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오색비뢰
세 가지 색의 화염에 둘러싸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금비약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마냥 부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대로 아까운 8레벨 연금비약이 불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을 때, 돌연 옥처럼 매끈했던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변하며 신비한 기운을 가득 머금은 안개가 화염을 뚫고 새어나왔다.
이준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점점 메말라가는 연금비약을 바라보다가 그 안에 있던 영기가 모두 빠져나오는 순간 저장 반지 안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가루를 꺼내 화염 위에 그것을 흩뿌렸다.
곧이어 이준의 몸에서 폭발적인 영혼의 힘이 터져 나오더니 신비한 가루에 담긴 기이한 에너지가 연금비약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손톱만한 연금비약 위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이 빽빽하게 생겨나 있었으며, 화염에 의해 더욱 잘게 부서진 가루가 그 구멍을 통해 연금비약 안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가루가 연금비약 안으로 흡수되자, 이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연금비약을 둘러싸고 있던 세 가지 색의 화염을 거두어 들었다.
신비한 가루 안에 담긴 영기를 남김없이 흡수한 연금비약의 표면은 다시 옥처럼 매끄럽게 변해 있었으며, 이전보다 더 강한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높은 하늘 위에 떠있던 삼색의 구름이 다시 한 번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비뢰운이 변하고 있어!”
광장에 서있던 누군가의 외침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준의 머리 위에 떠있던 삼색의 구름에 집중되었다. 삼색의 구름은 소용돌이치듯 일렁이며 계속해서 번개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안에서는 느껴지는 에너지 역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후…….”
멀리 떨어져 있는 석대 위에서는 조영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말 성공하다니…….”
높은 석대 위에 있던 현공자 역시 넋을 놓은 채 이준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약선 그 영감, 이렇게 훌륭한 제자를 얻다니……. 정말 부럽구려.”
“상황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어요. 이준이 정말 성공한다면 이번 연금대회는 바로 이준이 주인공이 될 겁니다. 호호, 저 영감 또 그때처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긴장된 눈빛으로 번개구름을 주시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기뻐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모골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미 완성된 연금비약의 영기를 상승시키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모골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저 나이에 이 정도 경지에 오른 연금술사라면, 언젠가 반드시 영혼의 궁전에 큰 해악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으로 이렇게 많은 강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에 이준을 죽일 수는 없었다. 이에 그는 애써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살의를 억누르며 하늘에서 요동치고 있는 번개 구름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 하늘에 흩어져 있는 번개구름 중 가장 큰 구름은 바로 모골의 사색비뢰운, 아직 변화중인 이준의 삼색비뢰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이준의 구름에서 서서히 옅은 금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타났다, 네 번째 색깔이 나타났다.”
옅은 금색 빛이 점점 더 또렷한 색채를 띠자, 광장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삼색 비뢰운이 사색 비뢰운이 되었음에도 이준의 구름은 아직도 힘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건…….”
아직도 변화가 끝나지 않은 듯한 번개 구름의 모습에 사람들의 눈에는 점점 더 기대감이 차올랐다. 만일 이준의 번개 구름에 또 다른 색이 나타나게 된다면, 이번 연금대회의 우승자 자리는 모골에서 이준으로 바뀔지도 몰랐다.
꿀꺽-.
고개를 치켜든 사람들의 목울대가 들썩거리며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골의 마음속에서 불안한 기운이 솟아나던 그때, 드높은 하늘에서 뇌성이 울려 퍼졌다.
“안 돼!”
그 순간, 모골의 목구멍에서 단말마의 비명과도 같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곧이어 요동치던 번개구름이 서서히 멈추며 자주색 섬광이 빠르게 번개 구름을 타고 퍼져 나갔다.
와아아-!
그 순간, 광장에 서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연금성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색비뢰!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오색 비뢰의 등장에 사람들은 이번 대회의 우승자가 결정됐음을 직감했다.
이미 승자가 결정된 줄 알았던 이 승부를 20살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청년이 뒤집을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늘 이후, 이준의 이름은 중주 전체에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다섯 색의 번개가 내리치는 순간 이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8레벨 연금비약을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영기상승술까지 사용했으니 영혼의 힘이 바닥나 제자리에 서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까드득-.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하늘 위에 나타난 번개구름을 바라보던 모골은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쥔 채 이준을 노려봤다. 그의 입장에서는 손에 쥔 먹이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당장 이준을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후우……후우…….”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이준을 바라보는 모골의 눈빛에서 점점 더 짙은 살기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높은 석대에 앉아있던 현공자의 싸늘한 표정을 보는 순간,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준을 공격했다가는 그 즉시 현공자의 손에 시체가 될 것이 뻔했다.
“꼬맹아, 앞으로 나와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늘에 비는 것이 좋을 게다.”
원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던 모골이 싸늘한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모골의 목소리에 이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조롱 섞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기대하지.”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손 안에 들어왔던 먹이를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새파란 애송이에게 조롱을 당하자, 노인의 마음 속에서는 또 다시 감출 수 없는 살의가 피어올랐다.
