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화. 현공자
“이준 선생, 그들과 싸우려는 생각이십니까?”
이준의 살벌한 표정을 본 유종길이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어젯밤 같은 일은,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유종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손을 쓰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모두 처리해야할 것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식이 새어나가 천명종이 개입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놈들이 계속 이런 짓을 벌이도록 두어야 한다는 건가요?”
“당연히 아니지요.”
이준의 질문에 유종길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연금대회가 시작되면, 연금대회에서 선발된 모든 참가자들은 특수 구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곳에서 손을 쓰시지요. 그 곳에서 손을 쓴다면 현명종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유종길의 설명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회를 앞둔 상황에서 천명종 같은 세력을 건드려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유종길의 말대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성 장로가 찾아왔습니다. 성 장로도 어제 일을 아는 것 같더군요. 아마 이준 선생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 같습니다.”
유종길이 말했다.
“성 장로님이 왔다고요?”
“예, 해가 뜨자마자 찾아왔더군요. 아마도 연금탑에서 지시를 받은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먼저 앞마당으로 가 성 장로님을 만나보죠. 이 일은 잠시 놓아두도록 하고 장로님이 말씀하신 그 구역에 들어가서 진한을 찾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유종길과 함께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이준과 유종길이 앞마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 장로와 아라, 천화존자, 선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허, 드디어 왔구려.”
이준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자 성 장로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유종길 장로가 이미 말해주었겠지? 현명종의 그 녀석들은 다른 장로들이 찾아가 혼을 낼 테니 조금만 참아주게. 천명종을 건드리는 것은 자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입장에서는 대회 전에 소란이 일어나서 좋을 것이 없고 말이야.
그렇다고 자네를 그냥 둘 수도 없으니 내가 직접 나왔네. 나중에 자네가 현명종에게 손을 쓰는 것은 우리도 신경 쓰지 않겠네. 다만 대회 전까지는 조금만 참아주게. 그 정도는 양해해 줄 수 있겠지?”
“성 장로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는데 당연히 따라야지요.”
성 장로의 제안에 이준은 웃으며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확실히 이 정도 규모의 대회가 열리면 그만큼 많은 세력들이 모여들 것이고, 대회를 관리해야 하는 연금탑 입장에서는 이준과 현명종의 싸움을 말리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의 원한이야 조만간 풀 날이 올 것이다.
“정말 고맙군. 자네가 이번 일을 참아주는 데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연금탑에서 선물을 하나 준비했으니 너무 고까워하지 말았으면 하네. 조영이 가지고 있었던 영혼 무투기에 관심이 있었지 아마? 그 무투기를 가르쳐 주겠네.”
성 장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이준은 깜짝 놀라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급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조영의 영혼 무투기는 고급 수준의 무투기는 아니었지만, 영혼무투기를 처음 배우는 입문자로서 이보다 더 알맞은 영혼 무투기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조영의 인결을 눈대중으로 따라한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영혼 무투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대가로 영혼 무투기를 주다니, 확실히 중주 최고의 세력 중 하나답다고 할만한 배포였다.
“자, 그럼 어서 가세. 연금탑의 장로들이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한다네.”
* * *
연금탑은 연금성 중심지대에 위치해 있었고, 이 구역이야 말로 수 많은 연금술사들의 성지라고 할 수 있었다.
성 장로를 따라 연금성 안을 삼십 분 정도 걸어 내곽지역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소란이 잦아들었다.
연금성의 내곽 지역은 연금탑과 관련이 있는 세력이나 고급 연금술사들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인파가 몰려들어도 소란스러울 일이 없었다.
내곽의 중심 지역에는 백 미터도 넘는 거대한 검은 탑이 작은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연금탑인가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굳건하고 고고한 자태로 서있는 검은 탑의 모습에 이준의 눈이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연금탑에 비교하자면 풍뢰각의 번개탑도 그 위엄이 빛을 바랄 정도였다. 과연 연금술사들의 성지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연금탑 안으로 들어가자, 성 장로는 아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잠시 그 곳에 대기시킨 뒤 이준과 함께 연금탑의 상층부로 올라갔다.
“위층에는 현공 회장이 있네. 자네의 스승인 약선님과도 절친한 사이였으니, 자네를 아주 반가워할 거야.”
스승님과 절친한 사이라는 말에 이준의 얼굴에는 곧장 화색이 돌았다.
성 장로의 뒤를 따라 조금 더 걸음을 옮기니 거대한 책장과 가지각색의 화염들이 가득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다양한 빛깔의 화염이 책장을 비추며 대전 안은 마치 딴 세상처럼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전 안에서는 왠 노인 하나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책장 위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백색 옷을 입은 노인의 몸에서는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보통 노인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영혼 탐지 능력을 사용하자, 이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상대방에게서는 영혼의 힘이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영혼이 있다면 그 힘이 아무리 미약해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노인에게서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준이 고개를 들자 백색 옷을 입은 노인 역시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가득했다. 그의 두 눈은 끝을 알 수 없는 연못처럼 깊었고, 입가에는 온화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허허, 이렇게 어린 나이에 7품 고급 연금술사가 되다니, 대륙에서 손에 꼽을만한 인재구나.”
이준이 예를 표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자, 노인이 이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현공자라고 하네. 편하게 현로라 불러도 좋고. 자네 스승인 약로와 꽤 깊은 친분이 있는 사이이니 편하게 대해주게.”
“네, 감사합니다.”
