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용의 각인
“됐어. 그보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영진 형님은?”
“연금탑 밖에 있어. 여긴 못 들어와.”
보람이 창문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말했다.
“됐다니. 그게 연금세계에서 널 구해준 은인에게 할 소리야? 그때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어. 이런 은혜도 모르는 것 같으니.”
그녀의 말에 이준과 아라는 모두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이 계집애, 역시 귀엽다.
“그리고 내 도움이 없으면 넌 절대 별의 불꽃을 가져오지 못할 거야, 장담해.”
하지만 이어지는 보람의 말에 이준의 얼굴이 곧바로 돌처럼 굳어졌다.
“무슨 뜻이야?”
“허, 너 설마 별의 불꽃을 그렇게 쉽게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연금탑의 세 수장이 왜 별의 불꽃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 설마 그 세 사람의 실력이 너만 못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보람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지금 별의 불꽃은 이미 지성을 가지고 있어서 손에 넣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닐걸? 구름 불꽃 때와는 완전히 이야기가 다르다고.”
“네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데? 정말 날 도와줄 수 있어?”
별의 불꽃과 관련된 이야기에 이준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확실히 별의 불꽃은 구름 불꽃이나 대지의 불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불꽃이었다. 또, 연금탑의 세 수장 역시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 불꽃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이준의 진지한 태도에 보람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가슴팍을 탕탕 두드렸다.
“흠흠, 좋아. 그럼 앞으로도 이 몸에게 요리를 만들어줄 거지?”
그녀의 제안에 이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의 불꽃을 손에 넣게 도와주는 조건이 요리라니……. 다른 연금술사들이 들었다면 입에 게거품을 물만한 거래 조건이었다.
“그래, 그래, 알겠어. 말만 해.”
“헤헤.”
보람이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힘을 주자,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자주색 섬광이 터져나와 빠르게 용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자주색 용은 그저 허상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네가 별의 구역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고 아라 언니에게 들었어. 네가 봤던 별의 불꽃이 이렇게 생겼었지?”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주색 용은 별의 불꽃의 완벽한 축소판이었다. 하지만, 보람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보람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준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봉황 마수의 맞수가 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결계를 무시할 수 있는 신통력, 자유롭게 서로 다른 공간을 오갈 수 있는 놀라운 능력까지……. 이런 신비하고도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는 모든 마수의 왕이라는 용족 뿐이었다.
하지만 별의 불꽃이 용족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이준의 어두워진 표정을 본 보람은 손을 휘저어 자주색 용을 없애버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별의 불꽃은 너무 거칠어서 강제로 잡으려 한다면 너는 물론이고 연금탑의 세 수장도 험한 꼴을 당하게 될걸? 게다가 이미 영성을 갖추고 있으니 더욱 골치가 아프겠지.”
보람의 물음에 이준은 무거운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별의 불꽃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불사의 불꽃이라는 별칭대로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탓에 현공자 같은 절대 강자마저도 두 손을 들어버린 막강한 화염이었다. 확실히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물건을 어떻게 손에 넣으라고 상품으로 내거는 거야?”
이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어차피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고,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 반드시 재앙이 될 테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불꽃을 굴복시킬 사람을 찾는 거지.”
“그런데 너한테는 방법이 있다 이거지?”
이준의 질문에 보람은 또다시 웃음을 지으며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헤헤. 왜 별의 불꽃이 용의 모양을 하고 있는 줄 알아?”
“글쎄…….”
생각해보니 한 번도 별의 불꽃이 왜 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별의 불꽃은 우리 가문에서 길렀었거든.”
보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은 짤막한 한마디에 너무 놀란 나머지 이준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뭐라고?”
“아주 아주 옛날에, 음, 별의 불꽃이 아직 영성을 갖기 전에 용족의 한 선조가 별의 불꽃을 손에 넣었거든. 그때는 너무 작아서 아무런 힘도 없었지. 그래서 그 선조는 별의 불꽃에 용의 각인을 새겨뒀거든. 그래서 별의 불꽃이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별의 불꽃에 용족의 각인이 있다니…….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만약 그 선조가 아직 살아있다면 별의 불꽃의 주인은 그 사람이겠지.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수천 년 전에 행방이 묘연해졌거든. 죽었겠지 뭐.”
“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창백해졌던 이준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았다. 만일 용의 각인을 새긴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별의 불꽃을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헤, 어찌됐든, 그 사람이 용의 각인을 남겨준 것에 감사하게 생각해. 그렇지 않았다면 너에게는 기회도 없었을 거야.”
말을 마친 보람은 곧바로 작은 옥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옥병 안에는 황토색 의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그 안에서 은은하게 용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이준이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상고시대 용의 피야. 자, 손을 내밀어봐.”
“왜?”
보람의 지시에 이준은 의심스럽다는 듯 머뭇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네 손 위에 용의 각인을 새길 거야.”
보람이 조심스럽게 옥병 안에 든 황토색 피를 이준의 손에 떨어뜨린 뒤 인결을 바꾸자, 황토색 피가 기이한 문양으로 변해 이준의 손바닥 위에 새겨졌다.
