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580화 (580/818)

580화. 보람, 영진

깊은 숲속.

번개처럼 날아가고 있는 이준의 얼굴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등 뒤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날아오는 존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내는 세 사람 중 자신을 첫 번째 사냥감으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온 힘을 다해 날아가도 뒤에서 전해지는 살기가 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낀 이준은 주먹을 움켜쥐며 다시 한 번 염력을 끌어올리며 속도를 높였다.

어느새 우뚝 선 나무들 사이로 산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쉭-

바로 그때, 그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나무 위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술래잡기는 지겹다고 하지 않았느냐.”

검은 옷의 투존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이준, 이번에는 누가 자네를 구하러 올지 궁금하구나. 자네의 천지의 불꽃은 내가 가져가지.”

그 짤막한 한마디에 이준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직감했다.

“역시 모골 당신이었군.”

“허허, 나라는 것을 알고도 감히 내 일을 방해하려 했단 말이냐?”

검은 옷의 사내가 피식 웃으며 답하자, 이준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허허…….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의 사숙(師叔) 뻘 되는 사람이니, 너무 아쉬워 말게. 다른 사람에게 천지의 불꽃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나에게 넘기는 편이 낫지 않겠나.”

모골 노인이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 스승님이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군.”

이준의 짤막한 대답에 모골의 눈동자에는 더욱 서늘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끌끌…….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나보군.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네. 먼저 자네를 죽여 영혼을 빼앗고 나면 자연스럽게 불개도 내 것이 될 것이니까 말이야.”

말을 마친 모골 노인이 주먹을 움켜쥐자, 진청색의 염력이 응집되어 날카로운 갈고리 모양으로 변화했다.

진청색의 갈고리는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고, 곧이어 이준의 눈앞의 공간이 빠르게 왜곡되며 갈고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거대한 발톱이 나타나는 순간 이준의 몸은 이미 저 멀리 있는 공터로 이동해 있었다.

“허!”

이준의 번개 같은 반응 속도에 모골 노인은 차갑게 웃으며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그의 웃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 이준은 주위의 공간이 또다시 감옥처럼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한 이준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갈고리를 바라보며 번개처럼 인을 맺기 시작했다.

‘천계현의 불꽃, 제 1장!’

‘천계현의 불꽃, 제 2장!’

마음속으로 천계현의 불꽃을 두 번 외치는 순간, 이준의 몸에서 염력이 터져 나오며 그를 옥죄던 공감의 힘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천계현의 불꽃, 제 3…….”

음산한 눈빛으로 모골노인을 바라보던 이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인결을 바꿔 모든 힘을 쏟아낼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이준이 인결을 막 완성시키려는 순간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건장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왜곡된 공간에서 빠져나오더니 이내 묵직한 기운이 폭풍처럼 터져 나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내 땅에서 인간 따위가…….”

그 정체불명의 형상이 가볍게 주먹을 쥐자, 모골의 갈고리가 튕겨져 나가며 공간 위에 검은 균열이 생겨났다.

“어디서 온 녀석이냐!”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모골 노인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사내는 모골 노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고, 대신 맑은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그의 질문에 답했다.

“늙은이, 사냥감을 잘못 정했어.”

“보……보람이?!”

귓등을 때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이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사적으로 눈앞에 선 여자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나무 사이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모골 노인은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훑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대한 나무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주색 옷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채 살랑살랑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소녀를 보는 순간 모골 노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금세계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연금대회에 참가한 연금술사들뿐인데, 연금술사도 아닌 이 여자아이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단 말인가?

보라색 옷을 입은 여자 아이는 모골노인의 놀란 표정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폴짝 뛰어내려 이준의 앞으로 달려왔다.

“보람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귀신에 홀린 듯한 이준의 표정을 발견한 보람은 재미있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망 나왔어, 헤헤. 연금대회에 온다는 걸 듣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말을 마친 보람은 곧바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이준을 올려다보았다.

“나 너무 불쌍해……. 나쁜 놈들에게 붙잡힌 뒤로 매일같이 맛없는 것들만 먹고……. 갇혀서 막 고문당하고……. 그래서 기회를 봐서 도망 나왔어…….”

보람의 눈에는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설마……. 너희 가족들이?”

이준은 잠시 멈칫하다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쁜 놈들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보람의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고문을 당한 사람이 몸이 상하기는커녕 더 강해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나마나 아카데미에 있을 때처럼 제멋대로 쏘다니며 말썽을 부리지 못하게 한 것에 불만을 품고 달아난 것이리라.

“에휴, 이제 대화는 끝나셨나요. 작은 아씨? 저 녀석은 제가 상대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그때,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야, 키다리! 넌 왜 그렇게 매사에 불만이 많아? 헛소리하지 말고 저 늙다리를 빨리 없애버리라고!”

하지만 보람은 작은 입술을 삐죽이며 어두운 표정으로 서있는 모골 노인을 가리키며 바락 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보람의 그 말에 사나이와 모골 노인의 표정이 동시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작은 아씨, 정말 제 실력으로는 저 노인을 당할 수 없다니까요.”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보람이 또다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저 덩치만 큰 쓸모없는 놈은 이 만약산맥의 왕인 영진이야. 이곳에 있는 약재는 모두 저 덩치가 관리하고 있어.”

