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화. 심사 시작
이준은 백용이라는 사내와 가볍게 눈을 마주친 뒤 유씨 가문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가문들을 위해 마련된 화려한 자리와는 다르게 유씨 가문의 자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단헌과 백용은 모두 7레벨 중급 연금술사입니다. 구씨 가문은 7레벨 하급이니 이준 선생의 상대가 되지 못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을 마친 유종길의 시선이 조씨 가문 좌석으로 향했다.
“조씨 가문은 이번에 어떤 사람을 보낼까요? 조단?”
유종길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준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씨 가문에는 조씨 가문 미래의 기둥이라 불리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 조영이라는 마녀가 선두에 있고 조단이 두 번째, 그리고 조휴라는 사람이 세 번째입니다. 이 조휴의 천부적 자실은 조단만큼 대단하지만, 성품은 조단보다 훨씬 얌전하지요.
조휴는 성년이 되자마자 혼자 밖으로 나가 수련을 하다가 7년 만에 가문으로 돌아왔지요. 그 때 이미 7레벨 연금술사였으니, 지금쯤은 7레벨 중급이 되었겠지요.”
유종길은 설명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문에 7레벨 이상의 연금술사가 셋이라니, 과연 연금탑의 오대 가문 다운 실력이었다.
“조씨 가문 도착!”
그 때, 우렁찬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대전 안에 있던 많은 세력들은 그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누가 나타났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곧이어 굳게 닫혀있던 대전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가녀린 여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기다란 회색 치마를 입고 있는 여인의 피부는 눈처럼 새하얗고 깨끗했고, 어깨 위로 드리운 장발은 마치 거지처럼 산발을 하고 있었다.
회색 옷을 입은 여인은 대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조씨 가문의 좌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바로 장차 연금탑의 수장이 될지도 모르는 인재로 손꼽히는 조씨 가문의 ‘조영’이었다.
연금탑의 우두머리는 투기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권력자로, 중주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연금술사들의 정점에 선 존재인만큼 그 위세 역시 대단해 투존들조차 눈 밖에 날까 두려워할 정도였다.
조영은 조씨 가문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재이자 연금탑 세 우두머리가 몸소 가르친 제자로, 발전 추세로 봤을 때 언젠가 분명 연금탑 우두머리의 후계자가 될 것이고, 운이 좋다면 그녀가 연금탑 설립 이래 가장 젊은 여자 우두머리가 될 지도 모른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장내를 훑어보던 조영은 단씨 가문의 소녀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미간을 찌푸리며 못 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조영의 시선을 느낀 그 소녀는 겁을 먹은 듯 움찔거리며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소녀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자 조영은 묘한 웃음을 지어보인 뒤 천천히 조씨 가문의 좌석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는 조단을 비롯한 조씨 가문의 사람들이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조영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사내가 있었다.
‘마녀’라고까지 불리는 조영 앞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유달리 진한 눈썹을 가지고 있었고, 마치 구도자처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저 사람이 그 조휴라는 사람이겠군.’
이준이 그렇게 세 사람의 인상을 살피고 있을 때, 조씨 가문의 자리로 향하던 조영이 돌연 단씨 가문의 소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단선, 오랜만이야.”
조영의 인사에 단선이라 불린 소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올 줄 몰랐네. 연금대회 때문에 온 거지? 흐흥, 단씨 가문도 참 꿈이 크네. 설마 이번 연금대회에서 우승하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거야?”
조영의 공격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단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채 그저 파랗게 질려 그녀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조영 아가씨, 이번 연금대회 우승은 아가씨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지요.”
그러자, 단선 앞에 있던 온화한 인상의 청년이 짐짓 예의바른 말투로 입을 열었다.
“흥, 단헌. 말은 잘하네. 그렇다고 내가 방심할 거라 생각하지 마.”
그러나 조영은 코웃음을 치며 사내를 무시하고는 다시 칼날같은 눈초리로 단선을 위 아래로 훑어봤다.
“2년 만에 만났는데, 얼마나 강해졌을지 궁금하구나. 그 경지는 제대로 넘었나 모르겠네?”
조영의 질문에 단선은 또 다시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우물쭈물거리다가 급기야 단헌의 뒤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적인 뒤 다시 조씨 가문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조영이 유씨 가문 사람들의 앞을 지나칠 때, 대열의 맨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이준인가?”
사내의 목소리는 마치 호랑이나 사자의 그것처럼 위엄이 서려 있었다.
“조휴, 전설로 꼽히는 조씨 가문의 천재 중 한 명이시지요.”
이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을 천재라 부르진 않지. 소문이 과장된 것이다.”
“겸손하시군요.”
조휴는 그 말을 끝으로 이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대로 몸을 돌려 조씨 가문의 의석으로 향했다.
“확실히 조단보다는 나은 사람 같네요. 실력도, 인성도.”
조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이 고개를 돌려 유종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능은 조단보다 떨어진다고들 하지만, 어찌됐든 지금은 조단보다 조휴의 실력이 한수 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상당히 끈기가 있는 사내라고 하더군요.”
* * *
“형, 반드시 저 대신 복수 해줘야 해요. 저 녀석이 삼 등에만 안 들어가면 유씨 가문은 끝장이에요.”
조단이 이를 갈며 그렇게 말하자, 조휴가 특유의 진지함이 가득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가능하다면.”
“저 자도 7레벨 중급 연금술사니까……. 실력도 괜찮고, 인상도 괜찮고. 누구처럼 거만하게 굴지도 않고. 장래가 기대되는걸?”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던 조영이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둥근 옥구슬을 갖고 놀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녀의 말에 조단은 더욱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조휴와 조영 두 사람 모두 이준에게 좋은 평을 내리자 심사가 뒤틀린 것이다. 하지만 조영의 말에 토를 달았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으니 차마 더 이상 입을 열지는 못했다.