“이게 있으면 별의 불꽃을 잡을 수 있다는 거야?”
이준이 손에 나타난 기이한 문양을 바라보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걸 갖고 있다가 별의 구역에 들어가서 이 피를 별의 불꽃의 이마에 떨어뜨리면 몸속에 숨겨져 있는 용의 각인이 활성화될 거야.”
보람이 자주색 말총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별의 불꽃이 다른 녀석들에게 꽤 많이 힘을 빼고 났을 때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아지니까.”
“만약 실패하면?”
“어…… 실패하면…….”
그의 말에 보람은 곤란하다는 듯 샐쭉 입술을 내밀었다.
“만약 네가 성공하게 된다면 네가 별의 불꽃을 조종할 수 있게 되지만, 실패하게 되면 그 녀석이 널 조종하게 될 거야.”
보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몰라. 그냥 그렇대.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별의 불꽃을 손에 넣을 수 없을걸? 괜히 불사의 불꽃이겠어?”
잠시 고민하던 이준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옥병을 건네받았다.
“알겠어. 이 정도 위험도 없이 별의 불꽃을 손에 넣을 수는 없겠지.”
“걱정 마. 너의 손에 있는 그 용의 각인은 내가 잠든 우리 가문 장로의 몸에서 몰래 훔쳐온 거라 엄청 귀한 거야. 그리고 용의 각인의 등급도 그때 그 선배가 사용했던 것보다 더 높은 거고. 그러니까 놈이 힘이 빠졌을 때 사용하면 반드시 그 녀석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야.”
잠든 장로의 몸에서 각인을 훔쳐 왔다는 말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체 얼마나 겁이 없으면 용족 장로의 몸에서 각인을 훔쳐올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알았어. 이번엔 널 믿어볼게.”
옥병을 저장 반지 안에 넣은 이준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라의 어깨를 천천히 두드려 주었다.
“걱정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이준의 말에 아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목숨을 걸고 이곳에 온 것은 오직 하나, 별의 불꽃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이틀 뒤, 조금 잠잠해졌던 연금성이 다시 떠들썩해지기 시작하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연금탑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오늘은 바로 연금대회 10위권 안에 든 자들이 별의 불꽃을 손에 넣기 위해 별의 구역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연금탑 밖은 해가 뜨기 무섭게 인산인해를 이뤄 이미 거리 곳곳이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었다.
눈부신 태양이 중천에 다다를 무렵, 연금탑 꼭대기에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별의 구역에 들어갈 자들은 이제 준비를 마치시오.”
현공자가 하늘에서 아래를 굽어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십여 개의 그림자가 연금탑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공자와 두 우두머리는 어느새 대열에 끼어있는 모골을 발견하고는 섬뜩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정당하게 별의 구역에 들어갈 권리를 손에 넣은 그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잠시 말없이 모골을 노려보던 현공자는 나머지 두 수장과 시선을 교환한 뒤 두 손을 움직여 인을 맺었고, 현이와 진태자 역시 말없이 인을 맺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허공에 격렬한 파동이 일어나며 눈부신 빛을 쏟아내는 공간 통로가 솟아났다.
은빛의 공간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현공자는 손을 들어 자신의 뒤에 서있던 새하얀 옷을 입은 장로 하나를 가리켰다.
“대장로가 자네들을 별의 구역으로 데리고 들어가 줄 것이네.”
“나는 이번에 자네들을 이끌고 별의 구역으로 들어가게 된 연금탑 대장로, 구웅길이라고 하오. 별의 구역에 들어간 후에는 반드시 내 뒤를 따라다니시오. 만약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즉시 별의 구역에서 쫓겨날 것이니 주의하도록 하시오.”
말을 하는 내내 구웅길의 시선은 모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대장로의 시선을 느낀 모골은 적대감을 숨길 마음조차 없다는 듯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대장로가 설명을 하는 사이 격렬한 파동이 일던 은색 공간 통로가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갑시다.”
공간 통로가 안정된 듯하자 구웅길은 세 수장과 눈빛을 교환한 뒤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대장로가 공간 통로 안으로 들어간 뒤 나머지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은빛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사람까지 남김없이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현공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준비는 다 되었는가?”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즉시 우리 연금탑의 강자들이 별의 구역 안으로 투입될 걸세.”
진태자가 말했다.
“연금탑과 가까운 강자들도 불러두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현공자는 현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잘 풀려야 할 텐데…….”
* * *
한편, 별의 구역에 들어간 이준은 몸속에 있는 청연의 불꽃이 미친 듯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천지의 불꽃이 다른 천지의 불꽃을 만났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역시 별의 불꽃이 있는 곳이구나.’
고개를 돌려보니 모골 역시 별의 불꽃의 기운을 느낀 듯 탐욕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모골에게서 시선을 뗀 이준은 말없이 별의 구역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는 의도치 않게 별의 구역과 접촉한 것인지라 이곳을 제대로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별의 구역은 연금탑의 세 수장이 공간을 분열시켜 만든 곳으로, 제대로 된 이공간은 아닌지라 연금 세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황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