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화. 불청객
상대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조영의 입가에 또 다시 미소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그런 미소가 아니었다. 마치 친한 친구를 대하는 듯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시간이 있다면 우리 개인적으로 대화 좀 할까요, 제가 영혼 무투기를 조금 배웠는데, 이준씨도 흥미가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이 있다면 아가씨를 찾으러 가겠습니다.”
하지만 이준은 여전히 조영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종잡을 수 없는 괴상한 여자였으니, 이제 와서 그런 미소를 한번 봤다고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이제 곧 경연대회에서 가장 강한 적수가 될 상대에게 자신의 밑천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정말로 영혼 무투기를 모두 알려줄 리가 없다는 것이 이준의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귀한 물건을 같은 가문 사람도 아닌 사람에게 턱턱 가르쳐 주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도, 조씨 가문에서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자신의 진짜 실력이나 배경을 캐내고 싶어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연금대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조영은 이준의 애매한 대답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씨익 웃으며 제 할 말만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멋대로 굴다가 사라져버리는 조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광장에 앉아 있던 구경꾼들은 하나 같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조씨 가문을 이끌고 문 밖으로 나가는 조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올해 열릴 오대가문 심사에서 조영을 능가하는 인물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조영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씨 가문이 오대 가문에서 떨려나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반면 예전부터 유씨 가문과 교류가 있던 세력들은 유종길에게 다가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오늘의 일로 유씨 가문은 오대 가문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으니, 어쩌면 다시 연금탑의 장로석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특히 오늘 이준의 활약을 보니 장로석에 들어갈 가능성이 결코 낮지 않아 보였다.
유종길은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향해 축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그 동안의 패배와 몰락을 통해 유종길은 어떻게 해야 유씨 가문의 미래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적은 적게, 아군은 많게. 그 간단한 법칙은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었다.
“선배, 괜찮아요?”
의석으로 걸어오는 이준을 본 선화가 환히 웃으며 물었다.
이에 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마침 단헌이 단씨 가문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종길 장로님.”
단헌은 먼저 유종길을 향해 예를 갖춘 뒤 시선을 돌려 이준을 바라보며 겸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하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수 배웠습니다.”
시종일관 예의 바르고 겸손한 단헌의 태도에 호감을 느낀 이준 역시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조영 아가씨가 봐주셔서 이 정도로 끝난 것 같습니다.”
말을 하는 동시에 이준은 단헌 뒤에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준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이준과 눈을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마치 엄마를 따라다니는 어린 아이마냥 단헌의 뒤로 숨으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하하, 이 아이는 제 사촌 동생인 단선이라 합니다. 낯을 많이 가려서…….”
단헌이 조금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이준은 웃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 소녀와 만났던 적이 있었던 이준은 그녀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조영이 이 아이를 신경 쓰는 것으로 봤을 때,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녀에게서 아무런 영혼의 파동도 느낄 수 없다는 점 이었다.
“이준 선생님,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연금성 내곽지역에 있는 단씨 가문의 별장으로 놀러 오시지요. 성심껏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단헌은 난잡하게 어질러진 광장 안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웃으며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이준은 단헌 일행이 대전 밖으로 나갈 때까지 눈으로 마중을 한 뒤 고개를 돌려 유종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로님, 이제 돌아가도록 할까요?”
“잠깐, 잠깐.”
그 때, 이준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성 장로가 환히 웃으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성 장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준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묻자, 성 장로는 수염을 쓸어내린 뒤 유종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종길, 먼저 축하드리오. 오대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구려.”
“성 장로님 덕에 얻은 기회이지요. 이 은혜는 평생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유종길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성 장로는 손사래를 치며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이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 유씨 가문에 아주 대단한 조력자가 있어서 다행이오. 이준이라고 했나?”
성 장로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자네와 빙하곡의 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네. 약선님이 바로 자네의 스승이지?”
자신의 질문에 이준의 눈빛이 변하자, 성 장로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내려 앉았다.
“허허, 긴장하지 말게나. 내가 예전에 약선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어서 물은 것이네.”
이에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약선님의 안목은 대단하시군. 나도 자네같은 제자 하나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겠네 그려.”
성 장로의 말투에서는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이 느껴졌다.
“이번에 이곳에 온 것은 당연히 대회 때문이겠지?”
성 장로의 질문에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흐음……. 그럼 내가 대회 전에 연금탑에 한번 데려가 주겠네. 아마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 게야.”
성 장로의 제안에 이준이 조금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래도 되는 것 입니까?”
“협회 장로들이 자네에 대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인사라도 시켜주고 싶군.”
성 장로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협회 장로님들이요?”
장로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이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허허, 그렇네. 자네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일 일게야. 보아하니 영혼 무투기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조영의 영혼 무투기는 사실 연금탑에서 가르친 것이라네.”
