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화. 연금비약 제련
하늘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던 이준은 차분히 자신의 석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서성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석대를 고르는 과정에서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고르고 난 후에야 허공을 밟으며 가장사람이 적은 석대로 향했다.
이준이 고른 석대는 2, 3미터 정도 되는 크기로 크지는 않았지만 혼자 사용하기에는 충분했다.
석대에 자리를 잡은 이준은 양반다리로 앉아 주변을 둘러보다 먼 곳에 있는 조영, 단선, 송청을 발견했다. 그들 역시 이준처럼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널따란 석대보단 가장자리 쪽에 있는 조용한 석대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또다시 시선을 돌려보니 세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 모골 노인이 검은 옷을 입은 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기운을 완벽히 감춘 모골의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연금세계에서 만났던 그는 숨김없이 투존 강자의 기운을 뿌려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자가 투존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저자는 틀림없이 아주 오래전에 8레벨 연금술사가 되어 있었을 거야. 아마 이곳에 있는 참가자들 중에서도 저자의 상대가 될 만한 자는 많지 않겠지……. 하지만 저자에게 별의 불꽃을 넘겼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이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역시 연금세계 안에서 8레벨 연금술사가 되는데 성공했지만, 모골과 비교하자면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는 스승님과 비슷한 연배의 강자였으니 그 실력 역시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별의 불꽃을 넘길 수는 없었다.
이준이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소란스럽던 하늘이 잠잠해지며 모든 참가자들이 각자 준비한 약재와 약솥을 올려놓으며 제련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댕!
그 순간, 긴 종소리가 하늘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시간이 되었소. 모든 참가자들은 연금비약 제련을 시작하시오!”
텅! 텅! 텅!
현공자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약솥들이 석대 위에 떨어지며 맑은 금속성이 하늘 위에 울려 퍼졌다.
대부분의 연금술사들이 모두 약솥을 소환하고 나니 하늘 위에 다시 치이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오색찬란한 각종 화염이 솟아나며 하늘 전체를 알록달록 물들였다.
하지만 이준은 조용히 석대 위에 앉아 제련을 시작하지 않고 얌전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 연금대회에서 그가 제련하려는 연금비약은 미리 약재를 모두 준비 해뒀던 생골의 영약이었다. 7레벨 최고급 연금비약인 생골의 영약을 완벽히 제련해낸다면 8레벨이 될 수 있는 확률도 없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충분히 상위권에 들 수 있었다.
이준이 눈을 감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동안 조영을 비롯한 다른 우승 후보들 역시 곧바로 제련에 들어가지 않고 한참 동안 정신을 집중하고 나서야 약솥을 꺼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조영은 약솥을 소환한 뒤 손가락을 튕겼고, 곧이어 눈이 따가울 정도로 새빨간 화염이 그녀의 손에서 솟아올랐다.
진홍색을 띠는 화염은 새빨간 피처럼 아주 짙었고, 화염이 솟아오르는 순간 화염의 정령 같은 작은 그림자가 주위에 일렁거렸다.
진홍빛의 화염이 나타나는 순간 주변에 있던 연금술사들의 약솥 안에 들어있는 화염에서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황한 연금술사들은 황급히 정신을 집중해 화염을 제어하며 놀란 눈으로 조영을 바라보았다.
“이건……. 마녀의 화염?”
갑자기 나타난 파동에 이준 역시 당황한 듯 불꽃을 제어하며 조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피어난 기이한 핏빛 화염을 발견하는 순간, 이준 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준 역시 조영이 소환한 신기한 화염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약로가 남긴 고적에서 봤던 이 ‘마녀의 화염’은 사실 악마의 불꽃과 유사한 인조 화염으로, 불속성 마수 천 마리의 피를 모은 이후 그 안에 들어있는 불속성 에너지의 정수만을 추출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준이 가진 천지의 화염보다 더 독특한 불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마녀의 화염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고적에서 본 바에 따르면 불꽃의 힘은 화염 속에 비치는 그림자의 형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었다.
지금 조영의 화염 속에 비치고 있는 것은 인간의 형상에 가까웠는데, 그가 알기로 인간 형상에 가까운 그림자를 가진 마녀의 불꽃은 악마의 불꽃보다도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위력이 강한만큼 마녀의 화염을 만들어내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일단 불속성 마수 천 마리의 피를 모으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조씨 가문은 재력이 튼튼하니 저런 물건도 만들어낼 수 있는 거겠지.’
이준은 마음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녀의 화염을 가진 이상 조영의 연금비약 역시 자신의 것 못지않은 물건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곧이어 먼 곳에 있던 송청과 단선 역시 그녀의 뒤를 이어 각자 약솥을 꺼내고 화염을 불러냈다. 그들의 화염은 모두 조영이 가지고 있는 마녀의 화염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마수의 불꽃 중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불꽃이었다.
치익!
이준이 두 사람에게 막 시선을 거두려던 그때, 청연의 불꽃이 돌연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는 오로지 천지의 불꽃이 또 다른 천지의 불꽃을 만났을 때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모골의 손에서 남색에 가까운 진청색의 화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펑!
바다의 불꽃이 나타나는 순간, 모골 노인과 가장 가까이 있던 몇몇 연금술사들의 표정이 빠르게 변하더니 그들의 약솥 안에 있던 화염이 돌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해 버렸다.
