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화. 동판
2층은 아래층보다 사람이 적었고, 모두 조용히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찾아 낮은 목소리로 노점상 주인과 거래했다.
이준은 말없이 수정으로 만든 가판대 위를 훑어보다가 붉은색 타원형 열매 하나를 발견하고는 발을 멈춰 섰다. 새하얀 옥함 안에 놓인 그 열매에서는 기이한 핏빛과 생기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기이한 열매는 바로 ‘요괴의 열매’라는 약재로, 깊은 산 중에서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생명 에너지를 흡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 요괴의 열매는 ‘생골의 영약’이라는 연금비약의 주요 재료 중 하나였으며, 생골의 영약은 바로 이준이 이번 연금대회에서 제련하려는 연금비약이었다.
‘생골의 영약’은 7레벨 최고급, 심지어 8레벨 연금술사들도 제련하기 어려워하는 물건으로, 제련을 위해 필요한 약재 역시 하나 같이 진귀한 것들 뿐이었다.
사실 이준이 ‘생골의 영약’을 만들려는 이유는 꼭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약로를 구하고 나면 몸을 만들어야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몸을 제련하려면 이 생골의 영약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골의 영약을 제련해 내려면 요괴열매, 만년청의 영혼넝쿨, 눈꽃 인삼 이 세 가지 주재료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준은 지금까지 눈앞에 있는 이 요괴열매만을 찾았을 뿐, 나머지 두 재료는 아직 얻지 못했다. 이 재료는 유씨 가문에도 없을 만큼 아주 희귀한 재료였다.
‘요괴 열매’를 판매하고 있는 나이든 연금술사의 가슴에는 6레벨 연금술사의 휘장이 달려 있었다.
“허허, 무슨 물건이 마음에 드시오?”
붉은 의복을 입은 노인은 이준의 가슴팍에 달린 휘장을 보고 잠시 놀라다 웃으며 공손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물건은 어떤 물건과 바꿀 수 있습니까?”
이준이 요괴열매를 가리키며 말했다.
“허허, 요괴열매가 마음에 드시는구려. 선생도 이 요괴열매가 얼마나 희귀한 지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을 제련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난 크게 알려지지 않은 7레벨 중급 연금비약의 조합표를 원하고 있소…….”
그의 대답에 이준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요괴열매가 아무리 구하기 어려워도 누가 7레벨 중급 조합표 같은 가치도 매길 수 없는 귀한 물건과 교환하겠습니까?”
물론 이준에게는 약로가 남겨둔 고급 조합표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마구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요괴열매가 아무리 귀하더라도 7레벨 중급 연금비약의 조합표와 바꾸자는 것은 날강도나 다름없는 제안이었다.
노인은 조금 난감하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거래 조건을 바꿀 생각은 없어보였다.
결국 이준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린 뒤 선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꼭대기 층을 둘러보고 올게. 넌 여기 있으면서 요괴열매, 만년청의 영혼넝쿨, 눈꽃 인삼 같은 희귀한 약재를 구해줘. 조건이 맞으면 7레벨 중급 연금비약 세 개와 바꾸자고 하고.”
선화와 대화를 마친 이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홍색 의복의 노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내 교환 조건이오. 교환할지 말지는 알아서 결정하고, 바꿀 생각이 생긴다면 이 아이를 찾으십시오.”
노인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이준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려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사실 7레벨 중급 연금비약과 요괴의 열매를 교환하는 것도 그가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 조건조차 받아들이지 못 하겠다면 굳이 거래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준이 휑하니 계단으로 올라가 버리자, 노인은 말없이 입맛을 다셨다. 보통 이런 종류의 거래는 버티는 사람이 승자였다. 하지만 이준은 정말로 관심도 없다는 듯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그대로 발을 움직여 윗층으로 향했다.
꼭대기로 향하는 계단 입구에는 두 명의 노인이 인자한 표정으로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연금술사 휘장이 없었지만 그들에게서 퍼져 나오는 강한 염력으로 보아 두 사람 모두 투종 수준의 강자였다.
두 사람은 이준 일행을 보곤 잠시 당황하다 이준의 가슴팍에 달린 휘장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훑더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이렇게 어린 7레벨 연금술사는 중주에서도 보기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준에 이어 유종길, 아라, 천화존자에게로 시선을 옮긴 두 사람은 더욱 놀란 듯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아라와 천화존자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두 사람이 투존이라는 것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서른도 되어 보이지 않는 7레벨 중급 연금술사가 투존 둘을 대동하고 나타났으니, 그들은 이준이 틀림없이 엄청난 세력의 후계자쯤 되리라고 생각했다.
“허허, 귀빈들께서 오셨군요.”
두 사람 중 황색 옷을 입고 있던 노인이 먼저 앞으로 나오며 공손하게 말했다.
이준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는 분들인 듯한데, 연금술사 경매장에는 처음이신지요?”
황색 옷을 입은 노인이 웃으며 물었다.
“설마 꼭대기 층은 단골들만 들어올 수 있는 건가요?”
