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화. 투약
향긋한 냄새가 느껴지는 쪽으로 몇 분 정도 날아가자,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시냇물의 흐름을 따라 다시 위쪽으로 걸음을 옮겨보니 십 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바위가 서있었다. 바위 위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했고, 이끼 사이로 주먹만 한 구멍 하나가 나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는 청록색의 끈적한 액체가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시!”
영혼의 점액을 발견한 이준은 잠시 주위를 훑어보며 마수가 없는지를 살폈다. 이 정도 보물이라면 틀림없이 이를 지키고 있는 마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마수의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이 기이한 현상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는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영혼의 점액같이 귀중한 보물이 있는 곳에 마수 한 마리 없다니, 절대로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
이준은 입술을 훑으며 한참을 생각하다 시선을 돌려 거대한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깊이가 족히 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깊은 못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어 보이는 연못의 수면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이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이나 그 못을 바라봤다. 그는 이 연못에 마수가 숨어있을 것이라 확신했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 파란 비늘 하나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손바닥 크기만 한 그 파란 비늘에는 신기하게 생긴 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굽히자, 파란 비늘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라 그에게 날아왔다.
신비한 무늬가 새겨진 파란 비늘에서는 은은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깊은 연못 안에 영혼의 점액을 수호하는 마수가 숨어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준은 사방을 훑다 조용히 몇 미터 뒤로 물러난 뒤 저장반지에서 과일나무 하나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파란색의 과일나무는 크기가 50 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 꼭대기에는 주먹 크기만 한 파란색 열매가 달려있었다. 과일이 모습을 드러내자, 순간 공기가 축축해지며 물 속성의 에너지가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이 과일나무에 열린 과일은 ‘수운과’라는 것으로, 이 수운과 속에는 물속성 마수들이 탐내는 물속성 에너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수운과 안에는 물속성 에너지가 응집되어 만들어진 특수한 액체가 가득했는데, 그 액체에는 7레벨 마수조차 잠들게 할 정도로 강력한 수면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다.
지금 이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수운과 안에 들어있는 그 액체였다.
“에이, 영혼의 점액을 위해서라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지.”
이준은 조심스럽게 수운과가 달린 작은 나무를 땅에 묻은 뒤 잽싸게 먼 곳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하니 마치 예전부터 이곳에서 자라던 나무같이 보였다.
이준이 나무를 묻은 장소는 연못과 조금 거리가 있었다. 놈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 가까운 곳에 나무를 심어서는 안 됐다. 자신과 가까운 곳에 갑자기 이렇게 거대한 에너지를 품은 물체가 나타난다면 놈이 의심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수운목을 묻은 이준은 멀리 떨어져 있는 거대한 나무 위로 올라가 자신의 기운을 감춘 뒤 숨죽인 채 연못 위를 바라봤다.
쏴아-.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거울처럼 잔잔하던 연못의 수면이 천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기어 나오는구나.’
수면이 일렁이는 것을 발견한 이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조금 전 연못 주위에서 발견한 파란색의 비늘은 7레벨 마수인 ‘검은 물범’의 것으로, 지금 이준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놈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7레벨 마수와 싸움을 벌이면 다른 마수들이 몰려올 것이 뻔했으니, 수운과를 이용해 놈을 잠재우고 그 틈에 영혼의 점액을 훔쳐 달아나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 이준의 생각이었다.
촤아아-
수면이 일렁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물보라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연못에서 튀어나왔다.
마수의 크기는 2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몸 전체에 파란 비늘이 가득했다. 하지만 싸움이 벌어진다면 놈은 곧바로 백 미터도 넘는 거대한 괴물로 변해 온 산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검은 물범의 파란 비늘 위에는 마치 호랑이의 가죽 같은 무늬를 가지고 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에서는 끊임없이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수면 위로 올라온 검은 물범은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눈동자로 사방을 끊임없이 두리번거렸다.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던 검은 물범은 열 개가 넘는 기다란 촉수를 움직이다가 이준이 수운목을 묻어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물범은 수운과의 냄새를 맡고도 서두르지 않고 한참이나 주위를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 순간, 놈의 입 안에서 파란빛이 터져 나와 에너지장막으로 변하더니 영혼의 점액이 흘러나오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감쌌다.
영혼의 점액에 보호막을 씌운 검은 물범은 그제서야 조금 안심이 됐는지 꼬리를 휘둘러 허공으로 뛰어오른 뒤 빠르게 산속으로 날아왔다.
검은 물범의 신중한 행동에 이준은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산 안으로 들어간 검은 물범마수는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다 한 외진 곳에서 이준이 묻어둔 수운목을 발견하고는 흥분한 듯 눈을 번쩍였다.
하지만 놈은 보물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냉정을 잃지 않은 듯 몇 번이나 주위를 둘러보다가 천천히 꼬리를 치켜세웠고, 곧이어 놈의 꼬리에서 하늘색의 수막이 천천히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물범의 행동에 놀란 이준은 잽싸게 정신을 집중해 영혼의 힘으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 순간, 수막이 이준의 몸을 뚫고 지나갔지만 다행히도 놈이 이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수막은 백 미터 가까이 확산되고 난 후에야 서서히 옅어지며 물안개가 되어 사라졌고, 탐측을 마친 검은 물범마수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커다란 입을 벌렸다.
