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대지의 구슬
“허허, 나는 황익이라 하오. 이미 내 이름을 들어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안 들어봤어도 상관없소. 자네도 투종 강자인 걸 알고 있으니 강제로 뺏을 생각은 없소. 나에게 대지의 구슬을 반만 넘기면 곱게 보내주겠소.”
황색 옷을 입은 노인의 실력은 대략 7성 투종 정도로, 이준보다 무려 3성이나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투종 강자 둘이 이런 곳에서 싸움을 벌였다가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으니 곧바로 이준을 공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상대가 곱게 대지의 구슬을 넘기지 않는다면 그는 언제든지 손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네,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들어봤다 해도 그게 제가 보물을 넘겨야 할 이유가 됩니까?”
말을 마친 이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으며 그의 눈앞에 눈부신 은빛 물체 하나가 솟아나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노인에게 돌진했다.
은빛 요괴가 나타나는 순간,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던 노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은빛 요괴가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번개처럼 황익이라는 노인에게 돌진하는 순간, 폭음이 울리며 바닥에 깊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요괴의 무시무시한 힘에 손쉽게 이준에게서 대지의 구슬을 빼앗을 수 있으리라 믿고 있던 황익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이 녀석이 이렇게 강한 요괴를 데리고 있다니!’
당황한 황익은 빠르게 허공을 밟으며 하늘 요괴와 거리를 벌렸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그의 반응은 실로 정확하고 신속했지만, 요괴의 속도를 당해낼 수 없었다. 요괴가 바닥을 밟을 때마다 대지가 크게 요동치며 균열이 생겨났다.
눈 깜짝할 새에 황익을 따라잡은 요괴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강력한 풍압에 의해 황익의 몸이 휘청거렸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하늘 요괴의 공세에 황익은 빠르게 인을 맺어 시뻘건 화염을 불러냈다.
“화염천하!”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황익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화염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장벽이 요괴의 주먹과 맞부딪혔다.
쾅!
그 순간 귀청이 터져 나갈듯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지면에 있는 흙들이 크게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러나 요괴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화염 장벽의 무시무시한 온도에도 아랑곳 않고 번개처럼 주먹을 내질렀고, 이내 새빨간 화염 장벽이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이미 9성 투종과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하늘 요괴에게 7성에 불과한 황익이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으윽!”
화염 장벽이 박살나는 순간 황익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럴수가……!”
은빛 요괴의 무시무시한 힘에 황익의 등 뒤에서는 끊임없이 식은 땀이 흘러내렸고, 손쉽게 대지의 구슬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들떴던 마음에는 어느새 공포가 가득 들어찼다.
* * *
가까스로 자리에 멈춰 다시 자신에게 몸을 날리려는 요괴를 바라보던 황익이 다급히 손을 들며 외쳤다.
“이보시게, 내가 잘못했다네. 이곳을 떠날 테니 대지의 구슬은 자네가 가져가게!”
황익은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동료들을 불러 이 어린놈의 버릇을 고쳐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이준은 이미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이런…….”
그 순간, 황익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가 이 자리를 곱게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한 순간,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그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이에 황익은 몸을 돌려 황급히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림자는 미꾸라지처럼 그의 공격을 피하고는 그의 가슴팍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컥!”
가슴을 부숴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충격에 황익은 단박에 피를 토하며 수 십 미터나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간신히 자리에 멈춰선 황익은 또 한 번 선혈을 토해낸 뒤 이준을 바라보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악다구니를 써댔다.
“쿨럭……. 어린놈이 보통 독한 것이 아니구나.”
말을 마친 황익이 손가락을 튕기자, 손끝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와 저 멀리 허공으로 날아갔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낸 것 같았다. 게다가 동작 하나 하나가 아주 능숙한 것을 보니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동료들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그럼 동료들이 오기 전에 시체로 만들어 버리는 편이 낫겠군요.”
“이, 이놈이!”
이준의 살기 어린 눈빛에 겁을 집어먹은 황익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이를 악물고 공간석을 꺼내들었다.
공간석을 깨트리는 순간 대회에서 탈락하게 되지만, 이런 상황에서 괜한 고집을 부리다가는 정말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애송이, 내가 네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회가 끝나고 나면 넌 나에게 살려달라고 빌게 될 것이야!”
황익이 손에 힘을 주자 공간석이 부서지며 그의 주위 공간에 빠르게 왜곡되기 시작했다.
‘제길! 들어오자마자 어떻게 저런 포악한 놈을 마주친 거야…….’
