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화. 공간봉인
쾅!
굉음과 함께 비천의 몸이 막사 위로 날아가자, 거대한 막사가 산산조각나며 희뿌연 먼지가 사방으로 솟아올랐다.
“감히 어떤 놈이 풍뢰각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막사가 무너지기 무섭게 나정필이 막사에서 튀어나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곁에는 처음 보는 복식을 한 두 명의 노인이 서있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미루어 보아, 인간이 아닌 마수인 것 같았다.
“쿨럭…….”
그 때 비천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피를 토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에게 쫓겨 쥐새끼처럼 도망치던 그 애송이가 어떻게 몇 년 사이에 투존 강자가 된 것인지,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준? 풍존의 얼굴을 봐서 놓아주었더니 죽고 싶어서 이 곳까지 찾아온 것이냐?”
이준의 얼굴을 알아본 나정필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 역시 과거 사대각 대회에서 이준이 풍뢰각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이준의 실력은 고작 막 투종이 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몇 년 사이에 일격에 비천을 제압할 정도의 실력을 가질 수 잇단 말인가?
“글쎄요. 그런 말은 죽일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할 말이죠.”
이준의 당돌한 태도에 나정필의 눈에 곧바로 살기가 돌았다.
“실력이 좀 생겼다고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 때는 풍존의 얼굴을 봐서 봐줬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하하, 풍존 선생님의 얼굴을 봐서 저를 용서해주셨다는 분이 성운각 사람들을 그렇게 대한단 말입니까?”
나정필을 앞에 두고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태도에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에는 어느새 풍뢰각의 주둔지에서 소란을 일어난 것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하하! 투존이 됐다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으냐? 오냐, 이제 막 투존이 된 놈이 뭘 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저는 그저 성운각의 주둔지를 되찾으러 온 것뿐입니다.”
말을 마친 이준이 가볍게 걸음을 옮기자, 그의 몸에서 자갈색 화염이 피어오르며 주위의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오냐! 한 번 해보거라!”
그 순간, 나정필의 몸에서 은빛 번개가 뿜어져 나와 뱀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중주 전체에 이름난 강자인 나정필과 새파랗게 젊은 이준이 금방이라도 맞붙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풍뢰각이 성운각을 쫓아낼 때 성운각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나정필을 상대로 한판 붙으려는 건가?”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은데……. 나정필 곁에 있는 두 노인은 봉황족 아래에 있는 호랑이 마수와 늑대 마수의 족장이야. 둘 모두 2성 최고급 수준의 강자라고.”
“허허, 이보게 젊은이, 뭔가 오해가 있나보군. 비천 각주가 성질이 불같아 성운각과 약간 마찰이 있었던 것 같은데, 비천 각주도 크게 다쳤으니 우리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만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나?”
두 사람이 살기를 풍겨대자, 호피 무늬 의복을 입고 있던 노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인의 말에 나정필은 곧바로 번개를 거두어 들였다.
“족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리해야 하지요. 이번 일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주둔지를 옮겨 주시지요.”
이준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자, 그의 뒤에 있던 성운각 제자들이 양 옆으로 비켜서며 산기슭으로 향하는 길을 터주었다.
이준의 행동에 두 사람을 중재하려던 호랑이 무늬 의복을 입은 노인도 표정이 굳고 말았다.
“자네,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주둔지를 빼앗은 것이 문제의 시작인데 비천이 다쳤다고 물러나라니, 이건 중재가 아니라 설마 저를 바보로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두 노인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설마 자네 이곳이 마수들의 땅이라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호랑이 족의 족장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여기서 떠나면 없던 일로 해주겠네.”
그 순간, 두 사람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폭풍처럼 터져 나와 주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준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산기슭을 가리켰다.
“저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장 이곳을 떠나면 성운각의 장로님을 다치게 한 것은 없던 일로 해드리죠.”
말을 마친 이준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자, 그의 뒤에 서있던 세 투존의 몸에서 해일 같은 염력이 쏟아져 나왔다.
이준과 아라, 천화존자와 영진 네 사람이 동시에 염력을 쏟아내는 순간, 나정필과 풍뢰각 강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당황한 나정필은 떨리는 눈빛으로 이준의 등 뒤에 서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건장한 사내를 제외하고, 예쁘장한 소녀와 그 곁에 있는 노인 모두 3성 최고급 수준의 투존강자였다.
‘말도 안 돼. 성운각에서 남몰래 이런 강자들을 데리고 있었단 말인가.’
나정필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가 알기로 성운각에서는 이렇게 많은 투존들을 데리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사대각 중 그 어떤 세력도 동시에 이렇게 많은 투존 강자를 데리고 있지 못 했다.
마수 의복을 입고 있는 두 노인 역시 그제야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투존 강자 네 명이라면 그들 세력의 강자들을 모두 합쳐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에 조금 전까지 득의양양하던 풍뢰각의 제자들도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젊은이…….”
호랑이족 장로는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듯 입을 들썩거리다가 이준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가자!”
바로 그때, 나정필이 손을 휘두르며 풍뢰각의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이 상태로 성운각과 맞붙는다면 풍뢰각은 고적에 들어가기는커녕 사대각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할 정도의 타격을 입을지도 몰랐다.
