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화. 흑백 천존
‘이 년……. 도대체 정체가 뭐지?’
적성 영감의 눈에 살기가 솟아났다. 만일 이 정체불명의 계집애를 살려뒀다가는 훗날 반드시 재앙이 될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적성의 손에 검은 안개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죽어라!”
“네가 죽어줘야겠어.”
하지만 그가 막 보람을 다시 공격하려는 찰나, 그의 등뒤에 돌연 공간 균열이 생겨나더니 철탑처럼 건장한 사내가 나타나 적성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적성 노인은 그 주먹에 맞는 순간 자신도 결코 무사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정체불명의 강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무서운 힘에 적성 노인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고, 건장한 사내 역시 뒤로 날아갔다.
“키다리? 떠난 거 아니었어!?”
사나이는 다름 아닌 보람과 같이 연금세계에서 빠져 나온 영진이었다.
그러나 영진은 말없이 적성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릴 뿐 이었다. 그의 표정은 모골을 상대할 때보다도 훨씬 더 어두워보였다.
바로 그 때, 영진과 보람의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열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준의 손 위에서는 손바닥만한 화련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끊임없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네 개의 이화를 융합하느라 온 힘을 쏟아 부은 이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떻게 9성 투종 따위가 저런 무투기를…….”
화련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파멸의 기운을 느낀 적성의 눈에 살기가 가득 차 올랐다.
눈앞의 이 애송이가 이대로 성장해 투존이 된다면 영혼의 궁전의 앞날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말 것이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생각을 마친 적성은 곧바로 번개처럼 몸을 날려 이준을 향해 돌진했다.
그 때, 적성의 움직임을 눈치 챈 보람이 황급히 소리쳤다.
“키다리, 얼른 저 영감탱이를 막아!”
보람의 명령에 영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하늘 높이 뛰어 올라 적성의 등을 향해 강철 같은 주먹을 내질렀고, 곧이어 공간이 일그러지며 귀를 찌르는 듯한 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쾅!
다음 순간, 영진의 주먹에 얻어맞은 적성 영감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하며 둔탁한 소리가 허공 위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적성은 영진의 일격을 피하기는커녕 그 반동을 이용해 더욱 빠른 속도로 이준을 향해 날아갔다.
“이 멍청한 놈아! 무슨 짓을 하는거야!”
영진의 공격을 역이용해 더욱 속도를 높이는 적성의 모습을 본 보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당황한 영진이 황급히 몸을 날려 그 뒤를 쫓았다.
순식간에 이준의 코앞까지 날아간 적성은 잽싸게 검은 안개를 응집시켜 날카로운 다섯 개의 손톱으로 변화시킨 뒤 이준의 정수리를 향해 손을 날렸다.
“망령의 손톱!”
적성의 손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텅 빈 허공에 칼로 벤 듯한 날카로운 흔적이 만들어지며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젠장!”
다급해진 이준은 황급히 손을 움직여 미완성의 화련을 내던졌다.
펑!
그 순간,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파멸의 힘이 폭풍처럼 산 전체를 휩쓸었다.
산골짜기 중심에선 거대한 균열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거대한 대전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혼전의 수호병들이 머리를 싸매고 뛰쳐나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하늘에서 대치를 벌이던 투존들도 공포에 질린 눈으로 파멸의 힘을 피해 도망쳤다.
펑!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손톱이 이준의 가슴팍을 강하게 긁었다.
“컥!”
치명적인 공격을 받은 이준은 그대로 새빨간 피를 내뿜으며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쾅!
적성의 손톱에 당한 이준이 튕겨져 나가기 무섭게 백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화염 폭풍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매웠다.
산골짜기 안에 우뚝 서있던 거대한 대전은 완전히 무너져버렸고, 화염 폭풍에서 확산된 파멸의 에너지로 인해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 역시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화염 폭풍에서 뻗어 나온 파멸의 힘이 퍼져 나가자, 온 산에 있던 나무들이 재가 되어 사라지며 주위가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먼 하늘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투존들은 화련이 가진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발 아래 펼쳐진 지옥도를 바라봤다.
펑-!
적성의 공격을 받고 날아가 거대한 바위에 박혀버린 이준은 급히 몸을 일으켜 주위에 흩어진 돌조각을 모아 맹수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파멸의 힘을 막아냈다.
“어떻게 됐습니까?”
화염폭풍을 피해 날아온 영진이 가슴팍이 움푹 파인 채 피범벅이 된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보람의 얼굴에는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 이준과 함께 여행을 해왔지만, 이렇게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처음 보는 일 이었다.
뒤이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풍존과 아라를 비롯한 이준의 일행들이 그의 곁으로 날아왔다.
쾅!