* * *
조씨 가문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대전의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치더니 오대 가문의 좌석이 뒤로 이동하면서 순식간에 대전 중앙에 아주 넓은 광장이 생겨났다.
곧이어 원기 왕성한 백발의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와 광장 중심에 멈춰선 뒤 장내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대가문이 모두 모였으니 긴 말은 필요 없겠지요. 이번 심사도 내가 볼 것입니다. 이의가 있는 분 있습니까?”
“깔깔, 성 장로님, 장로님이 심사를 보신다는데 감히 누가 이의를 달겠어요.”
백발 노인의 말에 대답한 유일한 인물은 단 한명, 조영 뿐이었다. 그녀는 연금탑의 장로 앞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저 노인은 성요석이라는 사람으로 연금탑 팔대 장로 중 한 명입니다. 연금탑 안에서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지요.”
유종길이 이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는 순간, 그의 영혼에 전에 없이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과연 연금탑의 장로는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었다.
“이 녀석아, 이 영감에게 그렇게 아부 떨 필요 없다.”
백발의 노인이 광장 전체를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다 됐으니, 오대가문 심사 대상자들은 들어오십시오.”
백발의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 대전 안에서 들려오던 수근거림이 사라졌다.
이준은 숨을 살짝 내쉰 뒤 소매 안에 있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돌려 긴장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종길과 선화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선배! 힘내세요!”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응원하는 선화의 모습에 이준은 다시 한 번 미소로 화답한 뒤 광장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준에 이어 나머지 네 명의 사람들 역시 서서히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다섯 명의 젊은이에게 쏟아졌다.
단씨, 조씨 가문에서 나온 사람들은 유종길의 예상대로 조휴와 단헌이었고, 백씨 가문에서는 백씨 가문 젊은 세대 중 가장 뛰어난 백용이라는 남자가 나왔다. 구씨 가문에서는 키가 조금 작은 남자 하나가 나왔다. 그는 이준이 모르는 자였지만 구씨 가문을 대표로 나왔다면 보통 인물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섯 사람을 천천히 훑어보던 성 장로는 이준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그는 유씨 가문과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그들이 몰락한 것에 대해 적잖이 마음 아파하고 있었고, 이번에 유씨 가문이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가문의 대표들은 자리로 와주십시오.”
성 장로의 말에 이준과 나머지 사람들이 걸어와 각자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광장 위에 섰다.
“단씨 가문의 단헌입니다.”
단헌이 꼿꼿하게 선 채 성 장로에게 예를 갖추며 정중히 말했다.
“조씨 가문의 조휴입니다.”
“백씨 가문의 백용입니다.”
“구씨 가문의 구준입니다.”
뒤이어 다른 젊은이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이며 성 장로에게 인사를 올렸다. 성 장로는 연금탑 팔대장로 중 한 명이니만큼 일반 장로들과 비교할 수 없는 권한을 갖고 있어 오대 가문 사람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유씨 가문의 대표, 이준입니다.”
“허허, 이준이라……. 최근 빙하곡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준 장본인이 바로 자네로군. 아주 대단하던걸.”
성 장로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꽃잎성에서 일어난 대전은 연금성에서도 최근 큰 화제가 되었기에 그 역시 이준을 알고 있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작은 소동에 불과합니다.”
이준의 겸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그의 곁에 있던 백용이 못 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며칠 전 백씨 가문에게 망신을 준 놈에게 성 장로가 호감을 보이는 것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자, 그럼 모두 모였으니 시험을 시작합시다.”
곧이어 광장 아래에서 검은 색 천으로 덮인 거대한 물체 하나가 솟아올랐다. 성 장로가 손을 뻗어 그 검은 천을 벗겨버리자, 높다란 석비가 나타났다. 석비는 수정처럼 아주 투명해 그 형체를 정확히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영혼의 힘은 연금술사에게 있어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만 영혼을 감지하고 제어할 수 있지요.”
성 장로가 석비의 중심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곳에는 원형의 매끈한 거울 판이 달려있었다.
“각자 자신의 영혼의 힘을 이 안에 넣으면, 이 거울에서 본인의 영혼 수치를 측정해줄 것 입니다. 이 수치를 연금탑에서는 영혼수치라고 부르지요. 영혼수치가 400이상이 되어야 합격입니다. 몇 년 동안 오대가문의 심사에서 가장 높았던 영혼 수치를 기록한 것은 바로 조영이었지요. 당시 그녀의 영혼수치는 976이었는데, 아직까지 그 기록을 깬 자가 없습니다.”
말을 마친 성 장로의 시선이 조영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성 장로가 자신을 쳐다보거나 말거나, 조영은 여전히 둥근 옥구슬을 만지작거리며 주변 일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허, 규칙은 다 알고 있을 테니 바로 시작합시다. 누가 먼저 나오겠소?”
성장로 역시 그런 조영의 태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다시 다섯 사람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구씨 가문의 구준이라는 사내가 먼저 앞으로 나와 손을 석비 위에 올린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영혼이 석비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석비 중심에 있는 매끄러운 거울 판 위에 707 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점수를 확인한 구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팔을 거두어 들였다. 이 정도 숫자라면 결코 낮은 수치는 아니었다. 어지간한 7레벨 중급 연금술사들도 이 정도 영혼의 힘을 보유하고 있지 못 했다.
구준이 뒤로 물러나자 백용이 빠르게 석비 앞으로 다가간 뒤 이준을 한번 쳐다보곤 석비 위에 손을 올린 뒤 눈을 감았다. 그의 점수는 구준보다 조금 높은 785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