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연금세계 입구
진회색빛 공간에 다가서자, 가슴팍에 달려있는 등급휘장에서 기이한 파동이 일어나더니 이준의 몸을 회색 공간 안으로 빨아들였다.
다음 순간, 그의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이내 짙은 회색 빛이 온 시야를 가렸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짙은 회색의 안개뿐이었고, 한치 앞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야가 어두웠다.
침착하게 자리에 서서 두 눈을 감자, 이준의 미간에서 진한 영혼의 힘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회색 기체는 유종길의 말대로 영혼의 힘을 억누르는 성질을 갖고 있었지만, 그 힘에는 한계가 있어 이준 정도의 영혼의 힘을 가진 사람은 평소보다 조금 시야가 좁아졌다고 느낄 뿐, 여전히 주변의 상황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천목산에서 봤던 그 에너지 파동이랑 비슷하네……. 하지만 그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건 사람의 힘으로 공간을 왜곡시켜 만들어낸 미로여서 그런지 훨씬 복잡해…….’
이준의 생각대로, 이 공간은 연금탑 강자가 강한 힘을 사용해 공간을 왜곡시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영혼의 힘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결코 미로를 통과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준처럼 강한 영혼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미로 안에 퍼져있는 영혼의 흔적을 따라 아주 쉽게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쉬익!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많은 경쟁자들이 영혼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떠돌다 왜곡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
* * *
왜곡된 공간은 생각한 것보다 아주 넓었다. 게다가 그 안에 겹겹이 쌓여있는 공간 주름 때문에 마치 미궁에 빠진 것처럼 한 번이라도 길을 잘못 들면 더욱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왜곡된 공간 속에 잘못 발을 들이면 그대로 바깥으로 튕겨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동안 영혼 탐지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다른 사람을 방해하거나 건드리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싸움을 벌였다가 왜곡된 공간에 몸이 닿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바깥으로 튕겨 나갈 것이 뻔했으니, 그저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가장 현명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앞으로 나아가자, 갈수록 미궁이 복잡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때문에 이준은 종종 같은 곳을 여러 바퀴 돌고 나서야 길을 방해하는 공간주름을 벗어날 수 있었다.
* * *
뚜벅뚜벅.
천천히 진회색 안개 위를 걸어가던 이준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공간의 파동이 일렁거리며 나이 든 사람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나이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이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스승님?”
그 익숙한 얼굴은 다름 아닌 영혼의 궁전에 갇혀 있는 약로였다!
약로는 이준과 멀지 않은 곳에서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운 스승의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하지만 두어 걸음 정도 앞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돌연 소용돌이치고 있는 공간의 힘이 느껴졌다.
‘환상이야……!’
이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스승의 형상을 향해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강한 바람이 솟구치며 그대로 스승의 형체를 없애버렸고, 그 뒤에 숨겨져 있던 공간 주름이 나타났다.
“역시 함정이었어.”
함정을 피한 이준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길에서도 이은, 채린, 이한, 진율희 등 그의 깊은 기억 속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환상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이준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교훈삼아 정신을 차리고 어떤 환상이 눈앞에 나타나도 살짝 쳐다보기만 한 뒤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걷자, 눈앞에 가득하던 회색 안개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시커먼 공간 통로 하나가 멀지 않은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 통로 앞에는 널따란 공터가 있었다. 공터 주위가 아주 심하게 뒤틀려있는 것을 보니 연금탑 강자들이 강제적으로 공간을 만들어둔 듯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준은 연금탑이 얼마나 대단한 세력인지를 실감했다. 빙하곡이나 불의 협곡, 풍뢰각 정도 되는 세력들도 이 정도로 공간의 힘을 다룰 수는 없었다.
공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서있거나 앉아 있었다. 이 공터에 도착해 있다는 것은 첫 번째 심사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하나 같이 대단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아주 드문드문 두 세 사람이 모여 앉아 있기도 했다.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던 이준은 조영과 송청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 조영의 시선을 피했다.
조영은 이준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지만,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뒤, 빈공간을 찾아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영이라는 여자는 속을 알 수 없었고,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본선에 올라가면 우승자 자리를 두고 다툴 것인데, 굳이 함께 앉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연금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니, 믿을 수 없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보다는 혼자 움직이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조영과 송청 모두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인물들이니만큼, 그들과 함께 다니며 굳이 자신의 패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이준의 그런 행동에 조영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조영이 뭐라고 생각하든, 이준은 그저 홀로 앉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공간 통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통로 앞에는 평범한 차림새의 노인 하나가 거대한 거북이의 등 뒤에 앉아 있었다.
노인의 가슴팍에 있는 휘장으로 봤을 때 연금탑 사람임은 분명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준의 영혼 탐지능력으로도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으니, 평범한 인물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역시 연금탑에는 대단한 사람들밖에 없네…….’