모골은 중주에서도 상당히 오랜 기간 명성을 날린 연금술사였다. 그와 비교하자면 이준은 핏덩이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새카만 후배였다. 그런 후배에게 수만 명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으니, 그의 생에 이보다 더 큰 굴욕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지만 모골은 그 살기를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현공자가 보는 앞에서 함부로 손을 썼다가는 자신이 시체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준, 연금대회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 뭐 그리 득의양양한 것이냐. 이 오색 비뢰를 네 힘으로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꿈 깨거라!”
애써 분을 삭힌 모골이 하늘 위에 떠있는 비뢰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의 연금비약으로 인해 형성된 비뢰를 받는 것 역시 연금대회의 중요한 심사 항목 중 하나였다. 7레벨 이상의 고급 연금비약을 만들었다 해도 비뢰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애써 만든 연금비약이 그대로 재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뢰로부터 연금비약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연금비약 제조의 진정한 마무리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연금비약의 품질이 상승하면 비뢰의 힘도 그만큼 강해졌고, 오색비뢰쯤 되면 투존이라 해도 얕볼 수 없는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모골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준이 오색비뢰로부터 자신의 연금비약을 지켜내지 못 하는 것 하나 뿐이었다.
모골의 차가운 웃음소리에 광장이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상대가 자신보다 훌륭한 연금비약을 만들어 냈다고 해서 벼락에 맞아 그 연금비약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모골의 태도는 졸렬하기 짝이 없었지만, 투종 정도의 실력으로는 오색 비뢰를 받아내는 것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대회가 아니라면 연금비약이 완성되는 순간 주위에서 기다리던 강자들이 비뢰를 막아줄 것이니 더 뛰어난 연금비약을 만든 자가 곧 승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금대회에서는 비뢰를 막아내는 것 역시 연금술사 본인의 몫 이었다.
“흥, 저열한 노인네 같으니.”
멀리서 모골의 말을 듣고 있던 조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언사가 아무리 치졸하다 해도 규칙은 규칙이니, 이준이 스스로 비뢰를 막아내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준은 오색비뢰를 보고 걱정을 하기는커녕 진귀한 보물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해맑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화려한 번개가 허공을 길게 가르자, 하늘이 대낮같이 번쩍였다. 모골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듯 오색 비뢰의 위력은 확실히 공포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만일 하늘 요괴 같이 번개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요괴가 없었다면 이준 역시 제법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오색 비뢰는 요괴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훌륭한 먹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준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손가락에 끼워진 저장 반지가 번쩍이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은색 그림자가 튀어 나왔다.
연금세계 안에서 모골의 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하늘 요괴는 큰 부상을 입었고, 강철보다 단단했던 피부는 모두 찢겨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은빛 요괴의 모습에 잠시 놀라던 관객들은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다 망가진 요괴로 어떻게 저 공포스러운 오색 비뢰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모골 역시 이준이 소환한 하늘요괴를 보고 잠시 멈칫하다가는 이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주먹 한 방도 견디지 못 하는 요괴가 어떻게 오색 비뢰를 받아낸단 말인가?
모골은 이 은색 요괴가 8, 9성 투종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정도 등급이라면 낮은 등급의 요괴는 아니었지만, 오색 비뢰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리석은 짓을 하는군.”
모골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비웃었지만, 이준은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준은 손으로 하늘 요괴의 몸을 살짝 만져보았다. 모골과의 전투로 상당히 망가져 있었지만, 요괴는 지력이나 통각기관이 발달해있지 않아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존재였다.
“너에게 맡길게.”
손으로 요괴의 몸을 살짝 두드린 이준은 씩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에서 포효하고 있는 오색 비뢰를 가리켰다.
“와라!”
거대한 번개 구름은 마치 이준의 도발을 들은 것 마냥 더욱 격렬하게 요동치며 연달아 오색의 번개를 내뿜었다.
치익!
오색의 번개가 거대한 용처럼 구름을 뚫고 나와 공간을 가르며 석대 위로 내리치는 순간, 망가진 하늘 요괴가 망설임 없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 무시무시한 번개에 맞섰다.
“에휴…….”
그 순간 광장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큭큭…….”
모골은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번개에 부딪혔던 하늘요괴가 망가지기는커녕 번개와 만나는 순간 움푹 파인 가슴이 점점 회복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요괴, 번개의 힘을 흡수하고 있는 거야?!”
점점 더 밝게 반짝이는 하늘 요괴를 본 모골의 동공이 빠르게 수축되기 시작했다.
“저 녀석,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던게 다 이 요괴 때문이었구나! 연금 세계에서 저 요괴를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후회하고 있는 모골과 반대로 조영 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신기한 요괴가 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요괴가 비뢰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비뢰만 잘 막아낸다면 연금대회의 우승자 자리는 이준의 것이 될 것이 분명했다.
“허허, 갖고 있는 게 꽤 많군요. 번개의 힘을 흡수하는 요괴라니, 상고 시대 유적지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높은 석대 위에 있던 중년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공자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우리 연금탑이 저 젊은 친구에게 신세를 졌구려.”
그의 말에 중년의 여인과 까무잡잡한 노인 역시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이준이 아니었다면 이번 연금대회 우승자의 자리는 모골에게 넘어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연금탑 입장에서는 영혼의 궁전에 별의 불꽃을 내어줘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