이어지는 성 장로의 말에 이준은 곧바로 끄덕였다. 물론 연금탑도 공짜로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겠지만, 방문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허허,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세. 며칠 후 내가 직접 유씨 가문의 별장으로 데리러 가도록 하겠네.”
성 장로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이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유종길, 아라 등과 함께 광장 을 빠져 나갔다.
멀어지는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 장로가 서서히 웃음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영혼의 궁전에게 별의 불꽃을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더 실력 있는 젊은이를 모아야 하는데, 때 마침 좋은 재목이 나타났구나. 허허…….”
* * *
심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 안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소문이 날개 달린 듯 퍼져 나갔다.
유씨 가문이 심사에서 일등을 했다는 소식에 유씨 가문이 몰락하기만을 기다리던 세력들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준은 연금성 전체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이준은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유씨 가문의 별장에 틀어박혀 영혼 무투기를 연구하는데 골몰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며 대회의 시작일이 점점 가까워졌고, 이에 따라 연금성 전체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 * *
이준은 유씨 가문의 별장 정원에 가만히 앉아 영혼 무투기의 인결을 연습했다. 인을 맺는 속도는 여전히 느렸지만, 심사 때 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유연한 동작으로 인결을 완성해 나갔다.
연습을 마친 이준이 손을 멈추고 눈을 뜨자, 탁한 공기가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탁한 공기가 모두 몸속에서 빠져 나가자, 이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뒷짐을 진 뒤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구길래 이 밤중에 남의 별장에 와서 숨어 있는 거지?”
“역시 약선의 제자답게 영혼탐지능력도 대단하구나.”
그 순간, 허공에서 미세한 파동이 일렁이면서 검은 의복을 입은 사람이 왜곡된 공간에서 서서히 나타났다.
괴한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익숙한 기운에 이준의 눈동자는 곧바로 살기로 물들었다.
“영혼의 궁전…….”
“허허, 약선 그 영감의 얼음 불꽃의 정수가 네 몸에 있다던데?”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남색의 화염이 그의 몸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바다의 불꽃?”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온 남색 화염은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남색 화염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이준의 몸속에 자리한 청연의 불꽃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는 천지의 불꽃을 만났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에 이준은 눈앞의 남색 화염이 한샘이 사용하던 바다의 불꽃임을 확신했다.
“정말로 네 놈들이 천지의 불꽃을 가져간 거였군.”
한샘의 말에 따르면 부활을 대가로 영혼의 궁전에 바다의 불꽃을 바쳤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불꽃을 가져간 상대가 먼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탓에 이준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보는 눈이 있구만.”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약선 그 늙은이가 가르쳐 준 수련법과 얼음 불꽃의 정수를 회수하러 왔다.”
“설마 내가 곱게 넘겨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준의 몸에서 청록색의 화염이 피어올랐다.
“큭큭, 불개는 본래 내 것이다. 약선 그 빌어먹을 늙은이가 내 것을 도둑질 한 것이지. 나는 그저 내 물건을 돌려받으러 온 것뿐이야.”
그의 말에 이준은 순간 풍존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개는 스승님이 고대의 유적에서 찾아온 것 이었고, 그 과정에서 커다란 싸움이 벌어졌었다고 했다. 아마 눈앞의 상대는 그 날 자신의 스승과 싸웠던 자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이 곳에 있는 투존 둘이 널 지켜주리라 생각하는 것이라면 생각을 고쳐먹는 것이 좋을 게다. 이 정원에는 이미 내가 영혼 결계를 쳐두었으니 그들은 내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지.”
사내가 소매를 살짝 펄럭이자, 메마른 손이 천천히 소매에서 나오더니 남색 화염이 동그란 구체로 변화했다.
“곱게 그 물건을 넘기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사내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이준의 발에서 은색 빛이 번쩍이더니 그의 몸이 사라졌다가 정원 끄트머리에서 나타났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사내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직감한 이준은 곧바로 몸을 날려 온 힘을 다해 상대가 만들어 둔 영혼의 결계를 내리쳤다.
쾅!
곧이어 낮은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허공 위에 잔잔한 물결이 일어났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해 내리쳤음에도 투명한 장벽은 깨지기는커녕 금조차 가지 않았다.
“어리석군. 네가 약선인 줄 아느냐?”
그 순간, 사내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바뀌면서 남색 구체가 번개처럼 이준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다의 그물.”
사내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다섯 줄기의 남색 줄기의 화염이 그물로 변해 허공을 빠르게 뒤덮었다.
쉭!
화염 그물이 이준의 몸을 옭아매려는 순간, 거대한 검은 송곳이 허공을 가르며 남색 화염으로 만들어진 그물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