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만약산맥(萬藥山脈)
송청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모두 이 산맥을 급하게 뚫고 들어가다 마수들에게 쫓겨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이 만약산맥 안에는 마수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 마수들을 통솔하는 녀석은 이미 7레벨 최고급, 심지어 8레벨에 가까운 마수라고 합니다. 이 마수는 만약산맥의 약재들을 자신의 거처에 쌓아두고 있는데, 그 중에는 우리가 필요한 약재들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송청이 거대한 바위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연금탑의 사람답게 연금세계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송청의 말에 이준 역시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8레벨 마수라면 투존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놈에게서 물건을 빼앗아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이었다.
“그리고 그 만약산맥을 지배하고 있는 마수의 휘하에는 실력이 막강한 마수들이 가득하지요. 투존이 아니고서는 혼자 움직인다면 절대 그들의 손에서 우리가 필요한 물건들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 같이 잠시 동안 연합하여 먼저 그 만약산맥의 왕을 죽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 놈만 처치한다면 나머지 마수들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니까요.”
송청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술렁거림에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마수가 만약산맥을 지키고 있는 한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들을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후, 술렁거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들 역시 바보는 아니었으니 송청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지는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쟁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혼자서는 약재를 찾기는커녕 만약산맥에 들어갈 수조차 없으니 일단은 사람들과 힘을 합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모두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압니다. 협정을 맺읍시다. 그 만약산맥의 왕을 없애기 전에는 모두 동료를 해치지 않기로 말입니다. 만일 이 협정을 어길 시, 나머지 사람들이 연합하여 처리하기로 하는 것,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가 없는 송청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하나 둘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송청이 연금탑에서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었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송청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준은 다른 사람들과 동맹을 맺을지 아닐지에 대해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영도, 송청도, 모두 승부욕이 엄청난 사람들로, 그런 두 사람이 정말로 순순히 사람들을 모아 공동전선을 펼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이준은 두 사람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준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멀지 않은 상공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세 사람 중 가장 선두에 서있는 것은 바로 현명종의 소종주, 진한이었다.
그 순간, 이준의 입꼬리에 서늘한 웃음이 걸렸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진한의 뒤를 따르고 있는 두 명의 노인 역시 이준의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연금술사 경매장에서 진한을 호위하고 있던 현명종의 두 장로였다.
“저 두 노인도 연금술사군.”
진한 뒤에 있는 두 노인을 보며 이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두 사람의 실력은 9성 투종에 가까웠으니 이대로라면 자신의 계획대로 이곳에서 진한을 처리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이준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진한 일행이 천천히 언덕 위에 착지했다.
진한은 땅으로 내려와 주변을 훑다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이준을 발견하곤 이내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준, 운도 참 없는 것 같구나.”
진한이 손가락으로 철부채를 만지자 부채가 탁, 하는 소리를 내며 펴졌다. 부채를 편 진한은 빙긋 웃으며 천천히 이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진한을 바라보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는 두 노인을 발견하고는 씩 웃음을 지었다.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믿고 그렇게 말하는건가?”
“왜? 좋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실력이지.”
진한이 손에 들고 있는 자주색 철부채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가 웃으며 장로들을 흘깃 바라보자, 두 장로가 한 발짝씩 앞으로 걸어 나오며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언덕 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준과 진한에게로 향했지만, 말리기는커녕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듯 은근슬쩍 두 사람과 거리를 벌렸다.
“죽여라!”
그 순간, 진한이 부채를 휘두르며 자신의 뒤에 서있던 두 장로에게 명령을 내렸다.
“예!”
진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의 몸에서 해일과도 같은 염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이준 역시 험악한 표정으로 손끝에서 청록색의 화염을 피워냈다.
“하하, 진한 선생! 진정하시지요!”
하지만 현명종의 두 장로와 이준이 막 맞붙으려는 찰나, 송청이 웃으며 바위에서 내려와 진한을 말렸다.
송청을 발견한 순간, 진한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손을 휘둘러 두 장로를 멈춰 세웠다.
“송청 장로님,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 입니까?”
송청이 웃으며 질문을 던지자, 진한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그렇습니다.”
