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적성
“터져라!”
광단 위의 물결이 점점 더 크게 퍼져나가자, 이준이 차가운 눈빛으로 소리쳤다.
쾅!
그 순간, 빛덩어리가 어지럽게 요동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쪼개졌다. 하지만 스승의 팔다리를 묶고 있는 굵은 쇠사슬은 여전히 흠집조차 나지 않은 상태였다.
“스승님, 괜찮으시죠?”
스승의 사지를 옭아매고 있는 검은 사슬의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쥐었다.
“이건 영혼의 사슬이다. 영혼의 궁전 놈들이 영혼을 묶을 때 쓰는 것이지. 이 정도 굵기라면 결코 쉽게 부술 수 없을 것이야.”
약로가 자신의 사지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준이 쇠사슬 위에 손을 얹고 자갈색의 불꽃을 폭발시키자, 허벅지만한 굵기의 쇠사슬에서 새하얀 연기가 올라오며 빠른 속도로 사슬이 가늘어 지기 시작했다.
치익!
“이건…….”
이준의 손에서 나온 자갈색 화염을 본 약로는 잠시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환히 웃으며 제자를 바라봤다.
“새로운 불꽃을 찾은 게냐?”
“예, 별의 불꽃이요.”
“허허허, 내가 없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나보구나. 참으로 잘했다. 잘했어.”
자신이 없는데도 혼자 힘으로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찾아 흡수한 이준의 모습에 약로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준의 손에서 피어오르던 자갈색 화염은 무시무시한 온도를 내뿜으며 쇠사슬을 태워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쇠사슬 위에 새겨져 있던 기이한 문양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빠직-.
이준이 힘을 주어 쇠사슬을 비틀자, 굵은 쇠사슬이 나뭇가지마냥 힘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몸에 감겨있던 쇠사슬이 없어져도 약로의 몸은 여전히 반투명한 상태였지만, 빠른 속도로 영혼의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손목을 돌리며 굳은 근육을 푼 약로는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쇠사슬을 보며 감격한 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
“가자, 먼저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스승과 함께 몸을 일으키던 이준은 대전을 가득 채운 광단을 보고 무언가가 떠오른 듯 돌연 자갈색 화염으로 이루어진 채찍 하나를 만들어냈다.
“기왕 온 김에 다른 영혼들도 모두 풀어줘야겠어요.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풀려나면 영혼의 궁전 놈들도 골치를 썩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화염 채찍을 휘둘러 허공에 달려있는 흑색 쇠사슬을 내리쳤다.
하지만 허공에 있는 검은 쇠사슬에 닿기도 전에 화염채찍이 무언가에 부딪힌 듯 맑은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왔다.
“이런, 영존의 기운이 느껴진다! 어서 가자꾸나!”
약로가 굳은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준은 스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를 붙잡고 번개처럼 대전 밖으로 날아갔다.
“허허, 약선. 좋은 제자를 두었구나. 스승을 구하기 위해 정말로 영혼의 궁전에 맞설 줄이야.”
이준이 빠르게 후퇴하던 그 때, 대전 안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이준의 눈앞에 투명한 장벽이 생겨났다.
장벽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 이준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회색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쇠사슬 위에 올라선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자도 설마 투존인가?’
순간 이준의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이곳을 수호하고 있는 투존강자가 5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적성? 자네도 여기에 있었나?”
노인을 발견한 약로가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 전주님께서 자네를 지키라고 나를 여기로 보내셨지. 다만 그 동안 자네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네.”
약로의 말에 답한 노인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대어를 하나 낚을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었나보지?”
이준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언젠간 올 줄 알고 있었지. 사실 전주님께서는 약선보다 자네를 더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계셨거든. 이씨 가문의 열쇠가 자네 손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네. 자네 아비는 맞아 죽어도 입을 안 열었지만, 그에게 열쇠가 없다면 이씨 가문의 가장 뛰어난 인재인 자네에게 있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아버지?”
아버지의 이야기에 나오자, 이준의 눈이 대번에 살기로 물들었다.
“안돼, 어서 가거라. 저 자는 네 상대가 아니다.”
이준의 싸늘한 표정을 본 약로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의 충고에 이준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적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모골보다 몇 수는 위였으니, 이 곳에서 그와 맞서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허허, 설마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말을 마친 적성 영감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검은 안개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십 미터도 넘는 거대한 손바닥으로 변해 이준을 덮쳤다.
후욱-!
‘천계의 불꽃, 제 1장! 제 2장! 제 3장!’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감지한 이준은 번개처럼 인을 맺어 천계의 불꽃을 시전한 뒤 자갈색 화염을 내뿜어 검은색 안개에 맞섰다.
쾅!
강한 폭발음이 대전 안에 울려 퍼지는 순간, 거대한 에너지가 가까이 있던 검은색 쇠사슬을 전부 끊어버리며 쇠사슬에 매달려 있던 광단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불과 한 번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 인데, 이준의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놈은 5성 투존 최고 수준의 강자다! 저 놈과 싸워서는 안 돼!”
뒤로 밀려나는 이준을 본 약로가 소리쳤다.
“스승님, 제 저장반지 안으로 들어가세요!”
이준의 말에 약선은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인 뒤 이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새까만 저장 반지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만일 그의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이준과 함께 적성을 상대할 수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태로는 이준의 손속만 어지럽게 만들 뿐이었다.
