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화. 흡수
이준은 요동치는 마음을 억누르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고, 입 속에서 영혼의 가루에서 얻어낸 그 문구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영혼의 극한……. 천령의 수호……. 영혼수련흡수…….”
이준이 눈을 감은 지 삼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때, 적막이 흐르던 방 안에 다시 미세한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영기인가…….’
이준은 그 아주 옅은 기류에 정신을 집중하여 영기라는 것이 아주 옅고 약해 체내로 흡수될 때 주변의 천지 에너지에 의해 부서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영기의 존재를 느끼지 못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인 듯했다.
처음으로 정상적인 수련 상태를 통해 영기의 존재를 느낀 이준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춤이라고 추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 영기를 성공적으로 흡수하기만 한다면, 영기가 영혼 속에 가득해질 것이고, 그의 영혼은 언젠가 영혼단계에 다다라 8레벨의 ‘연금종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투기대륙에서 7레벨 연금술사는 보통 ‘연금대사’로, 8레벨 연금술사는 ‘연금종사’로 불리웠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이 두 계급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다리가 있었다.
무사히 8레벨 연금술사 단계에 다다르면 투존 계급의 최고급 강자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설사 고족이라 해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심지어 투존 강자들조차 8레벨 연금비약을 얻기 위해 8레벨 연금술사를 찾아헤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8레벨 연금술사는 그만큼 희귀하고, 대단한 존재였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 괴이한 주문은 영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영기를 흡수하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영기는 천지 에너지처럼 마음대로 흡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너무나도 약해 약간의 압력만 가해져도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영혼의 힘을 키우기 위한 무투기가 따로 존재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어렵게 영기의 존재를 찾아냈는데 흡수를 할 수 없다니! 마치 황금이 가득 채워져 있는 보물창고를 발견했지만 무거운 열쇠로 잠겨 있어 문 밖에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느낌이었다.
“이 문구에는 분명 그 다음 말이 있을 거야. 내가 알고 있는 이 부분은 그저 일부분에 불과할 거야.”
하지만 열쇠가 없다고 보물들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실험을 시작했다.
이준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수련 상태로 들어가 영기가 섞여있는 천지에너지를 흡수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천지의 불꽃으로 담금질을 하기도 전에 압축된 천지의 에너지에 의해 영기가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준은 실망하지 않고 몸속에 흡수한 천지에너지를 염력으로 연소시켜 융합시킨 뒤 다시 한 번 천지에너지를 빨아들였다. 이번에 이준은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올 때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아주 조심스럽게 영기 주위에 있는 천지의 에너지를 걷어내 보려 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천지의 에너지를 걷어내자, 겨우 한줌의 영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성과였다. 이 방법도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해 염력을 단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익숙해 질 것이고, 그렇다면 아주 느리게나마 영혼의 힘을 단련시킬 수 있었다. 어찌됐든, 손톱만큼의 영기도 흡수할 수 없었던 이전보다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과였다.
이준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 미세한 영기를 천천히 위로 올려 미간 속에 넣었다.
영기가 미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머릿속에서 미세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이는 바로 영혼 속 영기가 증가할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영기를 영혼 속에 융합시킨 이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겨우 한줌도 안 되는 영기를 얻기 위해 한 시간이 걸렸으니 ‘영혼단계’의 영혼의 힘을 얻으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한 이준은 한숨을 쉰 뒤 다시 수련상태로 들어가 영기 추출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 * *
이준이 다시 눈을 뜬 것은 아침을 알리는 태양빛이 방안을 비출 때가 되어서였다.
하룻밤 동안의 노력으로 이준은 총 여덟 주먹 정도 분량의 영기를 흡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영기를 흡수하는 과정을 반복할수록 처음보다 점점 숙련이 되면서 한주먹 정도의 분량을 얻는데 필요한 시간이 크게 줄어있다는 점 이었다.
여덟 가닥의 영기를 흡수한 덕인지, 밤을 꼬박 샜는데도 피곤하기는커녕 아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보아도 지금 이준의 모습은 밤새 수련한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후우…….”
수련을 마친 이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은 뒤 폴짝 뛰어 침대에서 내려왔다. 지난 번 별의 불꽃을 만났을 때나 연금혼의 상태에 들어갔을 때의 성과와 비교하자면 미미한 에너지에 불과했지만, 다른 연금술사들은 엄청나게 귀한 약재나 연금비약을 통해서나 간신히 성장시킬 수 있는 영혼 에너지를 흡수할 방법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문을 열고 나가자, 마당에서 천화존자와 유종길, 아라 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이 유씨 가문의 명운이 달린 날이기 때문인지, 유종길의 얼굴은 전에 없이 어두웠다.
이에 이준은 유종길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욱 크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준 선생,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유종길이 예를 표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어서 가죠 장로님. 오늘 반드시 유씨 가문에게 오대 가문의 자리를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유종길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던 이준은 또 다시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앞장서 유씨 가문의 별장을 빠져 나갔다.
