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화. 구출작전
비뢰가 사라지고 이틀 뒤, 마침내 이준이 밀실을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6개월이나 방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은 탓인지 그의 얼굴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무려 세 번의 실패 끝에 가까스로 재생의 영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이준이 진청색의 둥근 연금 비약 하나를 건네는 순간, 천화존자는 그것이 바로 ‘재생의 영약’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재생의 영약을 건넨 이준은 별다른 말없이 방안으로 돌아갔고, 천화존자 역시 긴말을 하지 않고 짤막한 감사인사만을 건넨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8레벨 연금비약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인사는 이준의 스승을 구하는 것으로 대신 하는 것이 가장 큰 감사의 표현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 역시 그런 천화존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방으로 돌아가 천명 수라의 손을 완성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천명 수라의 손을 완벽하게 습득하는데 성공한지 삼일 째 되던 날, 돌연 무시무시한 광풍이 연금탑의 상공 위에 몰아쳤다.
* * *
연금탑 꼭대기에는 아주 넓게 탁 트인 대전이 하나 있었다. 그 곳은 연금탑의 최고 귀빈들을 접대하기 위해 마련된 대전이었다.
“허허, 풍존자, 오랜만이구려. 안색이 좋아보이는 군.”
대전 가장 높은 곳에서 현공자가 웃음을 머금은 채 앉아있는 청색 옷의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청색 옷의 노인은 바로 이준의 기별을 받고 성운각에서 이곳까지 단숨에 날아온 풍존자였다.
“허허, 현공자님께서도 안색이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풍존자의 곁에는 마치 이름난 명검처럼 전신에서 예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노인 하나가 딱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허허, 오랫동안 연금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더니, 저 옆에 있는 분은 누군지 못 알아보겠구려.”
현공자가 풍존의 곁에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 이름은 이미 잊어버려서 모르겠으나, 지금은 철검이라 불리고 있소.”
현공자의 말에 딱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노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분명히 웃고 있는 얼굴임에도 노인의 몸에서는 끊이지 않고 날카로운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철검? 설마 5년 전 혼자서 옥검문을 멸문시킨 철검존자란 말이오?”
현공자의 질문에 철검이라고 불린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도로 보아하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딱히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흠흠……. 이 친구와 옥검문 사이에 그럴만한 일이 있었네.”
철검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풍존자는 곧바로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준은 어디 있소? 그 녀석이 나를 불러서 이곳까지 왔는데, 어찌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것이오?”
“풍존 선생님!”
풍존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전의 문이 열리며 이준이 달려 들어왔다. 풍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자신의 스승인 약로를 대할 때만큼이나 존경심이 가득했다.
“9성 투종이 된 것이냐?”
이준을 훑어보던 풍존이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준을 보았던 것은 대략 1년 전이었다.
그때 이준의 실력은 고작해야 1성 투종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1년 만에 9성 투종이 되어있단 말인가?
딱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철검존자 역시 이준을 보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풍존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약선의 제자가 재능이 대단하다고 했지만, 그는 그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던 것이 사실이었다. 풍존과 약선의 관계가 관계이니만큼, 그 평가에 약간의 과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준을 직접 보고나니 그 평가가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운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이준의 뒤에는 아라와 천화존자, 그리고 왠 작달만한 계집애 하나가 서있었다. 조그마한 소녀의 얼굴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이럴 시간에 낮잠이나 자는 게 낫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라와 천화존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풍존과 철검존자는 또 한 번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틀림없이 3성 투존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분은……?”
풍존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준에게 물었다.
“모두 제 친구들이자 이번에 함께 떠날 조력자들입니다. 이쪽은 아라, 그리고 이쪽 분은 천화존자이십니다.”
이준의 말에 풍존자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불과 1년 사이에 이준은 9성 투종이 되어 있었고, 3성 투존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둔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정말로 약선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가 듣기로 이준은 이미 8레벨 연금술사가 되어 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성장속도였다.
“음……. 그렇군. 이분은 철검존자라고 하네. 이번에 우리를 도와 약선을 구하는 일에 힘을 보태주실 분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영혼의 궁전과 맞서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 내 힘으로는 이 친구 하나 밖에 도와줄 사람을 구하지 못했네.”
풍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상대가 영혼의 궁전임을 알면서도 나설만한 강자는 투기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 백 번은 더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철검존자님.”
“감사인사는 됐네. 약선에게 빚도 있고, 나도 영혼의 궁전 놈들에게 갚아줘야 할 것이 있어서 말이지.”
철검존자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비통함과 숨길 수 없는 원한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영혼의 궁전과 상당히 깊은 원한이 있는 것 같았다.
“약선과 관련된 정보는 이미 현공자에게 들었네.”
풍존자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망혼산맥이라니……. 생각보다 골치 아픈 곳으로 약선을 옮겨갔군.”
“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이 또 다시 스승님을 다른 곳으로 옮길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쳐들어가야 합니다.”
“네 말이 맞다. 이 일은 확실히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한다.”
풍존 역시 이준의 말에 찬성하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출발할 예정이냐?”
