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화. 전황
봉인에서 풀려난 영혼들은 잠시 당황하다 이내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앞다투어 대전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네가 죽고 싶구나!”
애써 모은 귀한 영혼들을 잃게 된 적성은 성난 야수처럼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으며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이준의 손 위에 세 개의 자흑색 구슬이 나타났다.
쉭쉭!
이준이 불꽃 구슬을 던지자, 자흑색 화염이 폭발하며 또 다시 대전 안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쾅!
무시무시한 파동이 퍼지며 주위에 있던 수많은 쇠사슬들이 끊겨버렸고, 풀려난 영혼들이 또 다시 출구를 향해 벌떼처럼 달아났다.
“이놈이! 정말로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분노한 적성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염력을 폭발시키는 순간, 그의 왼손이 돌연 거인의 주먹처럼 거대하게 변화했다.
곧이어 그가 엄청나게 커진 주먹을 힘껏 움켜쥐자, 이준 주위의 공간이 그대로 굳어버리며 움직임이 완벽히 묶여버리고 말았다.
“죽어라!”
승리를 확신한 적성은 그대로 주먹에 힘을 주어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이준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이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게…….”
잠시 멍하니 서있던 적성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봉인대전의 출구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은빛 섬광을 내뿜으며 부리나케 대전을 빠져나가고 있는 이준의 모습이 보였다.
이준에게 속아 넘어간 것을 깨달은 적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쥔 채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봉인 대전 밖으로 벗어난 이준은 그야말로 꽁지에 불이 나도록 달아났다. 이렇게 열심히 도망가 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대전 안에 남아있던 수호병들은 자갈색 화염에 휩싸인 채 마수처럼 돌진하는 이준을 발견하곤 공포에 질려 황급히 달아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적성의 기운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끈질긴 영감 같으니라고…….’
적성만 아니었다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텐데, 5성 투존 최고급 강자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다. 이준 입장에서는 가장 원하지 않던 일이 벌어진 것 이었다.
하지만 이미 나타난 것이니, 지금은 최선을 다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이준은 부디 바깥의 전황이 유리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출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 * *
대전을 빠져나오는 순간,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에너지 파동이 터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산골짜기는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거대한 균열들이 입을 벌린 채 산비탈까지 퍼져있었고, 낭떠러지 사이로 커다란 돌들이 끊임없이 떨어지면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산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는 십여 명의 투존 강자들이 뒤엉켜 형형색색의 염력을 뿜어내며 천재(天災)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각각 쌍을 이루어 전투를 벌이고 있는 투존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이준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보라색 말총머리를 휘날리는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보람과 떨어져있던 몇 달 사이, 그녀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상승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막 같은 것이 씌어있어 정확한 실력을 알 수는 없었지만, 6성 투종급의 영호가 보람의 주먹 한방에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실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혼의 궁전 쪽에는 3성 정도 되는 투존 다섯 명이 있었는데, 철검존자 쪽에서 조금 밀리고 있는 것 외에는 전반적으로 비슷하거나 약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선생님을 구출했어요! 이제 달아나야 합니다!”
상황을 파악한 이준은 곧바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퇴각 신호를 보냈다.
이준의 목소리를 들은 투존들은 곧바로 몸을 돌려 퇴각하려 했지만, 적성의 존재를 알고 있는 투존들이 필사적으로 그들을 붙잡고 매달리는 탓에 곧바로 전장에서 몸을 빼지는 못했다.
한편, 이준이 나타난 것을 발견한 영호들은 곧바로 검은 쇠사슬을 뿜어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투존 강자들의 싸움에는 끼어들 수 없었지만, 이준 정도는 자신들의 실력으로도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꺼져!”
세 명의 영호가 자신을 달려드는 것을 알아챈 이준은 곧바로 자갈색의 화룡을 만들어내 그들을 공격했다.
무시무시한 열기를 품은 화룡이 한바탕 하늘을 휩쓸자, 세 명의 영호가 일제히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단번에 세 명의 영호를 죽여 버리는 이준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다른 영호들 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거리를 벌렸다.
바로 그 때, 대전의 출구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번개처럼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젠장! 벌써 쫓아왔어!’
“공간장벽!”
이준을 발견한 적성이 빠르게 인을 맺자, 산골까지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적성?”
공간 결계가 쳐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가 적성의 모습을 확인한 풍존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풍한, 또 네놈이냐!”
허공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풍존의 모습에 적성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직감한 풍존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영존을 향해 전력으로 주먹을 날렸다. 적성이 나타난 이상, 자칫하면 모두가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이 녀석을 처리하고 나서 네놈들도 모두 죽여주마!”
말을 마친 적성은 곧바로 허공을 밟으며 이준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갔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시커먼 안개가 뿜어져 나오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마치 사신처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적성을 바라보던 이준은 이를 악문 채 이 자리를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냈다.