* * *
오대 가문의 심사는 연금성 내곽지역에 위치한 한 심사장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곳은 오로지 오대 가문이 될 자격이 있는 가문을 선별하기 위해 지어진 공간으로, 이런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 두었다는 것만으로 연금탑이 오대가문의 심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심사는 비밀리에 거행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격을 가진 세력들은 모두 심사가 시작할 때 이곳에 모여 오대가문의 심사를 직접 볼 수 있었다.
현재 유씨 가문은 아슬아슬한 위치에 놓여 있어 이번 심사에서 통과하지 못한다면 오대가문의 대열에서 빠지게 되니,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많은 세력이 심사장에 와 있었다. 유씨 가문이 빠지면 연금탑의 다른 가문 중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니, 모두들 유씨 가문이 심사에서 탈락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 * *
이준 일행이 유종길을 따라 엄청나게 큰 심사대전 앞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사방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갑시다.”
거대한 시험대전을 바라보는 유종길의 얼굴은 마치 절벽 앞에 선 사람의 그것마냥 비장하고 어두웠다.
말을 마친 유종길은 앞장 서 대전 입구로 들어갔고, 이준, 아라, 선화, 그리고 천화존자가 그 뒤를 따랐다.
유종길이 나타나자, 심사장에 자리잡고 있던 수 십, 수 백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그를 향했다.
“유씨 가문 사람들이야.”
“크큭, 이번에 또 실패하면 유씨 가문은 오대 가문에서 퇴출되겠지.”
“쯧쯧, 유씨 가문은 오대 가문에서 단씨 가문과 유일하게 맞먹는 가문이었는데, 어떻게 저런 꼴이 됐담…….”
“사람 앞일이야 모르는거지.”
관객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유종길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는 유씨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끝내 가문을 부흥시키지 못 했고, 지금은 외부인인 이준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었으니 마음이 참담했다.
과거가 찬란할수록 비참함도 커지기 마련이니, 지금 사람들의 조롱 섞인 말들이 모두 유종길에게는 비수가 되어 꽂히고 있었다. 심지어 입구에 서있던 호위병들마저 유종길의 가슴팍에 붙어있는 유씨 가문의 휘장을 보곤 옅은 조소를 띠고 있으니, 유씨 가문이 얼마나 큰 모욕을 당해왔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호위병에 불과했으니, 차마 유종길에게 대놓고 모욕을 주지는 못 하고 손을 대충 휘저으며 옆으로 살짝 비켜선 뒤 대전 안을 향해 큰 소리로 유씨 가문의 사람들이 왔음을 알렸다.
“유씨 가문 도착!”
대전에 들어서자, 따뜻한 불빛이 내리쬐는 것이 느껴졌다.
이준은 눈을 살짝 위로 치켜들고 대전 안을 훑었다. 대전 주위에 마련된 좌석에는 이미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보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자리에 있는 자들 중 가장 약한 사람도 1성 투종 정도는 되었으니, 아마도 아무에게나 심사장에 들어올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장 앞에 있는 자리가 단씨, 조씨, 백씨, 고씨 사대 가문의 자리입니다.”
유종길이 이준 일행을 이끌고 유씨 가문의 자리로 향하며 조용히 말했다.
대전 가장 앞부분에는 네 개의 의석이 놓여있었다. 지금은 삼대 가문의 사람들만이 와있었는데, 의복에 달린 휘장으로 보아 단씨, 백씨, 구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 때, 주위를 살피던 이준의 시선이 한 곳에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단씨 가문 일행이 있는 자리에서 익숙한 얼굴의 여자 아이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분탑에서 시험을 볼 때 마주쳤던 이상한 소녀였다.
이준의 시선을 느낀 소녀 역시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이준만큼이나 놀란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여자아이는 조금 낯설지만 저 자리에 있는 걸 보니 틀림없이 단씨 가문에서 꽤나 높은 위치에 있나 보군요.”
단씨 가문의 소녀를 바라보던 유종길이 말했다. 곧이어 유종길의 시선이 그녀의 곁에 있는 청색 옷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단헌이 올 줄이야……. 이번에 단씨 가문이 저 녀석을 내보내려고 하는 것 같군요.”
유종길의 목소리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파란 옷을 입은 사내는 외모가 아주 훤칠했고 한 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단헌이라…….”
파란 옷의 사내는 이준과 눈이 마주치자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였다.
“단헌은 단씨 가문에서도 1, 2등을 다투는 인재입니다. 조씨 가문에서도 그보다 나은 실력자는 그 마녀 밖에 없지요. 이번에 저 자가 나온다면 반드시 3등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유종길의 설명을 듣던 이준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백씨 가문의 자리에 며칠 전 자신에게 호되게 당한 그 노부인이 이를 갈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준은 가볍게 그녀를 비웃어준 뒤 곧바로 시선을 돌려 백씨 가문 가장의 앞에 앉아 있는 백색 옷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몸에서는 옅은 냉기가 느껴졌고, 표정도 생김새도 눈빛도 모두 차가워 마치 온 몸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 자가 현재 백씨 가문에서 가장 출중한 젊은 강자, 백용입니다. 백씨 가문에서는 역시 저 자를 데리고 나왔군요.”
유종길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씨 가문은 유씨 가문을 오대 가문자리에서 내려오게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려는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