다음 순간, 공간에 검은 균열이 생겨나며 황익을 그대로 빨아들였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이준은 후회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익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황익이 사라지자 이준은 하늘 요괴를 회수한 뒤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익이 말한 동료에 대해 이준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설령 마주친다 해도 투존 강자만 아니라면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황익의 실력이나 인품으로 봤을 때 투존 강자가 그와 손을 잡았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친 이준은 연금세계의 지도를 꺼내 붉은 원이 그려진 곳을 천천히 훑어봤다. 연금세계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가급적 빨리 약재를 구해 탈출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부족해도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바로 대지의 구슬을 제련하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얻는 것이었다.
대지의 구슬에 담긴 영기를 제대로 흡수할 수만 있다면 대회에서 우승하는데 큰 도움이 될 테니, 반드시 연금세계 안에서 그 재료들을 구해 영혼의 힘을 성장시켜야 했다.
이준의 첫 번째 목표는 지도에 표시된 ‘만약산맥(萬藥山脈)’이라는 곳이었다.
이 산맥은 빨강 동그라미가 쳐진 곳 중 한 곳으로, 필요한 물건이 이곳에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별 다른 수가 없으니 일단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현재 연금세계는 연금탑이 가진 영역의 삼분의 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크기였지만, 이 작은 곳에 있는 보물들은 대륙에 있는 모든 세력들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연금세계를 가지고 있는 연금탑 안에는 투기대륙 전체를 뒤집어야 간신히 찾을까 말까한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할 것이 분명했다.
이준의 속도로는 이 연금 세계를 지나는데 길어야 하루 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후 무렵에는 이미 만약산맥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맥으로 오는 길에 이준은 제법 많은 수의 참가자들과 마주쳤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이준을 보면 달아나기 바빴고, 시선이 마주치면 잠시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다가 슬금슬금 사라지곤 했다. 아마도 이준이 자신을 공격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는 연금세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의 경쟁자였고, 한 명이 사라지면 자신이 우승자 자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같은 편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가급적 다른 사람들과 싸움을 벌이지 않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눈앞의 상대를 이긴다 해도 부상을 입거나 염력 소모가 크다면 다음에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반드시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준 역시 다른 사람과 무의미한 싸움을 벌여 힘을 빼고 싶지 않았기에 상대방을 못 본 척 지나치며 계속해서 목적지로 이동했다.
산맥으로 가는 동안 이준은 투종 강자들을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들의 실력은 대체로 황익보다 나으면 나았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들 중 대부분이 나이가 전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미 중주에서 제법 명성을 떨친 윗세대 강자들인 듯싶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 갈 길을 가기 바빴다.
도중에 실력이 상당한 마수의 기습 공격을 두 번 당한 것만 빼면 이준은 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 * *
만약산맥(萬藥山脈), 만 가지의 약재가 있다는 뜻을 가진 산맥의 이름만 봐도 이곳의 비범함을 알 수 있었다.
이준은 우뚝 솟은 그 산맥을 봤을 때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산맥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이 무서우리만치 거대했기 때문이다.
산맥은 거대한 용처럼 굽이굽이 뻗어나갔고 산맥 상공에는 짙은 안개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안개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안개가 아니라 농후한 에너지가 밀집되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험악한 산중에서는 포악한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준은 산맥 변방 쪽 허공에서 눈썹을 찌푸린 채 안개에 가려진 산맥을 바라봤다.
아직 산맥에 발을 디디지 않았지만 영혼의 힘을 활용해 산을 훑어보니 함부로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그다지 현명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이 잠시 고민하던 사이, 멀지 않은 곳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가 보니 산맥 바깥 주변에 위치한 작은 구릉에 많은 천막들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이 사람들이 다 연금대회에 참가한 건가?”
이는 상당히 이상한 일 이었다. 다른 곳에 있는 참가자들은 마주치자마자 싸우지 않으면 그저 도망가기 바쁜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째서 이렇게 평화로이 모여 있단 말인가?
이준은 잠시 그 이유를 생각해보다가 몸을 움직여 구릉과 멀지 않은 곳에 내려섰다.
이에 주위에 있던 연금술사들 중 상당수가 이준을 발견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경계하기는커녕 관심조차 없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준은 살짝 의아해하며 천천히 구릉의 중심으로 올라가봤다. 놀랍게도 멀지 않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 곳을 빙 둘러싸고 있었는데, 얼핏 봐도 최소 백 명은 되어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준은 더욱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여러분, 각자 가지고 있는 지도에는 분명 빨간색 동그라미가 쳐져 있을 겁니다. 만약산맥 안에는 분명 여러분이 찾는 재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산맥 안에 있는 물건들은 여러분이 갖고 나오고 싶다고 그대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준이 천천히 그 무리를 향해 다가가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송청?”
거대한 바위 위에서 사람들을 앞에 두고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연금탑의 최연소 장로로 꼽히는 송청이었다.
송청의 곁에는 조영이 검은 옷을 입은 채 멍하니 앉아 지루하다는 듯 새하얀 손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열심히 사람들을 설득하려하는 송청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