이어지는 보람의 말에 사내는 어울리지 않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간 보람이 간식처럼 주워먹은 피 같은 약재들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만약산맥을 지키는 마수가 저 사람이라고?”

눈앞의 사내가 바로 그 만약산맥의 왕이라는 말에 이준의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커졌다.

“아무 이유 없이 이 산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겠소. 하지만 저자는 내가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놈이니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려.”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골 노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영진은 보람과 노인을 번갈아가며 바라볼 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군.”

그 순간, 모골의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거대한 진청색 주먹이 나타나 영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쾅!

그러나 모골의 염력이 몸에 닿기도 전에 돌연 영진의 몸에서 황금빛 염력이 폭발하며 진청색의 주먹을 막아냈다.

두 강자의 염력이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파동이 번개처럼 백 미터 밖까지 뻗어나가며 거대한 나무들이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이준은 어느새 보람을 품에 안은 채 하늘로 날아올라 두 강자의 대결로 인해 쑥대밭이 된 숲을 벗어나 있었다.

“실력이 정말 대단하네. 송청의 말로는 완전히 투존이 되지는 못했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투종 수준은 아닌 걸…….”

밑을 내려다보던 이준이 놀란 눈으로 낮게 읊조리자, 보람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저 덩치는 벌써 몇 년전에 투존이 됐다고.”

‘역시 송청 그 녀석의 말을 듣지 않길 잘했어. 투존이 되기 직전인 자와 진짜 투존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인데……. 그 놈 말을 듣고 이 영진이라는 자에게 덤볐다가는 모조리 떼죽음을 당했을 거야.’

그녀의 말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송청이 정말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 * *

폭풍이 휩쓸고 간 황무지 위에서는 모골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영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의 화염!”

노인의 입에서 차가운 외침이 터져 나오는 순간, 진청색의 화염이 화산처럼 터져 나와 거대한 주먹으로 흘러들었다.

화염이 거대한 주먹에 흘러들며 황금빛 염력과 맞부딪히며 생겨났던 균열이 빠르게 봉합되더니 더욱 더 세찬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곧이어 모골이 인결을 바꾸자 거대한 주먹이 다시 한번 운석처럼 영진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공간이 붕괴하며 시커먼 구멍이 생겨났다.

“크르릉!”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주먹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순간, 영진의 입에서 마수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더니 그의 몸 위에 새까만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마수의 형상으로 변한 영진이 주먹을 움켜쥐자, 눈부신 황금빛 에너지가 폭발하며 천지를 가득 메웠고, 진청색 화염에 휩싸인 거대한 주먹과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또 한 번 두 절대 강자의 염력이 맞부딪히는 순간, 온 산이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뒤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쾅!

황금색과 진청색의 염력이 서로를 집어삼키자 굉음이 온 천지를 뒤덮으며 대지 위에 거대한 균열이 뻗어나갔다.

갑작스럽게 폭발한 에너지 폭풍의 위력에 산봉우리 위에 살고 있는 고급 마수들은 크게 놀라 산봉우리 밖으로 황급히 뛰쳐나갔다.

두 사람의 대결에서 비롯된 에너지 물결이 확산되며 메말라있던 산의 절반이 전부 폐허로 변했고, 백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구덩이가 생겨났다.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구덩이의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투존 강자다운 무시무시한 파괴력이었다.

이준은 빠르게 아래쪽을 훑어보다 허공 위에 떠있는 모골 노인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모골 노인의 가슴팍이 크게 일렁이는 것을 보니 호흡이 안정적이지 않은 듯 싶었다. 조금 전 공격으로 에너지를 꽤나 많이 소모한 것이 분명했다.

“영진은?”

이준은 빠르게 시선을 돌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안에…….”

손가락으로 깊은 구덩이 속을 가리키는 보람의 생기발랄한 눈에는 신비한 보라색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크르릉!”

보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을 꿰뚫을 듯한 거대한 포효 소리가 깊은 구덩이 속에서 터져 나오며 온 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영진의 포효 소리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에너지에 모골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갔다.

바로 그때, 굉음과 함께 깊은 구덩이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솟아올라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착지했다. 그의 두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산봉우리 전체가 흔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구덩이 속에서 나온 거대한 형체를 본 이준은 홀린 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키가 1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곰이었다.

거대한 곰의 몸을 뒤덮고 있는 시커먼 털은 마치 철로 만들어진 가시처럼 날카로웠고, 곰의 가슴팍에는 칼날처럼 섬뜩한 빛을 내뿜는 은색 털이 가득했다.

이준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거대한 곰의 몸에 달린 꼬리였다. 그 꼬리의 길이는 어림잡아 20미터에 달했으며, 가볍게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온 산 가득 울려 퍼졌다.

“이건……. 용웅이잖아!?”

거대한 곰의 가슴팍에 나있는 은색 털 무늬와 기다란 꼬리를 본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