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화. 모골
그물을 잘라낸 이준은 청록색의 화염을 푸른색과 무형의 화염으로 나눈 뒤 두 개의 화염을 맞붙였다.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융합시키자, 무시무시한 열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더니 이내 자그마한 연꽃으로 변화했다.
현재 이준의 실력으로 두 개의 불꽃을 융합한 화련을 만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잠시 숨 돌릴 시간 정도만 있다면 충분했다.
이준은 곧바로 손가락을 튕겨 완성된 화련을 상대에게 날린 뒤 숨 돌릴 틈도 없이 저장 반지에서 하늘 요괴를 불러냈다.
은빛 요괴가 새카만 밤하늘을 가르고 검은 의복을 입은 남자를 향해 돌진하기 무섭게 이준은 투명한 장벽으로 몸을 날려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러댔다.
“천지의 불꽃을 융합시키다니, 대단한 무투기를 개발해냈군.”
사내가 음산하게 웃으며 남색 화염으로 둘러싸인 열 손가락으로 허공을 강하게 휘젓자, 남색 화염이 화염 공으로 변해 허공에 균열을 만들며 그대로 청록색 화련을 집어삼켰다.
남색 화염이 청록색 화련을 집어삼키는 순간 강력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정원이 삽시간에 폐허로 변했다.
가볍게 화련을 막아낸 사내는 손가락을 튕겨 남색의 화염을 날려보내 하늘 요괴를 막아냈다.
“헛수고 하지 말거라. 네 실력으론 아직 내가 만든 영혼 장벽을 없애지 못 한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화련과 요괴를 저지한 검은 옷의 사내가 싸늘한 눈빛으로 사력을 다해 영혼 장벽을 두드리고 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펑!
죽을힘을 다해 내리쳐도 꿈쩍조차 하지 않는 장벽에 이준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이준의 영혼 탐지능력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정확히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적어도 3성 이상의 투존이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4성 이상일지도 몰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 더 이상 저항하면 정말로 죽이겠다. 순순히 얼음 불꽃의 정수와 불개를 내게 넘겨라.”
사내가 필사적으로 영혼 장벽을 두드리고 있는 이준을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에 이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청연의 불꽃을 날려 하늘 요괴를 막아서고 있는 남색 불꽃을 갈라버렸다.
남색 불꽃에 의해 묶여있던 요괴는 번개처럼 자신의 주인에게 날아와 괴한의 앞을 막아섰다.
다음 순간, 이준의 미간에서는 새하얀 화염이, 그리고 오른손과 왼손에는 각각 투명한 불꽃과 푸른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하, 천지의 불꽃 세 개라니! 정말 대단해! 아주 좋아!”
이준의 몸에서 피어오른 세 개의 불꽃을 본 사내는 미친 사람마냥 웃음을 터뜨리며 남색 화염을 뿜어냈다.
사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남색 화염은 곧바로 그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불의 신처럼 남색 화염을 두른 채 자신에게 걸어오는 사내의 모습에 이준은 곧바로 입을 벌려 회색의 불꽃을 뱉어냈다.
“네 개?”
이준의 몸에서 또 다른 불꽃이 나오자, 시종일관 여유롭던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죽고 싶은 것이냐?”
사실 이준은 네 개의 불꽃을 섞어 만든 화련으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을 보니 그 역시 이 공격만큼은 받아낼 자신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글쎄?”
이준이 손을 휘둘러 네 개의 불꽃을 융합시키기 시작하자, 사내가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제길!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하늘 요괴가 버틸 수 있을까?’
네 개의 불꽃을 융합시키는 것은 두 개의 불꽃을 융합시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조금만 실수를 하면 그 자리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자신마저도 재가 될지도 몰랐다. 방금 전의 상황을 보아하니 하늘 요괴를 이용해 시간을 버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쾅!
바로 그 때, 돌연 영혼의 장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더니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기운이 온 하늘을 가득 메우는 것이 느껴졌다.
“네 이놈! 감히 연금성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다음 순간, 우렁찬 고함 소리가 밤하늘을 꿰뚫고 이준의 귓등을 때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이준도 놀라 빠르게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새카만 밤하늘에는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거대한 힘이 온 하늘에 일렁이고 있었다.
“현 공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쉬익!
괴한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 두 개가 유씨 가문의 정원으로 날아왔다.
“괜찮아?”
아라는 난장판이 되어버린 마당을 보고는 곧바로 살기를 뿜어내며 괴한의 앞을 막아섰고,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천화존자 역시 아라와 함께 검은 옷의 사내를 치기 위해 염력을 끌어올렸다.
“괜찮아. 조심해, 저 녀석 보통 인물이 아니야.”
“어찌 봐도 투존 강자인 것 같은데, 왜 좀도둑처럼 몰래 들어와 수작을 부리는 겐가?”
언제나 온화하던 천화존자의 목소리에도 짙은 살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두 투존 강자의 등장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버럭 소리를 지를 뿐 이었다.
“현공자, 오늘 일은 연금탑과 무관하니 날 방해하지 마시오!”
“흥, 연금성에서 벌어진 일이 연금탑과 무관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구나! 이곳이 너희 영혼의 궁전의 앞마당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시 위엄 있는 목소리가 하늘 위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전히 털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검은 의복의 사내는 이를 악문 채 욕설을 내뱉었지만, 차마 이준을 공격하지는 못했다.
“운이 좋구나, 조만간 다시 내 물건을 돌려받으러 오겠다.”
