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화. 현명종
“이 동판이 무슨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상고 시대의 물건이라는 것만은 확실하지.”
노인의 말에 순간 주위에서 기웃거리던 다른 연금술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준의 손에 들린 동판으로 향했다.
“그래요? 정말로 이 물건이 상고시대의 물건이라고요?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이준은 속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면서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동판을 내려놓으며 질문을 던졌다.
“이 위에 그려진 무늬를 고서적에서 본 적이 있소. 하지만 어디에 쓰이는 지는 나도 모르니 나에게 묻지 마시오. 그리고 안다고 해도 내가 알려주겠소?”
지저분한 노인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어쨌든 이 물건이 상고시대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단언할 수 있소. 살 거요, 말 거요?”
지저분한 노인의 대답에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판매하는 사람의 말만을 믿고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는 물건을 산단 말인가?
“이 동판은 어떤 것과 바꾸겠소?”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의 조합표와 바꾸겠소.”
이준의 질문에 노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이 물건의 가치를 알아볼 사람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무 비싸네요. 이 동판이 정말로 상고시대의 물건이라 해도 반드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골동품을 상고시대의 물건이라고 가치를 그렇게 매기시면 안 되지요. 됐습니다, 눈꽃 인삼이나 교환하죠.”
이준이 저장반지 안에서 옥병을 꺼내 가판대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노선생님, 이건 명상의 비약입니다. 7레벨 중급의 연금비약으로, 제련할 때 이것을 복용하면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연금비약의 제련 성공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눈꽃 인삼과 바꿀만하지 않겠습니까?”
‘명상의 비약’은 상당히 진귀한 연금비약 중 하나로, 7레벨 고급 연금술사라면 명상의 비약의 힘을 빌어 8레벨 연금비약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정도의 물건이라면 거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명상의 비약’이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노인이 눈을 빛내며 옥병을 받아들더니 잽싸게 그 안에 들어있는 연금비약을 꺼내들었다.
“정말로 명상의 비약이군. 그것도 아주 상등품이야.”
이준이 내민 물건이 진품임을 확인한 노인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번져 나갔다. 그의 실력이라면 명상의 비약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에게 조합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헤헤, 젊은 놈이 아주 귀한 것을 들고 다니는구만! 좋아 좋아!”
지저분한 노인은 연금비약을 그대로 저장반지 안에 넣고는 신이 난 듯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이준 역시 웃으며 가판대 위에 놓인 눈꽃 인삼을 자신의 저장 반지 안으로 집어넣은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했다.
“잠깐!”
바로 그 때, 노인이 벌떡 일어나 다급한 목소리로 이준을 불러세웠다.
“예?”
“헤헤, 젊은이. 이 동판은 안 가져갈 셈인가?”
지저분한 노인이 옥석대 위에 있는 동판을 가리키며 친절한 말투로 물었다.
이준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고개를 저었다.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는 물건을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의 조합표와 바꿀 수는 없죠. 싫습니다.”
이준의 단호한 태도에 노인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다시 그를 붙잡았다.
“아 젊은 사람이 어찌 그리 성격이 급한가!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은 됐고, 명상의 비약의 조합표와 바꾸는 것은 어떤가?”
그의 말에 이준은 조금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선뜻 답을 내놓지 않았다.
명상의 비약의 조합표는 7레벨 고급 조합표 만큼 귀하진 않지만, 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동판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가치가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물건과 바꾸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이었다.
‘이준, 바꾸게.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네. 저 영감이 저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야.’
바로 그 때, 천화존자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이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천화존자의 식견은 이준은 물론이고 눈앞의 노인에 비해도 월등하게 높았으니, 눈앞의 동판이 정말 뭔가 대단한 물건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저분한 노인은 저장반지 안에서 또 다시 옥함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옥함 안에는 눈꽃 인삼이 하나 더 들어 있었는데, 가판대에 올려두었던 것보다 훨씬 순도가 높은 물건이었다.
“눈꽃 인삼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 연금비약을 만들기 위해서겠지? 그렇다면 순도가 높은 물건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나? 자네도 알겠지만, 이 정도 눈꽃 인삼이라면 어디 가서도 구할 수 없을 것이네. 명상의 비약의 조합표라면 동판과 이 눈꽃 인삼을 함께 주겠네.”
지저분한 노인의 말투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명상의 비약 조합표가 어지간히 탐나는 모양이었다.
눈앞의 최상급 눈꽃 인삼을 확인한 이준은 더 이상 흥정을 하려 들지 않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은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 여기서 무언가를 더 뜯어내려 했다가는 그 다음에는 어떤 물건을 내놓아도 동판을 얻지 못 할 것 같았다. 이 노인의 괴팍한 성격으로 봤을 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자신의 저장반지 안에서 새하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이 두루마리를 넘겨받자, 이준은 눈꽃 인삼을 먼저 챙겨넣은 뒤 동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준의 손에 동판에 닿으려는 찰나, 자주색의 철편 하나가 번개처럼 동판 앞을 가로막았다.
“허허, 이보게 친구, 이 동판은 나도 눈독 들이고 있었는데, 나에게 넘기지 않겠소?”
