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화. 성운각 (1)
“이건…….”
무언가를 알아차린 보람이 급하게 인결을 바꾸자, 엄청난 흡인력이 터져 나와 이준 일행을 순식간에 공간대문 안으로 빨아들인 뒤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허허, 약선, 풍존. 부디 꼭 살아남아 주시게.”
그리고 이준 일행이 무사히 탈출한 것을 확인한 철검존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나는 찰나, 새카만 공간 균열이 그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두 천존은 이준 일행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미친 사람마냥 고함을 질러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평원. 메마른 땅 위에는 듬성듬성 잡초들이 돋아나 있었고, 하늘에서는 거대한 독수리 한 마리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 위에 돌연 파동이 일며 새까만 공간 균열이 나타나더니 그 안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튀어 나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보람아, 괜찮아?”
바닥에 내려오자마자 아라가 창백하게 질린 보람을 부축하며 물었다.
보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자줏빛이 번쩍이더니 다시 조그마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잠시 쉬면 돼. 이준 먼저 챙겨줘.”
그녀의 말에 풍존은 이준에게 다가가 그의 맥을 짚었다. 하지만 맥을 짚기 무섭게 그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 때, 이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검은색 저장반지가 부르르 떨리며 약로의 영혼체가 나타나 심각한 표정으로 이준의 맥을 짚었다.
“적성! 이 때려죽일 놈!”
“영감…….”
그토록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오랜 친구를 만난 순간, 풍존의 눈가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더욱 급했다.
“약 선생님, 이준의 상태는 어떻죠?”
아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약로에게 물었다.
“혈관은 모조리 찢어졌고 뼈는 칠할 가까이 골절되었다.”
제자의 상태를 확인한 약로의 얼굴은 마치 성난 맹수처럼 사납게 변해 있었다.
“적성, 영혼의 궁전……. 내 절대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천화존자와 영진 역시 서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5성 최고급 수준 투존 강자의 공격을 받았으니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 정도로 부상이 심하다면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방법이 있지 않겠나? 자네 실력이라면 숨만 붙어있으면 살릴 수 있지 않은가!”
풍존의 질문에 약로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몸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 그의 상태로는 도저히 이준을 살릴 방도가 없었다.
“침착하게. 이준이 자네를 어떻게 구했는데, 제 발로 영혼의 궁전을 찾아가면 이 아이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드는 것 아닌가.”
약로의 눈에 깃든 살기를 읽은 풍존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약로와 그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으니, 눈빛만 보고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정신 차리게 약선. 지금 가장 급한 일은 복수가 아니라 치료야!”
풍존이 다시 한 번 어깨를 흔들며 큰 소리로 외치자, 약로도 조금 냉정을 되찾은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생각해 보게. 자네의 연금술이라면 분명 방법이 있을 테니.”
풍존자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약선은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한 번 이준의 맥을 짚었다.
약선이 이준의 몸을 살피는 동안 어느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약선이 무거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의 말에 모두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정말인가?”
풍존이 흥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그 동안 섭취한 진귀한 연금비약들의 에너지들이 최악의 상황은 막아준 것 같네. 보통이라면 다시는 염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될 정도의 부상이지만, 혈관과 몸이 워낙 튼튼해진 덕에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어.”
약선은 착잡한 표정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 천운이 따랐네. 이 아이가 마지막에 흡수한 별의 불꽃이 주인의 몸을 치료하고 있어. 과연 불사의 불꽃이라 불릴만한 힘이군. 준이의 회복을 돕기 위해서는 별의 힘이 가득한 곳으로 가야할 것 같은데…….”
“별의 힘?”
풍존자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럼 성운각으로 가지. 그새 잊은 겐가? 성운각에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별의 힘이 사라지지 않는 곳이 있지 않은가!”
풍존의 말에 약선은 그제야 무언가가 떠오른 듯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거기라면 이 녀석의 목숨도 문제없을 것이야!”
“허나 목숨을 건진다 해도 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면 분명 수련하는 데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풍존이 잠시 머뭇거리다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네. 이리 와서 확인해보시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질 것이네.”
이어지는 약선의 말에 풍존은 조심스럽게 이준의 맥을 짚었다.
“이건 부활의 영약……?”
약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부활의 영약이라니! 그렇다면 목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풍존이 흥분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정말 천운이 따랐지. 이번에 이 녀석, 투존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
“그래. 일단 이 녀석의 운을 믿어보지.”
약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별의 불꽃과 음양용현단이 있다면 목숨을 잃을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라와 보람 역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성운각으로 가세. 그 곳이라면 별의 힘을 빌려 더 빨리 이 아이의 부상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네.”
이준의 생존이 확실해지자, 무거운 분위기도 한결 가벼워졌다.