말을 마치자, 사내의 뒤에 있던 공간에 새카만 균열이 생겨났다.
“어딜 가려고!”
그 순간, 아라의 손에서 매캐한 독향을 내뿜는 회색 염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사내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남색의 화염이 폭발하며 아라의 회색 염력을 막아냈다.
“흥! 건방진 계집 같으니. 저 빌어먹을 늙은이에게 감사해라.”
말을 마친 사내는 곧바로 공간 균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사내가 새카만 공간의 틈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또 한 번 공간이 왜곡되며 균열이 아물었다.
“저 자식이…….”
검은 의복의 남자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아라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쥔 채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됐어.”
이준은 손을 내저은 뒤 하늘을 바라보며 예를 표했다.
“선배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준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하늘 위의 별빛이 움직여 사람의 얼굴로 변화했다. 실로 입이 떡 벌어질만한 놀라운 광경이었다.
“허허. 사실 나는 지금 사정이 있어 이렇게 겁을 주는 것 밖에 할 수 없네. 가능하다면 연금탑으로 오게. 그곳이라면 저 놈도 절대 들어오지 못할 터이니.”
“감사합니다.”
노인의 말에 이준은 다시 한 번 깍듯이 밤하늘에 만들어 진 노인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의 강자가 되면 이런 신기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쩌면 상대가 연금탑의 세 수장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세, 옛 친구의 제자를 보살피는 것뿐이니……. 그리고 현명종 놈들이 자네의 정보를 가지고 있네. 조심하게.”
나이든 얼굴이 살짝 미소를 짓는 순간, 별빛이 요동치며 뿔뿔이 흩어졌다.
이준은 말없이 노인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보았다. 대체 스승님은 연금탑과 무슨 관계였던 걸까? 어째서 연금탑의 사람들은 풍존과 함께 다른 세력을 만든 스승님을 아직도 기억해주고, 그의 제자인 자신을 도와주는 것일까?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누구야 방금 전 그 괴물은?”
아라가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혼의 궁전 사람인 것 같아.”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도 아라와 내가 이런 소동이 벌어진 것을 모를 정도라면……. 어쩌면 아라와 내가 힘을 합쳐도 그 자의 상대가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천화존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여러 가지 의문이 떠다니고 있었다. 상대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노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승님과 비슷한 세대의 강자가 어떻게?
“현명종 얘기는 또 뭐야? 며칠 전 그 일로 그 놈들이 영혼의 궁전에 네 정보를 흘린 거야?”
그렇게 이준이 상대의 정체가 무엇이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아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이준의 표정 역시 차갑게 변했다. 아마도 며칠 전 연금술사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이 문제가 된 듯싶었다.
“모르겠어. 저 선배님이 현명종 놈들이 내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아.”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라의 얼굴이 또 다시 살기로 물들었다.
“일단 내가 걱정되는 건 조금 전에 봤던 그 남자야. 현명종 놈들은 두렵지 않아. 천화존자 선생님도 있고, 아라 너도 있으니까. 하지만 저 남자는…….”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퍼뜩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만! 저 남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이준의 말에 아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준은 그 말에 답을 하는 대신 곧바로 저장 반지에서 옥병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한샘이 들어있는 바로 그 옥병이었다.
“네 바다의 불꽃, 누구에게 넘겼어?”
이준이 옥병 속에 갇혀있던 한샘의 영혼을 꺼내 물었다.
이준의 질문에 한샘은 공포에 질린 듯 몸을 떨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이준의 손끝에 투명한 화염이 피어오르자, 곧바로 안색이 변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비, 빌어먹을 자식! 말할게! 말한다고! 모골이라는 영혼의 궁전의 투존이 가져갔어! 그 자는 영혼의 궁전의 8레벨 연금술사야!”
“모골?”
이준이 구름 불꽃을 흔들며 되물었다.
“모골은 약선과 원한이 깊은 자야. 약선은 모골을 제자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혼자 약선을 스승으로 생각했지.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나중에 약선과 관계가 틀어졌어. 그리고 나에게 불개를 빼앗아 오라고 시킨 것도 저 자야.”
“뭐?”
그의 말에 이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사실 나도 몰랐던 일이야. 약선과 내가 아직 사제지간일 때도 몰랐던 일이지. 나도 모골에게 들은 이야기야.”
“더 아는 건 없어?”
이준의 질문에 한샘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 이게 내가 아는 전부야. 하지만 그 자는 불개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거야. 그것만큼은 확실해.”
“후우……. 알겠어. 그럼 다시 꺼져.”
한샘에게서 모든 정보를 캐낸 이준은 곧바로 그의 영혼체를 옥병 속에 봉인해 저장 반지 안으로 집어넣은 뒤 아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현명종 놈들을 찾아보자. 오늘 같은 일은 한 번으로 충분해.”
* * *
다음 날, 이준이 방 밖으로 나올 무렵에는 유종길이 대역죄를 지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 선생, 정말 죄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현명종의 거점은 이미 밤사이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유종길의 태도에 이준은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장로님. 천화존자 선생님과 아라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강자였는걸요.”
유종길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더욱 경계를 강화하도록 하겠습니다. 현명종의 거점은 연금성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그날 그 청년은 현명종 종주의 아들, 진한이라고 합니다.
그 역시 연금술사로, 이번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연금성에 왔다고 하더군요. 그의 옆에 있던 회색 옷의 노인은 현명종의 현존이라는 투존으로, 실력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같이 왔던 두 명의 장로는 투종 최고 수준의 강자라고 합니다.”
유종길의 설명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