“하하, 목숨을 내놓기로 결정한 것이냐? 그래, 나도 이씨 가문에 이현처럼 패기 넘치는 자가 또 있는지 참 궁금했다!”
적성이 저장반지 속으로 들어가는 약로를 보며 말했다.
그 순간, 혈관을 타고 흐르던 이준의 염력이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별의 불꽃을 흡수하면서 실력이 큰 폭으로 상승했지만, 5성 최고급 투존인 적성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도 모자랐다.
“이씨 가문의 열쇠를 나에게 넘긴다면 해치지 않겠다.”
적성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5성 최고급 투존인 적성 영감에게 있어 이준은 한낱 개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준은 그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눈을 굴려대며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허,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정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져와야겠구나.”
말을 마친 적성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그의 손끝에서 점성을 띤 검은 안개가 솟아나 검은 색 쇠사슬로 변했다.
다음 순간,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쇠사슬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공간을 가르고 날아와 이준의 머리 위를 내리쳤다.
하지만 이준의 몸은 잔영을 남기고 그대로 사라졌고, 목표를 잃은 검은 쇠사슬은 그대로 바닥을 내리치고 말았다.
“반응이 꽤 빠르구나.”
그러나 이준의 무시무시한 속도에도 적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다시 한 번 검은 쇠사슬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숨 쉴 틈도 없이 날아드는 검은 쇠사슬의 공격에 이준은 더 이상 피해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곧바로 검은 송곳을 꺼내들었다.
챙챙챙!
검은 송곳이 나타나는 순간, 그의 몸 주위에 새카만 검막이 생겨나며 쇠사슬을 쳐냈다.
검은 쇠사슬의 엄청난 위력에 이준은 불과 2,3 번 만에 팔뚝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젠장, 천존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엄청난 존재일 줄이야.’
상대의 실력을 확실히 파악한 이준은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성 투종이 내 공격을 받아 내다니, 생각보다 아주 재미있는 놈이구나.”
이준이 자신의 공격을 연달아 받아내자, 적성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너와 놀아줄 시간이 없구나. 밖에 있는 귀찮은 녀석들도 처리해야하니 말이다.”
다음 순간, 공간이 왜곡되며 적성의 몸이 이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에 이준은 뒤쪽으로 번개같이 몸을 날리며 온 힘을 다해 검은 송곳을 휘둘러댔다.
하지만 그의 검은 송곳은 무언가 단단한 물체에 의해 가로막혔고, 다시 검은 송곳을 휘두르기도 전에 주름이 가득한 손 하나가 그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에 피할 겨를조차 없었던 이준은 반사적으로 검은 송곳을 들어 몸 앞을 막았다.
땡!
메마른 손이 검은 송곳에 닿는 순간, 맑은 금속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은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힘에 이준은 마치 거대한 쇳덩이에 깔린 것처럼 무릎을 꿇고 말았다.
쾅!
이준의 두 발이 암석을 파고들자 단단한 암석이 두부처럼 부서져 버렸다.
간신히 적성의 공격을 받아낸 이준은 또 한 번 목구멍에서 피 냄새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검은 송곳의 거대한 몸체 위에는 마치 그린 것처럼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이럴 수가…….”
검은 송곳에 남은 노인의 손자국을 확인한 이준은 저도 모르게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 역시 검은 송곳이 얼마나 단단한지는 알지 못 했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강자를 상대해도 흠집하나 나지 않았던 무기가 바로 검은 송곳이었다.
그런데 일격으로 그 위에 손자국을 남기다니. 그 손바닥에 자신이 맞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좋은 무기를 들고 다니는군.”
그 때,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노인의 형상이 나타나 또 다시 앞을 막아섰다.
상대와의 실력차를 절감한 이준은 어떻게든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으려 머리를 쥐어짜냈다. 이대로 천계의 불꽃의 효과가 끝난다면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밖에 있는 투존들과 합류해야 했다.
“허허, 어디서 잔머리를 굴리느냐.”
이준의 생각을 읽은 적성이 가볍게 발을 구르자, 그의 몸이 화살처럼 이준에게 날아들었다.
적성의 표정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더 이상 이준과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살기를 느낀 이준은 눈부신 은빛 섬광을 뿜어내며 빠르게 뒤로 후퇴하여 자갈색 불연꽃을 집어던졌다.
영혼의 힘이 영혼단계로 들어선 이후, 이준의 영혼 통제력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향상되어 있었다. 덕분에 지금은 아주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화련을 만들 수 있었다.
쾅!
화련이 적성과 가까워지는 순간, 천둥 같은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대전 전체가 자갈색의 화염으로 뒤덮였다.
불연꽃이 폭발했지만 이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전 밖으로 몸을 날렸다. 별의 불꽃까지 융합시킨 화련이라도 저 공포스러운 투존 강자를 어찌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화련이 폭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불바다를 가르고 적성이 모습을 드러났다.
“9성 투종이 이런 위력을 발휘하다니, 역시 이씨 가문이구나!”
이준을 쫓는 적성의 눈빛은 전에 없이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준은 표정 변화 없이 허공 위로 날아오르며 다시 한 번 자갈색 화염을 뿜어냈다. 이번에 그의 화염이 노린 것은 적성이 아니라 광단을 묶고 있는 쇠사슬들이었다.
적갈색의 화염이 용의 형태로 변해 사방을 휩쓸자, 쇠사슬이 부서지며 광단 안에 묶여있던 영혼들이 하나 둘 풀려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