이준이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그 노인이 돌연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었다.
“연금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소. 이곳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재료표, 그리고 연금세계의 지도와 공간석을 하나씩 나누어 주겠소. 재료표에 적혀있는 것은 이 안에서 반드시 찾아와야 하는 약재로, 약재들을 모두 수집해야만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소. 지도는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을 것이오.
위쪽에 연금세계를 나가는 출구가 있으니 약재를 다 모으면 그곳으로 가시오. 공간석은 위급상황에 사용하시오. 목숨이 걸린 상황에 빠졌을 때 이 공간석을 깨면 연금세계를 빠져나갈 수 있소. 하지만 공간석이 깨지는 순간 기권했다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모두 이해하셨소?”
말을 마친 노인이 천천히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의 말에 모든 사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세계는 이미 파괴된 곳이니,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소. 그러니 10일 안에 재료표에 쓰여 있는 약재들을 구해야만 하오. 약재를 고르는 것은 연금술사의 기본 능력이니 이것까진 가르쳐줄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하오.”
노인은 입을 살짝 삐죽인 뒤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연금세계 안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마수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오. 그곳의 마수들은 실력이 아주 막강한 데다가 누군가 나서 도와줄 일도 없을 테니 만일 만나게 된다면 목숨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설명을 마친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겠소. 마음의 준비가 됐다면 올라와 물건을 받으시오. 지금 기권하고 싶다면 아직 늦지 않았소.”
하지만 그런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이 자리에 온 자들 중 제 목숨하나 건사하지 못할 만큼 약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금탑의 수장 자리와 천지의 불꽃, 영혼 수련법이 걸려 있는 마당에 목숨이 아까워 시작도 해보지 않고 달아날 겁쟁이들이 이런 자리에 올 리도 없었다.
거북이를 타고 있는 노인이 말을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아 연금술사 의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와 물건을 받은 후 회전하는 공간통로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 사내를 시작으로 참가자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물건들을 건네받은 뒤 공간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백 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공간통로로 진입했을 무렵, 조영과 송청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거북이 등에 탄 노인에게 물건을 건네받은 뒤 통로 앞으로 걸어갔다. 통로에 들어가기 직전, 조영은 마치 이준에게 경고를 하듯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영과 송청이 그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준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가 막 움직이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공간에서 파동이 일며 젊은 사내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마지막으로 미로를 뚫고 이곳에 도착한 사람은 모골 노인에게 이준의 정보를 판 ‘진한’이었다.
그는 여전히 새하얀 옷에 자주색 철부채를 들고 있었으며, 가슴팍에는 7레벨 중급 연금술사의 휘장을 달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진한은 연금세계의 입구 앞에 서있는 이준을 보고는 조금 놀란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한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고치고는 공간 통로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이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준이지? 명줄이 이리 두꺼운 줄 몰랐네, 그 자들도 널 죽이지 못한 걸 보면 말이야.”
진한의 말에 이준 역시 지지 않고 서늘한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한 소종주님, 연금세계에서 저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큭큭, 너도 연금세계 안에서 나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을거야.”
그 말을 끝으로 진한은 곧바로 몸을 돌려 물건을 건네받은 뒤 빠르게 공간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연금세계의 대지는 온통 메마른 흙뿐이었고, 드문드문 잡초와 이름 모를 풀꽃들이 피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종종 작은 마수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막한 평원의 하늘이 일그러지며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허공에 위치한 공간 통로에서 튀어 나온 사람은 바로 조금 전 공간통로로 들어간 이준이었다.
그는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평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평원 끝자락에 있는 산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위에 미미하게 광폭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섣불리 바닥에 내려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에 이준은 바닥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허공 위에 떠 있었다.
‘으음……. 원래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곳인걸까 아니면 공간이 붕괴하면서 이렇게 변해버린걸까…….’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투성 수준의 힘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일단 이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다 해도,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공간 통로와 마찬가지로 그 세계는 얼마 가지 않아 붕괴되고 말았다. 아마 이 ‘연금세계’ 역시 오랜 시간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통로에 들어가기 전 거북이를 탄 노인에게서 받은 재료목록이 적힌 양피지가 그의 손 위에 나타났다.
그의 양피지 위에 적힌 약재들은 딱 세 가지 뿐이었지만, 찾을 생각만 해도 머리 아파지는 것들뿐이었다.
“용의 구엽초, 마혈의 영혼즙, 승선초…….”
약재들의 이름을 읊어본 이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너무하는군…….”
세 약재 모두 평생 가야 한 번 볼까말까한 귀한 물건들이었다. 무턱대고 그런 것들을 찾아오라니,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