“내일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 풍존과 철검존자가 합세하면서 투존 강자만 모두 다섯 명이 되었다. 게다가 자신 역시 비술을 사용하면 낮은 등급의 투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다섯 명의 투존이 상대라 해도 스승을 구해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바로 내일 출발하겠다는 이준의 말에 풍존 역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말대로 내일 움직이자꾸나!”
생각보다 빠른 출발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것은 현공자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운을 빌겠네.”
“감사합니다, 현 공자님.”
대답을 마치고 일어나는 이준의 새까만 눈동자가 뜨겁게 불타올랐다. 중주에 온 이후 그가 해왔던 모든 일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스승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일, 마침내 스승을 구하기 위한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어둠을 가르고 대지를 밝게 비출 무렵, 몇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연금탑을 빠져나갔다.
* * *
망혼산맥은 중주 서북부 지역에 위치한 거대한 산맥으로, 이 거대한 산맥의 아래에 얼마나 많은 시체들이 묻혀있는지 모른다고 전해지는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천연의 얼음 에너지가 일 년 내내 짙게 깔려있어 뛰어난 영혼 감지능력을 가진 자라 해도 길을 잃고 그 안에 살고 있는 흉포한 마수들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다.
“거의 다 도착한 건가…….”
이준이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어느새 거대한 산맥의 윤곽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하얀 안개로 뒤덮인 산맥에서는 음산한 기운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이준의 마음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잠시 후, 여섯 개의 그림자가 망혼 산맥의 바깥쪽에 위치한 산봉우리 하나에 내려앉았다.
“드디어 망혼산맥에 도착했네요.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준의 말에 보람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며칠 동안 쉴 새 없이 날아오느라 적잖이 지친 모양이었다.
“여기가 바로 망혼산맥이구나.”
아라가 얼음 염력이 퍼져 나오고 있는 산맥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바로 날아 들어갈 수 있나요?”
“그건 위험하네. 바깥쪽 얼음염력은 그나마 괜찮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얼음 염력이 짙어져 길을 잃기 십상이네. 게다가 저 안에는 7레벨 이상의 마수도 많아서 싸움이 벌어지기 쉽네. 이 정도 전력이라면 8레벨 마수도 두렵지 않겠지만, 소란이 일어나면 영혼의 궁전 놈들이 약선을 다른 곳으로 빼돌릴지 모르네.”
풍존자가 먼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풍존자만큼 중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았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계절은 망혼산맥의 얼음염력이 가장 강할 때라 이곳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위험하지만 우리에겐 기다릴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풍존자가 두 눈을 얇게 뜬 채 망혼산맥 밖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망혼산맥 주위에는 비교적 작은 세력들이 있는데 이 세력들 대부분이 영혼의 궁전의 지배를 받고 있네. 그들과 마주치면…….”
“그건 나에게 맡기시오.”
그때, 옆에 있던 철검존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풍존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검존자의 눈에서는 벌써부터 살기가 돌고 있었다.
이준 일행은 대략 한시간 정도 산정상에서 휴식을 취한 뒤 약속이나 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비장함이 느껴졌다.
“이번 작전에 실패하게 된다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네. 그러니 이번에 어떻게든 반드시 약선을 구해 와야 하네.”
풍존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에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맥에 들어간 후로는 모두 멀리 떨어지지 말고 각자 조심하시오. 갑시다.”
말을 마친 풍존자는 커다란 새처럼 날아올라 얼음염력으로 가득 덮인 숲속으로 날아갔고, 이준 일행이 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 * *
망혼산맥에 들어서니 새하얀 얼음 염력이 가득해 이준의 능력으로도 기껏해야 일이백 미터 정도까지 밖에 앞을 볼 수 없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흉포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삭막한 망혼산맥의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산맥 깊숙이 들어갈수록 풍존의 말대로 얼음염력이 더욱 짙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현공자가 준 지도 역시 처음에는 조금 쓸모가 있었지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소용이 없어져 결국에는 가장 탐지 능력이 강한 이준에게 기대 분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는 마침 망혼산맥에 얼음염력이 최고조에 달할 시기였기 때문에 지도상에 표시된 곳도 얼음안개에 가려 모두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현공자를 비롯한 연금탑의 사람들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영혼 탐지 능력으로 더듬더듬 방향을 잡아가며 앞으로 나아가던 중, 돌연 풍존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으니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밤이 되면 마수들이 아주 흉악해져 싸움이 벌어지기도 그만큼 쉬워지네.”
그의 말에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풍존자는 이 중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고, 망혼산맥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조급해도, 지금은 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준의 동의를 표하자 풍존자는 철검존자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철검존자가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휘둘러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물체 몇 개를 주위로 날려 보냈다.
“이건 고급레벨 마수들의 대변이다. 이게 있으면 마수들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지. 모두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다시 출발하세.”
이준은 애써 답답한 가슴을 달래며 커다란 나무 둥치 아래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길을 찾지 못하니, 답답한 나머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풍존의 말을 따르는 것만이 스승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