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화. 약재광장
용웅은 상고시대에 존재했던 전설의 마수로, 곰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몸 안에는 용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고적에 따르면 ‘구문용웅(九紋龍熊)’이라고도 불리는 용웅의 가슴팍에는 그 마수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은색 털이 나있는데, 만일 이 용웅의 가슴팍에 아홉 개의 줄무늬가 그어져 있다면, 그 용웅의 몸에 흐르고 있는 용의 피가 완전히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 영진의 가슴에 있는 줄무늬는 여덟 개 였지만, 줄무늬가 아홉 개가 되면 손가락 하나로 산을 평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용웅을 보게 될 줄이야……믿을 수 없어.”
“그냥 용의 피가 흐르는 용웅일 뿐이야.”
이준이 눈을 반짝이며 감탄사를 내뱉자, 그의 품에 안겨있던 보람이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내밀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너라!”
바로 그 때, 용웅이 거대한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모골을 향해 매섭게 주먹을 휘둘렀다.
십 미터도 넘는 거대한 곰이 팔을 휘두르는 순간, 폭풍이 몰아치며 온 산에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뉘였다.
본 모습을 드러낸 용웅의 일격에 모골 역시 전력을 다해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빠르게 인을 맺자, 눈앞의 공간이 왜곡되며 두꺼운 공간의 벽이 생겨났다.
쾅!
하지만 투존 강자의 공간 벽으로도 전설의 마수 중 하나인 용웅의 주먹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거대한 마수의 주먹이 내리꽂히기 무섭게 두터운 공간벽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고, 곧이어 용웅의 팔 위에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던 털들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8레벨 마수의 염력이 담긴 털화살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고, 털화살을 한발이라도 맞는다면 제 아무리 투존 강자라 해도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모골은 잽싸게 인결을 바꿔 입에서 진청색의 화염을 뿜어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새카만 털 화살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쿵!
모골이 털 화살을 막아내기 무섭게 거대한 곰이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십 미터도 넘는 거대한 용웅의 몸이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들자, 모골은 황급히 바다의 불꽃을 거대한 화염 마수로 변화시켰다.
쾅!
하지만 용웅은 모든 마수들의 공포의 대상인 천지의 불꽃조차 두렵지 않다는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거대한 주먹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용웅의 주먹에 담긴 힘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해 천지의 불꽃으로 만들어 진 화염 마수를 단박에 박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닥에 수십 미터의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이럴 수가…….”
용웅의 주먹을 피해 간신히 달아난 모골의 온몸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실 모골은 전력을 다한다면 본 모습을 드러낸 용웅을 꺾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용웅을 죽이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붓고 나면, 연금술 경연대회 본선은 어쩐단 말인가?
“빌어먹을…….”
모골노인은 이를 꾹 깨물고 매서운 눈빛으로 하늘 위에 떠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차갑게 소리쳤다.
“이준, 정말 운이 좋은 놈이구나! 연금대회가 끝난 뒤 반드시 없애주마!”
“그러시지요.”
노인의 말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들어올렸다.
“허!”
이준의 반응에 모골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준을 죽이기 위해 대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에 그는 용웅과 이준은 번갈아가며 노려보다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돌렸다.
“이준, 기다려라. 네 목숨은 내가 가져갈 것이다.”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공간의 균열속으로 사라졌다.
* * *
왜곡된 공간 안으로 사라진 모골 노인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에 이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생각지도 못하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정말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여야 할 것 같았다.
땅에서 모골 노인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거대한 용웅은 픽 하고 차갑게 웃음을 짓더니 이내 처음에 봤던 건장한 사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영진이 용웅에서 다시 사람의 형태로 돌아오자, 이준이 보람을 안고 하늘에서 내려와 영진을 향해 예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진 형님.”
“야 덩치! 얘는 나와 아주 친한 사람이야. 그리고 너를 형님이라 부른 건 널 아주 좋게 봤다는 거라고. 게다가 얘는 8레벨 연금술사야! 잘 보여서 나쁠 거 없으니까 잘 해주라고! 혹시 알아? 엄청난 연금비약을 선물해줄지?”
보람이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영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이준을 훑어보며 말했다.
“8레벨 연금술사?”
8레벨 연금술사는 영진 같은 8레벨 마수들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강자의 세계는 실력만이 전부였다. 특히 마수들은 인간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잔혹해 실력이 없다면 절대로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이준이 8레벨 연금술사라는 것을 듣는 순간 영진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내가 무슨 8레벨 연금술사야. 아직은 7레벨 고급일 뿐인데, 뭐…….”
이준은 웃으며 숨기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밝혔다.
다른 연금술사들과 달리 겸손하고 솔직한 이준의 태도에 영진은 더욱더 이준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필요한 물건을 얻을 수 있다면 정말로 8레벨 연금술사가 될지도 몰라.”
이준은 영진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올렸다.
“오늘 영진 형님 덕에 목숨을 건졌으니, 8레벨 연금술사가 되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하, 그 말 기억하고 있겠소.”