고개를 돌려보니 새하얀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온화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음산하고 사악하기 짝이 없었다.
백색 옷을 입은 청년 뒤에는 세 명의 노인이 서있었는데, 그 중 두 사람은 8성 투종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정확한 실력은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투존급의 강자였다.
‘투존이라니…….’
갑작스런 상황에 흥미를 느꼈는지, 경매장에 있던 연금술사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으로 쏠렸다.
정체도 알 수 없는 동판 하나를 두고 각각 투존 둘과 투존 하나에 투종 둘을 끌고 다니는 두 청년이 맞붙었으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허허, 자네가 낸 가격에 두 배를 낼 테니 나에게 넘기지 않겠소?”
백색 옷의 청년이 손에 들린 자주색 철부채로 동판을 더욱 세게 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은 고민조차 해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대답과 동시에 이준이 두 손가락을 굽히자, 강렬한 힘이 터져 나오며 자주색 철부채를 밀어냈다.
다음 순간, 자주색 철편이 펼쳐지며 이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단순히 상대를 다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끊으려는 의도가 다분한 공격이었다.
이에 이준의 표정 역시 싸늘하게 얼어붙으며 그의 몸에서 곧바로 청록색 염력이 솟구치며 철편을 막아냈다.
펑!
청년의 철편을 막아낸 이준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청년의 얼굴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생각보다 이준의 반격이 매섭자, 청년은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철편을 내려놓고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무엄하도다.”
그 순간, 8성 투종 정도의 노인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이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자 아라와 천화존자 역시 번개처럼 몸을 움직여 두 투종의 앞을 가로막았다.
“조심하시오!”
곧이어 아라의 손에서 매캐한 독향을 내뿜는 회색 염력이 터져 나오자, 뒤에 서있던 투존 강자가 공간을 왜곡시켜 아라의 회색 염력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미 아라의 독을 들이킨 두 투종 강자는 현기증을 느낀 듯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왜? 제대로 붙어볼까?”
아라가 백색 옷의 청년과 그의 뒤에 서있는 세 노인을 바라보며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의 뒤에 서있던 두 사람이 모두 투존이라는 것을 확인한 청년은 놀란 듯 눈을 치켜뜬 채 무언가 곰곰이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돌연 태도를 바꿔 이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명종의 진한이라고 합니다. 귀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
“현명종?”
‘현명종’이라면 빙하곡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세력 중 하나였다. 물론 현명종은 단독으로 빙하곡과 겨룰 만큼 강한 세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중주에서 가장 강한 세력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천명종’이 있었으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명종의 휘하에는 ‘삼종(三宗)’이라고 하는 강대한 세력이 있었는데, 현명종역시 그 ‘삼종’ 중 하나였다.
“현명종에 비하자면 보잘 것 없는 이름이니 굳이 아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동판은 넘길 생각이 없으니 그만 가주시지요.”
현명종이라는 이름을 꺼내 들었음에도 상대가 물러서지 않자, 청년의 표정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는 않았다. 투존을 둘이나 데리고 다니는데다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7레벨 중급 연금술사인 것을 보니, 이준이 어딘가 대단한 세력의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동판을 나에게 주면 어떤 가격을 부르든 그의 두 배를 내겠소.”
이에 진한은 곧바로 전략을 바꿔 지저분한 차림의 노인을 설득하려 했다.
진한의 제안에 노인은 동판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을 하는 듯 하다가 이내 그 동판을 이준에게 건넸다.
“이 바닥에서 신용보다 중요한건 없지. 이미 거래는 끝났소이다.”
동판을 건네받은 이준은 환히 웃으며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노선생님.”
“그리고 젊은이, 내가 충고하나 해주지. 현명종이 아니라 천명종 사람이 와도 감히 연금탑이 관리하는 경매장에서 행패를 부릴 수는 없네.”
지저분한 노인의 따끔한 한마디에 진한의 표정이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봐, 정말 이런 동판 때문에 현명종과 원한을 맺겠다는 거야? 다시…….”
진한이 다시 한 번 이준에게 거래를 제안하려 했지만, 이준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 곧바로 동판을 받아든 뒤 계단 쪽을 향해 몸을 돌렸고, 그와 동시에 아라의 독에 당한 두 노인이 번개처럼 날아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도련님의 말씀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가느냐!”
“하…….”
도 노인이 이준의 앞을 막아서자 아라와 천화존자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염력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적당히 하지 그래.”
계속되는 억지에 짜증을 참지 못한 듯, 아라의 목소리에서는 어느새 짙은 살기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아라와 천화존자의 무시무시한 기운에 두 장로는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상대의 기세로 보아 여기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정말로 시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해 아라야, 가자. 그리고……. 진한이라고 했나요? 한번만 더 제 앞을 가로막으면 이번에는 정말로 봐주지 않겠습니다.”
두 투존 강자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진한 일행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 사이, 이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뒤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준이 계단을 내려가자, 유종길과 아라, 천화존자 역시 그 뒤를 따라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말없이 네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한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뒤에 서있던 세 노인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현로, 저 자가 누구인지 알아봐. 내 물건을 빼앗아 가놓고 협박까지 하다니. 아주 대단한 세력의 후계자쯤 되는 모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