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616화 (616/818)

616화. 고적

풍뢰각을 쫓아낸 이준 일행은 막사를 세운 뒤 은인자중하며 고적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3일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성운각에 의해 쫓겨난 풍뢰각은 물론이고 그 어느 세력도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며 조용히 고적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 사이 산맥에서 느껴지던 공간의 힘은 눈에 띄게 옅어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고적을 지키고 있던 공간 결계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결계가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산맥에는 폭풍전야 같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 뒤, 마침내 결계가 사라지고 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서늘한 밤. 차가운 달빛이 하늘에서 내려와 등불이 환한 산맥을 밝게 비추면서 거대한 산맥 위에 부드러운 비단옷이 입혀졌다.

이준은 산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에 앉아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 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쉭!

그 때,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이준의 날카로운 귀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곧이어 허공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번개처럼 내려와 성운각의 막사를 부수기 시작했다.

“누구냐!”

이준은 곧바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림자를 향해 돌진했다.

검은 그림자는 여자처럼 가녀린 체구를 가지고 있었고, 얼굴에는 섬뜩한 느낌을 주는 귀신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귀신 탈을 뒤집어 쓴 괴한은 이준을 무시한 채 더욱 빠른 속도로 보람을 향해 날아갔다.

보람을 향해 날아가던 괴한의 눈에서 기이한 녹색 빛이 번쩍이자, 돌연 보람은 눈앞이 흐려지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정신이 흐릿해지는 순간 보람의 몸에서 자색 섬광이 터져 나와 그녀를 감쌌고, 기이한 녹색 빛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헉! 왜 뱀이 아니지?”

어느새 용의 형상으로 변화한 신비한 보라색 빛에 괴한은 화들짝 놀라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 순간, 주변에 있던 세 개의 천막에서 세 명의 투존이 뛰쳐나왔다.

“보람을 지켜!”

이준은 세 사람을 향해 지시를 내린 뒤 자갈색 화염을 손에 모아 괴한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번개처럼 자신을 덮쳐오는 화염에 괴한은 황급히 이준의 손을 막아낸 뒤 산봉우리 밖으로 부리나케 달아나갔다.

“어딜 도망 가!”

이준은 더욱 속도를 높여 다시 한 번 괴한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질렀다.

하지만 이준의 주먹이 막 괴한에게 닿으려는 찰나, 신비한 녹색 빛이 다시 한 번 번쩍이더니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이준의 공격을 막아냈다.

쾅!

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강한 바람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이준과 그림자의 몸이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이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괴한과 그림자 모두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이준은 검은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직접 싸우지 않아 상대방의 실력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 이상한 녹색 빛에서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네. 왜 보람을 공격한 거지?”

이준이 의문에 빠져있을 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 네 개가 산봉우리 위로 날아왔다.

“여기에 그 녀석 기운이 남아있는데, 이 자를 데려가 심문해야하지 않겠소?”

험악하게 생긴 중년의 사내 하나가 코를 킁킁 거리며 이준을 노려보고 말했다.

네 사람 중 셋은 투종 최고 수준의 강자였고, 가장 앞에 있는 자는 투존이었다.

‘지옥 이무기족?’

자신의 앞에 서있는 사내의 눈이 메두사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을 발견한 이준은 그들이 말로만 듣던 지옥 이무기족임을 직감했다.

“냄새가 산속으로 향하는 걸 보니 이 사람과 붙었던 모양이군.”

선두에 있던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이준을 훑어보며 말했다.

“쫓아라!”

말을 마친 노인은 이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곧바로 숲속으로 날아갔고, 그 뒤를 따라 나머지 세 명의 강자들도 자취를 감췄다.

‘뭐야 이것들은…….’

제 멋대로 떠들고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에 이준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쓴 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그 자가 바로 지옥 이무기족을 습격하고 다닌다는 그 강자 같은데, 왜 보람을 습격한 거지?’

이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막사 안에 있던 성운각의 사람들이 하나 둘 달려 나왔다.

이준이 바닥으로 내려와 조금 전 일을 설명하며 방금 전의 괴한이 바로 그 의문의 강자인 것 같다고 말하자,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 녀석 지옥 이무기족만 노리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보람을 공격한거야?”

이준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글쎄, 지옥 이무기랑 비슷한 냄새라도 나는 거 아닐까?”

“쳇, 내 몸에선 그런 냄새 안나 이 멍청아!”

이준의 농담에 보람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며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 그 녹색 빛을 보는 순간 홀린 것처럼 정신이 나갔어. 다른 마수들이었으면 틀림없이 정신을 지배 당했을 거야.”

그녀의 말에 이준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족인 보람의 정신을 지배할 정도의 능력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으음, 이상하구나. 그렇게 괴이한 능력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천화존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길, 또 내 눈에 띄면 머리를 아주 박살을 내버리겠어. 작은 아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절대로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영진이 잔뜩 화가 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잠시 후,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분간 보람이 너는 내 옆에 꼭 붙어 다녀. 어쩌면 실종된 지옥 이무기들도 모두 그 이상한 능력에 홀려서 끌려간 것일지도 모르겠어.”