결국 나정필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삼키며 이준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고, 풍뢰각의 제자들은 황급히 막사를 정리해 그의 뒤를 쫓아갔다.
“이준, 조만간 다시 보도록 하지.”
이준 곁을 지나던 나정필이 발걸음을 멈추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든지요.”
하지만 이준은 이번에도 피식 웃으며 조롱하듯 그의 말을 맞받아쳤고, 결국 나정필은 얼굴이 새빨개져 씩씩 거리며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풍뢰각의 제자들이 사라지자, 성운각 제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풍존이나 약존도 아니고, 소각주가 풍뢰각의 각주를 찍어 눌렀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기세가 등등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후…….”
줄곧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모청연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준을 힐끗 쳐다보았다.
“먼저 막사를 설치하죠.”
그러나 주위의 뜨거운 반응과 달리 정작 이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음 할 일을 지시할 뿐이었다.
“예!”
이준의 명령에 성운각 제자들은 힘차게 대답한 뒤 빠르게 흩어져 새로운 막사를 짓기 시작했다.
산꼭대기에서 일어난 주둔지 쟁탈전이 막을 내리자, 투존 강자들의 대전을 볼 생각에 잔뜩 기대를 품었던 사람들은 아쉬운 듯 고개를 저으며 돌아갔다.
“이준, 오늘은 풍뢰각이 물러났지만, 분명히 다시 찾아올 거야.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겠어.”
모청연이 조심스럽게 이준에게 주의를 줬다.
“알고 있어.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혼령열매를 뺏길 수는 없어. 필요하다면 난 저들과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야.”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준의 말에 모청연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풍뢰각의 뒤에는 봉황족이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리고 이곳이 마수들의 땅이라는 것도.”
“그렇다고 혼령열매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가급적이면 봉황족과 맞붙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그들이 우리를 공격한다고 해도 나름대로 준비해 놓은 것이 있어.”
말을 마친 이준은 씩 웃으며 산꼭대기 가장자리로 걸어가 산맥의 중심을 가리켰다.
“저기에 공간 장벽이 있는 것 같은데, 저곳이 바로 고적이 있는 곳인가요?”
이준의 질문에 뒤편에 서있던 호 장로가 다가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소각주님, 하지만 저 안에는 고대의 악령들이 있어 투존 강자들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고적들은 모두 공간 결계 안에 숨겨져 있는데, 일정한 시기마다 공간에 균열이 생겨나지요. 그 때가 바로 고적이 발견되는 시기입니다.”
이준은 말없이 호 장로의 설명을 들으며 수풀이 무성한 산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예민한 영혼 탐지 능력에 무언가 꺼림칙한 에너지들이 탐지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영혼의 궁전 놈들이 무슨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그의 말에 호 장로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직 놈들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이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 또 다시 모청연이 의견을 냈다.
“영혼의 궁전도 영혼의 궁전이지만, 지옥 이무기족에 대해서도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아. 이곳은 그들의 본거지이니만큼 봉황족들도 그들을 자극하려 하지 않을 정도니까. 게다가 자신들의 본거지에 고적이 나타났는데 그 사실을 감추기는커녕 보란 듯이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뭔가 수상하고.”
“지옥 이무기라…….”
지옥 이무기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혼령 열매를 얻는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허허,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지금 지옥 이무기족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인 것 같으니 말이다.”
호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뭔가 정보가 있으신가요?”
모청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호장로가 다시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글쎄…….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근 지옥 이무기족의 강자들이 이유없이 실종되고 있다고 하더구나. 심지어 그 실종된 자들 사이에 투존 강자도 끼어있다고 하더군.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 손을 쓰고 있는 것이 어떤 세력이 아니라 단 한명의 강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호 장로의 설명에 이준과 모청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그를 바라봤다.
이준과 모청연이 놀란 기색을 보이자 호 장로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모두 사실입니다. 백골산맥에 찾아온 강자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마수들의 땅에서 지옥 이무기족을 공격하다니. 대체 그런 어마어마한 실력과 배짱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 궁금한 마음이 드는 이준이었다.
“대체 누구일까요? 지옥 이무기 족에게 원한이 있는 자겠죠?”
모청연의 질문에 호 장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게 좀 애매하구나. 원한 때문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죽여댈 텐데, 기이하게도 실력이 약한 자들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니…….”
마수들의 땅에서, 그것도 강자들만 골라서 공격하다니……. 이준은 그 의문의 강자에 대해 더욱 호기심을 느꼈다.
“그 살인마를 마주쳤던 지옥이무기 강자들은 하나같이 시체마저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지옥 이무기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마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혈통인데, 그 자가 지옥 이무기들을 그렇게나 죽여대는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귀한 강자들이 속속 죽어나가고 있으니까요.”
호 장로가 말했다.
“흠…….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저희와 관련이 없으니 며칠 동안 이곳에 편안히 있으면서 고적의 동태를 살피죠. 그리고 모두들 주둔지 인근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주위에 온갖 세력들이 주둔지를 꾸리고 있으니 괜한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준은 호기심을 억누르고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혼령열매를 얻을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소각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