를 올려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겁쟁이 놈들, 우리가 무서워서 저렇게 빨리 도망가는 건가?”
영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요. 이 불길에서 계속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얼른 여기를 빠져 나가야겠어요.”
이준이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파란색 화염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빙하곡의 사람들이 속도를 높인 것은 뒤에 있는 자신이 두려워서가 아닌 것 같았다.
삼천불꽃에 둘러싸인 자신과 달리 평범한 염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다른 강자들의 모습을 보면 이곳의 불꽃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암호수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이 아닌 다른 에너지와 접촉하면 마치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되는 이유나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위험한 불꽃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빙하곡주의 표정이나 태도는 결코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빨리 달아난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진짜 왜 이렇게 긴 거야. 거의 다 온 거 맞습니까?”
빙하곡의 강자들이 사라진 뒤 한참을 더 날아가도 도통 끝이 보이지 않자, 참다못한 영진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이준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급히 멈춰서며 말했다.
“이 길은 함정이야. 틀림없어.”
“이 길이 아니면 진짜 길은 어디 있는 건데?”
아라가 양쪽에 길게 늘어선 적홍색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단한 적홍색 암석으로 만들어진 이 벽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투성 강자가 만든 고적이라면 분명 평범한 벽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벽을 뚫고 강제로 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다 갑자기 바닥에 깔려있는 용암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맞아. 확실해. 빙하곡 놈들이 우리를 피한건 우리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진짜 통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고적의 주인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면 용암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겠나.”
천화존자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선생님, 가람 아카데미에 봉인되어 있던 구름 불꽃도 용암 호수 아래에 있었는걸요. 절 믿어보세요.”
말을 마친 이준은 다른 사람들의 답을 듣기도 전에 곧바로 새빨간 용암 호수로 몸을 던졌다.
* * *
용암 호수로 뛰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 일행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이준의 예상대로 정말 용암 호수 아래에 길이 있었던 것이다!
바닥에 도착해 위를 올려다보니 용암 호수위로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용암 호수의 수심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얕았던 것이다.
“이거 빙하곡주에게 감사인사라도 해야겠는걸.”
이준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용암 호수의 아래쪽은 전혀 뜨겁지 않았고,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잘 닦인 돌길이 깔려 있었다.
“가자. 이곳이 분명 진짜 고적으로 들어가는 길일 거야. 혼령열매를 찾는 일은 보람이 너에게 맡길게.”
“헤헤, 별 일 아니네. 나한테 맡겨.”
이준의 말에 짜증이 가득했던 보람의 얼굴에도 모처럼 웃음이 돌아왔다. 약재 찾기라면 그녀의 가장 큰 특기이자 취미였다.
반듯하게 깔린 돌길을 따라 몇 분 정도를 날아가자, 거대한 광장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광장 위에는 봉연을 비롯한 풍뢰각의 강자들과 백발의 사내, 그리고 빙하곡의 강자들이 서있었다.
이준을 발견한 빙존자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설마하니 이준이 이렇게 빨리 함정을 간파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빙존의 그런 반응에 이준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짓고는 천천히 광장을 둘러보았다.
광장의 끄트머리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전이나 용암호수보다 더 놀라운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광장의 끝에는 신비한 은빛을 뿜어내는 익숙한 모양의 그림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하늘요괴’였다. 온통 은빛으로 뒤덮인 석문 밖 요괴들의 실력은 투종 최고급 정도 수준이었다.
“저 석문 뒤가 진짜 고적인가보네.”
아라가 두껍고 단단한 석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석문에서 느껴지는 파동으로 봤을 때 강제로 열 수는 없는 것 같아. 저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저 요괴들한테 있고.”
이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인지 말없이 요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우선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구나. 먼저 나서서 좋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천화존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함께 광장 구석으로 피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를 수 분, 결국 1성 투존 강자로 보이는 노인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끼익!
노인이 석문 앞으로 다가가자,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있던 요괴들의 초점 잃은 눈빛이 그대로 노인을 향했다.
쾅!
다음 순간, 강렬한 은빛이 번쩍이면서 열 마리의 은빛 요괴가 동시에 노인을 덮쳤다.
노인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주먹을 휘둘렀고, 순식간에 세 마리의 하늘 요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내려앉기도 전에 요괴들이 원형으로 모여들어 진을 갖추자, 기이한 파동이 일기 시작하더니 놈들의 몸이 은색에서 금색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요괴들은 순식간에 최고급 요괴로 변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황금색으로 변한 요괴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노인의 얼굴을 강타했고, 노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