이준의 예의바른 태도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영진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키다리, 이준이 이번 심사에 통과하려면 구해야 하는 재료가 있대. 그곳에 약재가 많잖아. 가서 이 녀석이 찾는 게 있는지 찾아보자고. 쌓아만 두는 것도 낭비야, 낭비.”
보람은 이준의 소매를 잡은 채 영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빠르게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보람의 뻔뻔한 행동에 영진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 * *
보람의 뒤를 따라 십 여분을 날아가자, 산 정상에 위치한 거대한 석전이 시야에 들어왔다. 석전의 입구에는 흉악한 기운을 내뿜는 마수 두 마리가 서 있었는데, 마수들은 이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가서 놀아.”
하지만 보람이 가볍게 손을 내젓자 흉악하기 그지없어 보이던 두 마수가 낮은 목소리로 끼잉,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꼬리를 내리고 물러났다.
7레벨 마수 두 마리가 얌전히 꼬리를 말고 물러나는 장면에 이준은 보람의 본 모습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녀를 따라 빠르게 석전으로 들어가 복도를 몇 번 지나고나니 넓다란 광장 이 나타났다.
광장 안에 들어가는 순간 진한 약향이 코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광장 한 구석에 진귀한 약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용화심, 적염열매, 불꽃 정령의 씨앗…….”
이준은 넋을 놓은 채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약재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물건들 중 대부분은 바깥에서는 평생 한번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진귀한 약재들이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약재들을 바라보던 이준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울렁이는 마음을 억누른 뒤 보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산맥 전체에 있는 희귀 약재를 모두 여기에 가져다 두는 거야?”
이준의 질문에 보람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곳에서 아무거나 골라봐. 다 가져가도 돼. 키다리가 이곳을 떠나면 어차피 다른 마수들이 가져가게 될텐데 뭐.”
보람의 말에 두 사람 뒤에 서있던 영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곧 이곳을 떠나야 했지만, 열심히 모아온 약재들을 모두 다른 마수들이 가져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필요한 건 다 고르시오. 나는 조금만 있어도 되니.”
영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물건은 모두 형님 것이니 저에게 빌려주시는 걸로 하지요. 어떻게 그냥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에이, 그냥 가져가도 돼! 괜찮아! 맞지?”
순간 영진을 바라보는 보람의 동그란 눈에 기이힌 자줏빛이 반짝였다.
보람과 눈을 마주친 영진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맞소. 작은 아가씨 말대로 필요한 것은 가져가시오! 적게 가져가면 날 속 좁은 사람으로 보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 사양말고 모두 가져가시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약재를 가리키는 영진의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보람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8레벨의 용웅이 이 정도로 절절매는 것을 보니 정말로 대단한 존재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영진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정말 필요한 것들이 있어서요.”
어찌됐든 영진이 허락했으니 이준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약재가 쌓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약재가 워낙 많이 쌓여있다 보니 필요한 약재를 찾는 데만 해도 30분 정도가 걸렸다.
용의 구엽초, 마혈의 영혼과즙, 승선초…….
셋 중에 하나라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던 귀한 보물들을 한 번에 얻게 되었으니 이준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어쩌면 대회 개최 이래 가장 손쉽게 이 임무를 완수한 사람이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세 가지 재료를 저장 반지에 넣은 이준은 다시 광장 안에 쌓인 약재 더미에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총새의 피’라는 특수한 약재였다. 이 약재는 대지의 구슬을 제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약재로, 이 약재만 있다면 대지의 구슬을 완전히 영혼속에 흡수시켜 단숨에 8레벨 연금술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물총새의 피’는 약재인지 돌인지 구분하기도 어렵게 생긴 터라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인 약재 속에서 약재를 찾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준은 정신을 집중한 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영혼의 힘으로 약재 더미 속을 탐색해 보았다.
정신없이 약재를 찾다보니 순식간에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고, 영진은 이미 석전 밖으로 나가고 보람만이 돌계단에 앉아 지루하다는 듯 연신 하품을 해대며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온 정신을 집중해 약재 더미를 뒤적거리던 이준의 발걸음이 마침내 광장 한 구석에 멈춰섰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는 초록빛을 띤 돌이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흙 속에 조용히 파묻혀 있었다.
* * *
초록색 돌은 멀리서 보면 보통 돌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가까이 가면 돌 위에 은은하게 기이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돌의 겉부분은 약간 투명해 빛이 강한 곳에 둔다면 그 안에 점성 액체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초록색 돌을 발견한 이준은 기쁨을 억누르고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몸을 굽혀 아주 조심스럽게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초록색 돌을 손에 쥐었다.
초록색 돌이 손과 맞닿는 순간, 미지근한 감촉이 느껴지면서 돌 안에 들어있는 액체들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총새의 피……”
이준은 손에 들린 초록색 돌을 한참 살피고 나서야 그 물건이 바로 자신이 필요한 마지막 물건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역시 만약산맥이야…….”
물총새의 피를 조심스럽게 저장반지 안에 넣은 이준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물건을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만 할 텐데, 이곳에서는 불과 한 시간 만에 이 진귀한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참을 수 없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