현공자는 씩 웃으며 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책장에 내려놓은 뒤 책상 앞으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현명종의 일은 자네가 조금만 양해해주게. 연금탑에서 주최하는 대회인만큼 불미스러운 일은 최대한 막으려 하는 것이니 말이야.”
노인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어젯밤 그 자는 얼굴과 기운을 가려 정체를 알아내지 못 했네. 내가 직접 그 자리에 간 것이라면 그 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 자의 이름은 아마……. 모골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현공자의 말에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 한샘에게서 들은 노인의 이름을 언급했다.
“모골?”
그의 말에 현공자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역시 그 영감이었군. 그보다 약선은 지금 영혼의 궁전의 손에 있는 것인가?”
현공자가 메마른 손으로 책상을 문지르며 물었다.
이에 이준은 입을 꾹 다문채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답답한 친구 같으니, 그 때 연금탑의 수장 자리에 올랐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현공자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네. 약선의 소식이 있다면 자네에게 전해주지.”
“감사합니다, 현로님.”
이준의 감사인사에 현공자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닐세. 영혼의 궁전은 연금탑의 가장 큰 적이니까. 매년 혼전에서 잡아간 연금술사만 해도 몇 명인 지 알 수 없을 정도라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그놈들과 싸울 수는 없지. 그들의 실력은 자네의 상상을 초월하거든.”
이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의 궁전은 영혼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주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강자로 군림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의 실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끼익-.
그때, 문이 갑자기 열리며 세 사람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이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앞서 들어온 세 사람 중 두 명은 다름 아닌 조영과 단선이라고 불리던 단씨 가문의 소녀였다.
조영과 단선 뒤에는 외모가 훤칠한 사내가 검은 옷을 입고 서있었다.
대전 안으로 들어올 때 그는 낮은 목소리로 조영, 단선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가슴팍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별 7개가 박힌 휘장이 달려있었다.
이준의 모습을 보고 놀라기는 단선과 조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승님…….”
조영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와 현공자를 향해 예를 표했다.
“회장님.”
“허허, 너희 세 명도 다 왔구나.”
현공자는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이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자는 이번 오대가문 심사에서 우승을 한 이준이다. 자네들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
“호호, 어떻게 모르겠나요.”
조영이 특유의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송청이라 합니다. 이준 씨가 오대가문 심사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들었습니다. 오늘 직접 만나보니 역시 뜬소문은 아니었군요.”
검은 옷의 사내가 앞으로 나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이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사내의 태도는 상당히 정중했지만, 이준은 그의 눈빛에서 감출 수 없는 승부욕을 읽어냈다. 아무래도 오대 가문 심사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직접 이준과 승부를 겨뤄보고 싶어 피가 끓는 모양이었다.
“이준 씨, 송청님은 연금탑 대장로님의 제자이자 연금탑에서 가장 젊은 장로예요. 앞으로 연금탑 역사상 가장 젊은 팔대 장로가 될 지도 모르는 분이기도 하고요. 이준씨와 송청님이 맞붙으면 어떤 대결이 펼쳐질지 상상만 해도 재밌네요.”
조영이 이준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투로 송청을 소개했다.
“역시 훌륭한 스승 밑에선 훌륭한 제자가 나오는 군요.”
이에 이준은 웃으며 은근슬쩍 송청의 눈을 피했다.
지금 조영의 말은 자신과 송청이 겨루면 호각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찌 보면 이준의 실력에 대한 칭찬이었지만, 이준의 입장에서는 왜 굳이 두 사람이 맞붙으면 재미있겠다는 말을 해서 상대의 승부욕을 더욱 부채질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 이제 서로 인사가 끝났으니 자네들을 부른 이유를 설명하겠네.”
그 때, 현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도 조영이 송청을 자극하려고 하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연금술 경연 대회는 며칠 후에 열릴 것이네. 그리고 이번 대회는 별의 불꽃과 관련이 되어 있어 영혼의 궁전에서도 뛰어난 연금술사들을 내보낼 것으로 예상되네.”
“네……?”
그의 말에 조영, 단선, 송청이 일제히 눈썹을 찌푸렸다.
이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네. 별의 불꽃를 장기간 봉인해둔 탓에 영혼의 궁전에서 연금탑에 큰 원한을 품게 되었지. 만일 이 별의 불꽃이 세상 밖으로 공개되는 순간 놈들은 틀림없이 연금성을 공격할 것이네. 그렇게 되면 손실이 아주 커지겠지…….”
현공자가 탄식하듯 말했다.
“이 별의 불꽃은 무수한 세월을 거치면서 이미 상당히 강해졌네. 하지만 길들이기 어려워 우리 연금탑이 온갖 수단을 총동원 해 보았지만 굴복시킬 수 없었지. 게다가 몇 년간 별의 불꽃이 하늘의 힘을 흡수하면서 우리의 봉인도 점점 별의 불꽃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네.
그리고 영혼의 궁전 놈들은 별의 불꽃을 손에 넣는데 실패한다면 봉인이라도 없애려 할 것이야. 그렇게 된다면 연금탑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고 놈들은 영혼체를 가득 수집해 갈 것이네.”
그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굳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별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네. 게다가 별하늘의 힘이 모여 있어 별의 불꽃은 불사신에 가깝지. 그리고 별의 불꽃을 얻는 자는 아주 강력한 회복력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이 불꽃이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아주 큰 문제가 생길 것일세.”
현공자의 심각한 표정에 대전 안에는 적막감이 무겁게 깔렸다.
“자네들을 부른 것도 이 때문이네. 자네들이 놈들의 손에 별의 불꽃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