송청과 조영이라면 연금탑의 차기 수장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으니 제 아무리 현명종의 소종주라 하더라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우와, 당신은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키네요.”
조영이 장난스레 웃으며 이준을 향해 말했다.
“분란은 저 쪽이 일으켰죠.”
“지금 뭐라 했어?”
이준의 말에 진한의 표정이 또 다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조영은 두 사람 중 누구한테 잘못이 있는지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특유의 묘한 웃음을 지으며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둘 다 만약산맥에서 찾아야 하는 재료를 구하러 온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실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8레벨 마수의 손에서 약재를 훔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두 분 모두 잠시 화를 삭이고 일단 힘을 모아 마수부터 처리하죠. 어때요?”
“하하, 영이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옆에 있던 송청 역시 웃으며 조영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이에 진한은 연금탑의 미래를 짊어질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두 사람의 제안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산맥의 일이 끝나고 나면 저 놈과는 반드시 끝을 봐야겠습니다.”
진한이 말을 마치자, 송청이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린 뒤 다시 이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하, 이준 선생도 제 체면을 봐서라도 좀 도움을 주시죠.”
송청의 말에 이준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결국 자신의 계획에 동참하라는 것 아닌가. 그것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됐습니다. 전 모르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건 익숙지 않아서요.”
이준은 그 말만을 남기고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언덕 아래로 걸어갔다.
이준의 너무나도 당돌한 태도에 당황한 송청은 이를 악문채 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준 선생, 정말 너무 하는 것 아니요? 어차피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힘을 합치자는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무안을 줘도 되는 거요?”
옆에 있던 조영 역시 이준의 행동에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힘을 모아 8레벨 마수를 제거하고 약재를 손에 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송청 장로님. 제가 괜히 저 자와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렇게 제 멋대로 구는 것을 가만히 두었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가 마수를 처리하느라 힘이 빠지면 그 때 저희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와는 원한이 있고, 송청 장로님과 조영 아가씨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이니, 그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지요.”
진한의 말에 송청의 얼굴에도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망신을 주다니,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진한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이준이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상대가 그런 짓을 할 마음이 없다 해도, 그의 입장에서는 이준도 경쟁자였다. 그것도 상당히 뛰어난…….
그렇다면 명분이 주어졌을 때 그를 처리해 두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송청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진한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갈등을 중재하려던 그가 이런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암묵적인 동의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에 진한은 피식 웃으며 두 노인을 향해 가볍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진한의 명령이 떨어지자 두 장로는 곧바로 잔영을 남기며 이준의 등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갔다.
“무례한 놈! 어딜 가느냐!”
눈 깜짝할 새에 이준의 등 뒤에 도달한 두 노인은 칼날 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이준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쉭!
하지만 두 사람의 손이 이준의 몸에 막 닿으려는 찰나, 그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잔영?”
당황한 두 노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언덕 위에 서있는 진한을 향해 경고를 보냈다.
“소종주님, 조심하십시오!”
두 사람의 다급한 외침에 진한과 송청의 표정이 모두 살짝 바뀌었다. 설마하니 9성 투종 둘이 이준을 놓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당황한 진한은 곧바로 발을 구르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진한이 뒤로 몸을 날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의 등 뒤 공간이 빠르게 왜곡되며 청록색 화염에 둘러싸인 주먹이 나타났다.
갑자기 솟아나는 뜨끈한 열기에 진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 역시 이런 공격 한번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없지는 않았다.
채앵!
화염 주먹이 철부채를 내리찍는 순간, 맑은 금속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준이 다시 한 번 힘을 주며 염력을 폭발시키자, 진한의 몸이 저만치 뒤로 밀려나며 그의 입에서 단박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한참을 뒤로 밀려나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 멈춰선 진한은 고개를 들어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무시무시한 열기를 뿜어내는 청록색 화염에 휩싸인 그림자 하나가 살기로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방에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진한의 모습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두 명의 9성 투종을 상대로 달아나기는커녕 그들을 따돌린 뒤 진한을 죽이려 달려드는 이준의 대범함이었다.
이준의 이 대범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송청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