“말도 안 돼. 투존 강자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무투기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아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이준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보람의 말도 있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주 티끌만큼의 위험이라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일단 고적이 열릴 때까지는 그 어떤 불상사도 벌어져선 안 돼. 그리고 고적이 열리면 반드시 우리가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해.”

* * *

그 날 밤 일어났던 사건 이후로 주둔지에는 더 이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틀 뒤, 하늘에서 아침햇살이 내리쬐며 산맥을 뒤덮은 어둠이 서서히 사라질 무렵, 엄청난 인파가 메뚜기 떼처럼 산맥 중심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고적이 열린 것이다.

이준 일행 역시 산꼭대기 위에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다가 이준을 비롯한 몇 사람이 선발대로 들어가고, 성운각의 제자들과 장로들은 주둔지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가자.”

더 이상 지체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이준은 재빠르게 산맥의 중심으로 날아갔고, 아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산맥의 중심부로 향했다.

* * *

이준이 있던 산봉우리는 산맥의 중심과 가까웠기 때문에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아 공간 결계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적이 위치한 곳은 산맥의 중앙에 있는 분지로, 반경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범위에 온통 새하얀 해골들이 깔려 있어 보기만 해도 온 몸의 털이 거꾸로 곤두서는 것 같았다.

고적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살피던 이준의 눈에 무려 다섯이나 되는 3성 투존의 모습이 보였다.

‘1격 무투기라는 게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네. 투존이 다섯이나…….’

펑!

그 때, 하늘에서 미세한 파열음이 일더니 분지의 중심부에 거대한 공간의 균열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미세하게 들려오던 파열음이 어느새 천둥소리처럼 커져 있었고, 공간의 균열 역시 갈수록 커져 이제는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까지 자라나 있었다.

쾅!

잠시 후, 거대한 굉음이 폭발하며 공간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마침내 고적이 열린 것이다.

“어서 피해!”

그러나 이준은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는 커녕 보람을 붙잡고 황급히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준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 역시 무언가를 느꼈는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곧이어 공간이 무너진 곳에서부터 투존 강자도 혼비백산 할만큼 강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무시무시한 폭발에 앞쪽에서 고적을 향해 나아가던 수천의 강자들이 처참하게 으깨지며 삽시간에 시체의 산이 생겨났다.

이준 일행은 바닥에 늘어서있던 수십만 개의 백골들이 왜 생겨났는지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분지 위에 모래처럼 깔려있던 백골들은 새로이 생겨난 시체들이 흘린 피로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가자…….”

잠시 멍하니 시체들을 바라보던 이준은 정신을 차리고 고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죽은 사람들이 안타깝기야 했지만, 한시가 아까운 상황에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새빨갛게 변한 백골 위를 지나 분지의 중심부로 몇 분 정도를 더 날아가자, 안개로 뒤덮인 거대한 대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대전은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섬뜩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대전의 크기였다.

피처럼 선명한 붉은 색을 띤 대전은 구름 위를 뚫고 올라갈 것처럼 거대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공간봉인으로 이렇게 거대한 대전을 덮어둔 거였다니. 어디서 봐도 눈에 띄겠어.”

적홍색 대전을 바라보던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큰 대전을 만들어 낸 것도 대단하지만, 이만한 크기의 대전을 수천 년간 공간 결계로 숨겨둘 수 있다니, 투성 강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적홍색 대전 밖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 안으로 발을 들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마 조금 전의 폭발이 그들에게 적잖은 공포감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이준 역시 함부로 대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대전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진 곳을 바라보니, 화려한 의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봉연?”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이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와 이준 사이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기억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봉연의 주위에는 풍뢰각의 강자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서 있었다.

하지만 봉연과 풍뢰각의 강자들보다 더 이준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봉연의 곁에 서있는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백발의 사내였다.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이준은 그 자가 만만치 않은 강자임을 직감했다.

“연아, 저 사람이 네가 말한 고대 봉황의 피를 가진 자야?”

백발의 사내가 이준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응. 근데 몇 년 안 본 사이에 투존이 되어있을 줄은 몰랐네.”

봉연이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며 말했다.

“하하, 너도 가문의 힘을 물려받으면 투존이 될 수 있어.”

백색 옷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저 자는 나에게 맡겨. 옛 봉황의 피를 가지고 있는지는 데려가 보면 알지. 이미 피를 다 마셨다 해도 그의 혈액에서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사내의 말에 봉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이미 투존이 되었다 해도 자신의 곁에 있는 사내보다 강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살기 어린 시선을 느낀 이준은 괜한 시비라도 붙을까 싶어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대전 앞에 늘어선 강자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순간, 이준의 입에서 또 다시 긴 탄식이 새어나왔다.

“풍뢰각, 봉황족, 빙하곡, 현명종……. 망했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