“천지의 불꽃!?”
그 순간, 광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놀란 듯 탄성을 내뱉었다.
재수 없이 당해버린 녀석들을 본 모골 노인은 차갑게 웃으며 진청색의 화염을 뱀의 형상으로 바꾸었다.
바다의 불꽃으로 만들어진 불꽃 뱀은 위풍당당하게 노인의 주위를 맴돌았고, 다른 불꽃들은 모두 바다의 불꽃에 절을 하듯 일렁이며 주인의 통제를 벗어났다.
이를 지켜보던 이준이 가볍게 손에 힘을 주자, 청록색의 화염이 번개처럼 터져 나와 용의 형상으로 변화하더니 바다의 불꽃을 향해 포효했다.
펑!
용의 울음소리가 허공 위에 울려 퍼지는 순간, 위풍당당하던 불꽃 뱀이 주인의 손안으로 허겁지겁 모여들었다.
이준의 몸에서 피어오른 청록색의 화염에 광장에서는 더욱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남색의 불꽃이 겁에 질린 듯 달아나는 것을 보니 청록색 화염의 힘이 더 강한 것이 틀림없었다.
높은 석대 위에 있던 세 우두머리 역시 놀란 눈으로 이준이 소환한 청록색 불의 용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현공자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 흑색 옷을 입은 자의 불꽃은 15위의 바다의 불꽃일 테고, 이준의 청록색 화염은 그보다 순위가 더 높은 것 같은데 왜 낯선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겠소.”
“그러게요. 15위 안에 드는 불꽃 중에 저것과 비슷한 색을 가진 불꽃은 있지만, 저건 분명히 다른 불꽃이네요.”
중년의 여인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혹시 새로 찾은 이화 아닐까요?”
끝없이 넓은 천지에는 신비한 것들이 무수히 널려있지만, 천지의 불꽃은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천지의 불꽃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확실히 이상하군요, 저 화염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대지의 불꽃과 비슷한데……. 대지의 불꽃이라면 바다의 불꽃보다는 한참 뒤떨어지는 불꽃일 텐데…….”
피부가 까무잡잡한 노인 역시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허허, 이번 대회가 점점 재미있어지고 있소. 천지의 불꽃간의 대결이라니.”
현공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중년의 여인과 까무잡잡한 노인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허!”
모골은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남색 화염을 흘겨본 뒤 손가락을 튕겨 남색의 화염을 약솥 안으로 던져 넣었다.
지금은 이준을 상대할 시간이 없으니, 우선 임무를 마치고 저 성가신 녀석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모골이 본격적인 제련에 들어가자, 이준 역시 자신의 약솥을 꺼낸 뒤 청록색의 화염을 약솥 안으로 던져 넣었다.
약솥이 충분히 달구어진 것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저장 반지에서 백여 개에 달하는 약재들을 허공에 띄웠다.
부재료들을 꺼낸 이준이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자 세 개의 옥함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옥함 안에는 바로 생골의 영약을 만드는 데 빠져서는 안 될 약재 세 가지가 들어있었다.
생골의 영약은 이준이 지금까지 제련한 연금비약 중 가장 높은 레벨의 연금비약으로, 아주 작은 실수가 바로 실패로 돌아갈 만큼 제련 난이도가 높았다.
“후…….”
이준은 깊은 숨을 내쉬며 정신을 집중시킨 뒤 가볍게 손을 휘둘렀고, 이내 주위에 떠다니던 수많은 약재들이 몇 갈래로 나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약솥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약솥 안에 들어간 약재들은 천지의 불꽃의 공포스러운 온도에 의해 삽시간에 가루로 변했고, 이준의 손길에 따라 약솥의 구석에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첫 번째 단계를 끝마친 이준은 8레벨 연금술사가 되면서 생긴 변화를 느꼈다.
지금 그는 아주 조금만 정신을 집중해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손쉽게 약재의 가장 순수한 성분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단순히 불태우기만 한 재료 안에도 영기가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이렇게 영기를 머금은 재료로 만든 연금비약이라면 동일한 연금비약이라도 훨씬 더 효과가 높을 것 같았다.
불과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백 가지도 넘는 약재의 3분의 1이 모두 제련에 필요한 가루와 액체로 변화했다.
하지만 진짜 큰 고비는 생골의 영약에 들어가는 세 개의 핵심 재료를 제련하는 일이었기에 이준은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제련을 이어나갔다.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옥함의 뚜껑이 날아가면서 청록색의 넝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생기가 끊임없이 퍼져 나오고 있는 이것은 바로 생골의 영약 필수 재료 중 하나인 만년청의 넝쿨이었다.
푸른 넝쿨을 바라보던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휘둘러 약재를 약솥 안에 넣고 정신을 집중해 화염을 조종했다.
그러나 만년청의 넝쿨은 다른 약재와는 달리 쉽사리 가루로 변하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면 약재 안에서 옅은 빛이 퍼져 나와 화염을 차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진정한 보물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크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에 이준은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제련을 계속해 나갔다.
만년청의 넝쿨은 반나절 가까이 지나서야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고, 비취색의 액체가 갈라진 틈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만년청의 넝쿨이 갈라지고 난 후로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1시간 정도 더 지나고 나니 넝쿨은 비취색의 액체로 변화했고,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약솥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