그러자 또다시 놈의 입에서 수막이 튀어 나와 수운과를 입 속으로 빨아들였고, 원하던 것을 무사히 손에 넣은 검은 물범은 기분이 좋아진 듯 꼬리를 휘휘 저으며 유유히 연못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있던 이준은 검은 물범이 돌아서는 순간 마음속으로 피식 웃으며 조용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준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수막에 싸여있던 수운과가 서서히 갈라지며 그 안에 있던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체가 흘러나오는 순간 놈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황급히 수운과를 뱉어내려 했지만, 입을 벌리기도 전에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쉬익!
7레벨 마수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이준은 번개처럼 나무 위에서 내려와 거대한 바위 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막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수막이 부서지자, 이준은 빠르게 두 손가락을 구부려 청록색 화염으로 뾰족한 바늘을 만들어 낸 뒤 거대한 바위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위를 파헤친 이준은 곧바로 저장반지에서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옥함을 꺼낸 뒤 그 안에 영혼의 점액을 집어넣고 번개 같은 동작으로 몸을 돌려 먼 산을 향해 달아났다. 수운과의 효력이 강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7레벨 마수라면 길어도 5분 후에는 정신을 차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준이 달아나기 시작한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검은 물범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온 산을 뒤덮었다.
하지만 이미 놈의 시야에서 벗어난 이준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려가며 영혼 에너지로 몸을 감싼 채 더욱 빠른 속도로 산을 벗어났다.
* * *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높이 솟아오른 산봉우리 꼭대기에는 거대한 바위로 지어진 넓은 대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전 밖에는 거대한 마수 두 마리가 몸을 낮춘 채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두 마수의 눈에서 퍼져 나오는 흉악한 기운은 7레벨 마수인 검은 마수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강렬했다.
“작은 아씨, 더 먹으려고요?!”
대전 안에서 귀청을 찌르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진 대전 깊은 곳에는 널따란 광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 광장 안에는 연금술사들이 보면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진귀한 약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수많은 약재들 앞에는 건장한 사내 하나가 우뚝 선채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작달만한 체구를 가진 여자 아이 하나가 진귀해 보이는 약재를 게걸스럽게 씹어 삼키고 있었다.
“소리는 왜 질러! 배불러지면 사람 찾아서 이곳을 벗어날 테니 걱정 마!”
검은 물범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가던 이준은 산 중턱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산 정상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고, 그 안에서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 정상에 숨어들어가 몰래 필요한 재료를 얻어 오는 수밖에 없겠는걸…….”
거대한 나무 위에 서서 얼핏 보이는 거대한 산꼭대기를 바라보던 이준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 아래쪽에서 강렬한 에너지 파동이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에너지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이 정도 에너지 파동이라면 이 산을 지배하고 있다는 그 마수의 왕의 시선을 끌 것이 분명했다.
‘설마 조영 일행인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고민하던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에너지 파동이 전해지는 곳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가 에너지 파동이 느껴지는 장소로 향한 것은 다른 연금술사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정도 소란이라면 이 산맥의 지배자라는 8레벨 마수가 나타날지도 몰랐고, 정말로 놈이 나타난다면 몰래 산 정상으로 올라가 약재를 훔쳐 오리라는 것이 이준의 계획이었다.
정신없이 날아가 목적지에 도착한 이준은 무성한 나뭇잎이 가득한 나무 위로 뛰어 올라 나뭇잎 틈 사이에 몸은 숨긴 채 앞쪽을 바라보았다.
이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움푹 파인 분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분지 안에 백 명 정도의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공간은…….’
순간 이준의 시선이 그들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텅 빈 공간에서 무언가 익숙한 에너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혼 장벽!’
이준의 동공이 순간 격렬하게 흔들렸다. 눈앞에 놓인 것은 틀림없이 모골이라는 노인이 만들었던 그 영혼장벽이었다.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드는데…….’
영혼장벽을 보는 순간 이준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이들을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영혼장벽을 사용할 정도라면 상대는 분명 공포스러운 실력을 가진 강자일 것이다.
‘설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는 건가…….’
* * *
“무슨 생각이십니까? 설마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입니까?”
송청이 흑색 옷의 남자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 그들이 이 분지에 도착했을 때, 검은 옷의 사내가 어디선가 튀어나와 눈 깜짝할 새에 다섯 명의 연금술사를 죽였다.
송청 곁에는 조영이 심각한 표정을 한 채 그 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뛰어난 영혼 탐지력을 가진 그녀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이 검은 옷의 사내가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연금탑의 두 천재님들, 하하. 명성에 어울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군. 하지만 이번 대회의 우승자 자리는 나에게 양보해 주셔야 할 것 같소.”
사내의 태도는 백 명에 가까운 연금술사들에게 포위된 사람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여유가 가득했다.
“어디서 오신 선배님이지요? 이곳에서 우리를 죽인다면 연금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조영이 맑은 눈망울로 검은 옷의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허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모두 죽게 될 터인데, 연금탑에서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겠소?”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주위에 있던 연금술사들은 크게 분노하며 곧바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