그때, 또 한 번 거대한 굉음이 일며 화염 폭풍 속에서 격렬한 공간의 힘이 터져 나오더니 빠른 속도로 화염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화염폭풍이 완전히 잦아들고, 그 사이로 섬뜩한 에너지를 내뿜는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우리 영혼의 궁전에 이렇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자는 네가 처음이구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풍존 일행은 굳은 얼굴로 화염폭풍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두 사람, 아니, 정확히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생소한 얼굴로, 각각 검은 의복과 하얀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린 것만 봐도 대전의 붕괴 때문에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그 두 사람 가운데에 서있는 사람에게로 닿는 순간, 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모습은 이준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피로 가득한 몸, 찢어진 의복 사이로 들어난 살과 완전히 떨어져 나간 소매까지……. 새빨간 피가 끊임없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한쪽 팔뚝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음으로 사람들이 시선을 돌린 곳은 바로 보람의 품에 안겨있는 이준의 얼굴이었다. 9성 투종이 5성 투존을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쿨럭…….”
적성 영감이 기침을 할 때 마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상태를 보아하니 부상에서 회복된다 해도 엄청난 후유증이 남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최악의 경우 실력이 떨어져 다시는 5성 투존의 실력을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저 녀석을…… 죽여야 해. 저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한다…….”
적성은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그 말을 반복하며 독기 어린 눈으로 이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양 옆에 서있던 두 노인은 적성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뜬 채 적성과 이준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자신들과 비슷한 실력을 가진 적성이 이렇게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부상을 입힌 상대가 투존이 아니라 투종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을 보는 순간 바로 공간의 돌을 깼어야지! 이 꼴이 날 때까지 뭐 했나!”
검은 의복을 입은 노인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전주님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려고……. 쯧쯧.”
“됐소, 이 늙은이 성격을 몰라서 그러시오? 이준 같은 귀한 놈을 잡은 공을 독차지할 생각에 우리를 부르지 않았겠지, 허허. 이 꼴이 나지 않았으면 끝까지 공간의 돌을 깨뜨리지 않았을 거요.”
백색 의복을 입은 노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대화에 적성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몸속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러다 자칫하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셨습니까, 흑 천존님, 백 천존님.”
그 때, 모골 노인과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이 황급히 그들에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분전이 이렇게 된 것에는 네 놈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백 천존은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모골 노인은 차마 변명조차하지 못 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이준을 잡아둔 것은 잘 했구나.”
흑 천존이 말했다.
모골 노인과 다른 영혼의 궁전의 존자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 천존이 적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산골짜기 위로 올려 보냈다. 그 위에는 부상을 입은 다른 영호들이 모여 있었다.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함께 움직이자꾸나.”
흑 천존이 말했다. 지금은 이준을 잡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이준을 다시 놓치게 된다면 분노한 전주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 * *
“흑백 천존이 여기까지 오다니…….”
두 천존을 발견한 풍존이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둘은 적성보다 더 강한 자들이오. 오늘 일이 정말 어렵게 되었구려.”
철검존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상황을 보니 한 번 더 붙어야 할 것 같네요. 보람, 이준을 데리고 여길 떠나.”
아라가 비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 상황에서 한꺼번에 도망을 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준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그 순간, 피범벅이 된 이준이 말없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유언 같은 거 남길 것도 없어. 빠져나갈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보람이 뭔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한테 아직 방법이 있어.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일단 날 따라와. 절대로 머뭇거리면 안 돼.”
말을 마친 보람은 바로 혓바닥을 깨물었다.
그러자 황금색의 피가 흘러나와 그녀의 손끝에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백지장처럼 새하얗고 질려 있었고, 몸을 가누기도 힘든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보람이 황금색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가느다란 선을 긋자, 시커먼 허공이 갈라지며 거대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성공적으로 공간의 문을 연 보람은 모든 힘을 소진한 듯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딜 가려고!”
그러나 공간의 문이 생겨나기 무섭게 흑백천존이 고함을 지르며 폭풍처럼 이준 일행을 향해 몸을 날렸다.
풍존이 염력을 폭발시켜 두 사람에 맞서려는 찰나, 보람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어서 문으로 들어가요! 시간이 없어요!”
“약선, 풍존! 어서 가게! 자네에게 받은 은혜는 이것으로 갚는 것으로 치지!”
그 순간, 철검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두 천존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두 천존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폭발하자, 그의 입에서 곧바로 새빨간 선혈이 터져 나왔다.
2성 투존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5성 투존 이상의 실력을 가진 두 천존에게 맞설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한 돌진이었다.
“허허, 내 복수는 이미 끝냈다네. 지금은 혼전의 손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철검존자는 입에 묻은 피를 닦으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더욱 거센 기세로 염력을 폭발시켰다.
“조심하라, 자폭이다!”
철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흑 천존이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철검존자가 몸을 바쳐 두 천존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이, 새카만 공간의 문이 서서히 열리며 눈부신 은빛 섬광이 터져 나와 이준 이행을 감쌌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공간 문이 돌연 격렬하게 흔들리며 보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지금 그녀의 실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강제로 연 공간 문을 통과하는 것은 아직 역부족이었다.
“젠장!”
절망한 보람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떨어뜨렸고, 이준 일행 역시 이를 악물고 마지막 사투를 벌일 준비를 마쳤다.
바로 그때, 공간의 문 안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강렬한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