“이곳은 분명 망혼산맥에서 만 리 정도 떨어진 북황 평원일 것이네. 성운각과는 거리가 조금 있으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어.”
“분전이 무너졌으니 영혼의 궁전 놈들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 성운각은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으니 숨기도 딱 좋겠구먼.”
풍존의 말에 약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이준의 회복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다. 영혼의 궁전에 대한 복수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약로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영진이 곧바로 이준을 등에 업었고, 아라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준을 지키기 위해 그 곁에 섰다.
준비를 마친 그들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성운각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성운각은 중주 남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사대각 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제자를 보유하고 있지만, 가장 뛰어난 제자들만을 엄선해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중주 남부 지역에서는 성운각의 제자라는 것만으로 그 실력과 재능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성운각은 사대각 중 가장 신비로운 세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다른 세력들과 달리 거대한 도시에 휘황찬란한 탑을 세우지도 않았고, 그 본거지의 위치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 * *
북황 평원을 벗어난 이준 일행은 두 달 만에 중주 남부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정도를 이동하자, 마침내 남부지역에 위치한 ‘천성산맥’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성운각은 천성산맥 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 곳은 사방이 공간 결계로 막혀 있어 투존 강자라 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지.”
익숙한 산맥 앞에 도착하자, 풍존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천성산맥…… 아주 오랜만에 와보는군.”
약로가 면면히 이어진 산맥을 바라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성운각은 우리 둘이 함께 지은 곳이지. 하지만 저 노인네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 나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어. 에이,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
풍존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허허. 이 성운각을 지은 것도 그저 재미로 지은 것이지. 처음부터 나는 그런 일이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약로의 답에 풍존은 다시 한 번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젓고는 모두를 이끌고 산맥 안으로 진입했다.
아득한 산맥을 뚫고 한참을 날아가던 풍존자는 산 깊은 곳에서 뒤따라오던 일행을 바라보며 돌연 발걸음을 멈춰 섰다. 하지만 주위에는 탑은커녕 바위 하나, 산봉우리 하나 없이 수풀만이 무성했다.
“허허, 이곳이 바로 성운각의 입구라네.”
말을 마친 풍존이 자그마한 옥패 하나를 꺼내드는 순간, 옥패에서 신비한 빛이 흘러나오며 거대한 공간의 문이 나타났다.
“이 안에 바로 성운각 총부가 있네. 들어가지.”
풍존을 선두로 이준 일행이 모두 문 안으로 들어가자, 공간 대문이 반짝 거리며 소리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 * *
공간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앞이 번쩍이더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끝없이 넓은 숲은 어느새 사라지고 아득히 높은 산봉우리가 눈앞을 가로 막았다. 거대한 산맥의 위에는 신비한 기운을 뿜어내는 거대한 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사실 운석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 할 수 있지. 물론 투성 강자들이 지은 곳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풍존자가 웃으며 말했다.
“허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투존 강자들도 이곳에 성운각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지.”
아라 등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여 댔지만, 보람은 무언가 불편한 듯 잔뜩 인상일 찌푸리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여기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까악-!
잠시 후, 먼 곳에 위치한 산봉우리에서 열 마리 정도 되는 거대한 학들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거대한 새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학의 등 위에는 청색 옷을 입은 여인이 우뚝 서있었다.
“스승님…….”
풍존을 발견한 모청연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뒤따라온 다른 이들을 돌려보냈다.
“오냐.”
풍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옆에 있는 약로를 가리켰다.
“나의 친구이자 성운각의 각주 중 하나인 약로이다. 인사 올리거라.”
스승의 말에 모청연은 놀란 듯 커다란 두 눈을 껌뻑거리며 약로를 바라보다 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안녕하십니까, 각주님.”
모청연의 깍듯한 태도에 약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영감탱이가, 날 곤란하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만.”
“아니 그럼 각주를 각주라고 하지. 뭐라고 소개하나?”
풍존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천하의 약존이 돌아왔는데 이 아이들에게도 좋은 일 아니겠나? 앞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터인데 당연히 미리 예를 올려둬야지.”
풍존의 말에 모청연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성운각의 각주이자 전설적인 연금술사인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 영감이 정말 끝까지……. 됐네, 허튼 소리 그만하고 얼른 이 아이부터 옮기세.”
약로가 못 당하겠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제서야 피범벅이 된 채 영진의 등에 업혀있는 이준을 발견한 모청연은 약로를 보았을 때보다 더욱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이준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으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서 가자꾸나. 영혼의 궁전의 천존과 맞서 팔을 잘라놓고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어지는 풍존의 말에 모청연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 우뚝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천존이라면 5성 투존 이상의 강자에게 붙는 이름이었고, 이는 풍존보다도 더 강한 실력을 가졌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런 강자를 상대로 팔을 잘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