사실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네 개의 천지의 불꽃을 융합한 화련이라면, 적성을 죽이지는 못해도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몰랐다. 문제는 적성이 화련을 만들 때까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현재 이준 쪽 투존 강자들은 이미 영존에게 잡혀 있었기 때문에 이준을 도울 수 있는 자는 보람뿐이었다. 그러나 보람이 전설의 용족이라 해도, 적성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내가 도와줄게.”
그 때, 가까운 곳에 있던 보람이 이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입을 열었다.
“할 수 있겠어?”
이준이 머뭇거리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나 말고 저 노인을 상대할 사람이 누가 있는데?”
보람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이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좀 벌어줘. 조심해야해. 못 버티겠으면 바로 피해.”
“걱정 마.”
말을 마친 보람은 곧바로 자그마한 손을 빠르게 움직여 인을 맺기 시작했다.
인이 완성되자, 강렬한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오며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자라나더니 완연한 성년의 여인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이준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자갈색 화염이 서로 다른 세 개의 불꽃으로 분리되어 이준의 앞에 둥둥 떠다녔다.
이준이 화련을 만들 준비를 하기 시작하자, 보람은 굳은 표정으로 적성을 노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보람은 이미 눈앞에 있는 노인이 이번 전투의 승패를 가를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이준을 죽이고 전장에 가세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몇 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운이 좋아야 한 명, 아니면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적성이라는 노인을 막아야 했다.
보람이 앞을 막아서자 적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5성 투존인 그의 실력으로도 보람의 실력을 정확히 감지할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위협감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기운을 숨겨주고 있군.’
적성은 말없이 그녀의 뒤에서 네 번째 화염을 불러내고 있는 이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개!?’
그 순간 적성 노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한 사람이 네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영혼의 궁전만 해도 천지의 불꽃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온갖 공을 들였는데, 저런 애송이가 어떻게 네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는 이준의 모습에 적성의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목숨을 맡기고 네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을 불러낸다는 것은, 무언가 엄청난 무투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친 적성은 곧바로 검은 안개를 뿜어내며 보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전열에서 이탈할 만큼 시간이 필요한 무투기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눈앞의 계집을 빠르게 해치우고 이준을 죽이면 그만이었다.
“너 따위가 내 앞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시끄러 빌어먹을 영감탱이야! 덤빌 거면 얼른 덤벼!”
보람의 욕설에 적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린 것이 아주 버릇이 없구나. 과연 저 놈과 한패다워.”
적성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투명한 파동이 확산되며 사방에서 보람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투종 최고급 강자라도 몸이 터져버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러나 보람을 압박하던 투명한 공간의 힘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녀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자주 빛에 의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이 몸 앞에서 공간의 힘으로 장난을 하다니, 참으로 귀엽구나!”
보람은 입술을 비죽이며 노인 흉내를 냈다.
투종 최고급 강자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위력의 공간의 힘을 손쉽게 없애버리는 보람의 신비한 힘에 적성은 놀란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몸을 날려 직접 주먹을 휘둘렀다.
쾅!
그 순간, 검은 안개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새까만 뱀으로 변해 꼬리를 휘둘렀다.
거대한 뱀이 만들어낸 풍압에 백 미터나 떨어져 있던 산골짜기 지면이 푹 꺼지며 거대한 바위들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적성의 거친 공격에 보람 역시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고, 그녀의 몸을 지키고 있던 자주색 빛이 용의 형상으로 변화해 검은 뱀을 덮쳤다.
펑!
두 힘이 충돌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폭발음이 산골짜기를 휩쓸면서 거대한 바위들이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윽……!”
곧이어 보람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폭발로 인해 생겨난 폭풍이 하늘을 휩쓸다 서서히 사라지자, 보람을 바라보던 적성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변했다. 조금 전 보람의 용이 순식간에 공간 균열을 만들어 자신의 검은 뱀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5성 투존인 그조차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공격 방식이었다.
“네 년 정체가 궁금해지는구나.”
말을 마친 적성 노인은 기괴하게 웃으며 이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준의 손 위에서 네 개의 화염이 하나로 융합되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의 얼굴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상치 않은 열기구나. 절대로 저 무투기를 사용하게 둬서는 안 되겠어.’
네 개의 불꽃이 하나로 융합되며 주위의 대기가 버석하게 마르고, 풀들이 시들어가는 모습에 그의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적성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보람에게 주먹을 퍼부어댔다.
자신이 물러서면 이준이 화련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보람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정면으로 적성의 공격을 막아냈다.
쾅!
5성 투존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낸 보람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창백해진 얼굴로 선혈을 뿜어냈다.
그러나 상대의 실력에 놀란 것은 적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번 충돌로 인해 보람의 실력이 이준보다 더욱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녀가 자신의 힘을 막아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미약하게나마 되받아치고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