이준의 질문에 황색 옷의 노인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허허, 그럴리가요. 그저 처음 보는 귀빈들이라 호기심에 여쭈어 본 것 뿐입니다. 꼭대기 층으로 가시려면 절 따라오시지요.”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이준 일행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이준은 누군가가 자신을 은밀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섯 명 모두 만만치 않은 실력자인 것 같았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즉시 그들이 튀어나와 문제를 해결할 것이 분명했다.
‘역시 연금탑에서 관리하는 경매장답군.’
연금술사 경매장의 꼭대기 층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지만, 신비한 연청색의 빛을 발하는 돌로 이루어져 있어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꼭대기 층을 오가는 사람들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영향력으로 치자면 아래에 있는 두 층의 연금술사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그들을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이준 일행이 나타나자, 꼭대기 층에 있던 연금술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그를 훑어보았다.
서른도 되지 않은 7레벨 중급 연금술사와 투존 강자 둘이라니……. 중주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허허, 정보를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 하시지요.”
황색 옷을 입은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말했다.
“만년청의 영혼넝쿨과 눈꽃 인삼, 이 두 재료가 필요합니다.”
“만년청의 영혼넝쿨과 눈꽃 인삼이라……. 두 개 모두 희귀 약재로 고급 연금비약을 제련하는데 쓰이겠군요. 만년청의 영혼넝쿨은 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만, 눈꽃 인삼은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인가요?”
이준이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허허, 그렇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노인의 뒤를 따라 꼭대기 층의 북쪽 구석으로 걸어가자, 신비한 청색 빛을 띠고 있는 가판대 위에 약재와 두루마리, 연금비약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준의 시선이 옥색 가판대를 넘어 그 뒤에 서있는 회색 머리카락의 노인에게 멈춰 섰다. 다소 지저분한 차림을 하고 있는 노인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판대 앞에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 연로. 오늘 장사가 잘 되는구려.”
황색 옷의 노인이 그 지저분한 차림의 노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좋긴 무슨! 이 자식들은 보기만 실컷 보고 비싸다면서 사지도 않을 텐데. 퉤, 내 물건이 비싸네 어쩌네 할 놈들은 그냥 다른 곳으로 가란 말이야!”
노인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의 가슴팍에는 7레벨 고급 연금술사임을 의미하는 휘장이 달려있었다.
“이것이 선생님이 찾으시는 눈꽃 인삼입니다. 하지만 이 연로의 물건은 꽤나 비싸서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황색 옷의 노인이 석대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옥함 안에는 뼈처럼 새하얀 인삼이 놓여 있었다.
이준은 그 새하얀 인삼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그리 보지 마시오. 내 가게에는 가짜가 없소. 살 거요?”
지저분한 차림의 노인은 이준의 가슴팍에 있는 휘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꽃 인삼은 7레벨 고급 연금비약과 바꿀 수 있소.”
그의 말에 이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이라니……. 바가지가 조금 심했다.
“노선생님. 눈꽃 인삼은 귀하지만 눈꽃 인삼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귀한 물건이 7레벨 고급 연금비약 아닙니까. 게다가 다른 약재들도 있어야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을 만들 수 있는 것인데,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의 재료 중 하나에 불과한 물건으로 완성된 연금비약을 구하겠다는 것은 좀 억지 아닙니까?”
이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 이 녀석 말 한번 잘 하네. 그래, 그럼 이 영감이 한 발 물러서 7레벨 중급으로 합세. 하지만 반드시 내가 마음에 드는 연금비약이어야 하네.”
지저분한 차림의 노인이 돌연 태도를 바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을 조건으로 내건 것은 그저 운 좋게 그 가격에 팔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한 말 같았다.
그의 말에 이준 역시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7레벨 중급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지저분한 차림의 노인이 파는 다른 물건들도 모두 고급이었다. 심지어 눈꽃 인삼보다 훨씬 비싸 보이는 물건들도 제법 많아 보였다.
약재들을 훑어보던 이준의 시선이 옥석대 구석에서 멈춰섰다. 그곳에는 옅은 황색을 띠는 동판이 있었는데, 초록색 녹이 가득했지만 자세히 보면 동판 위에 신비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물건들과 달리 그 동판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기운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평범한 그 동판의 모습에 이준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이준, 가능하다면 이 동판을 사두게. 이 무늬를 아주 옛날에 본 적이 있었는데 확실한 용도는 모르지만 고대에도 있던 물건이라면 보통 물건은 아닐걸세.’
그 때, 천화존자의 목소리가 이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한참동안이나 동판을 바라보던 이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다른 약재들을 훑어보다 말없이 그 동판을 집어 들었다.
동판을 손에 쥐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동판에서 차가운 기운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판대를 만드는데 사용된 옥색 돌의 냉기 때문에 차가워진 것에 불과했다.
이준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손가락으로 동판의 윗부분을 살짝 문질러 보았다.
촉감이 거친 것이 역시 특별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위에 그려진 복잡한 무늬만 아니었다면 어느 누구도 이 물건을 거들떠 보지 않았을 것 같았다.
“모두 옛날 물건들 입니까?”
이준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치 그 물건에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지만, 단순히 호기심에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준의 그런 모습에 노인은 눈을 굴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그 동판은 이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진 물건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사려고 하지는 않았다.
“꾸물대지 마시오. 그 동판의 가격은 눈꽃 인삼의 가격보다 비싸면 비쌌지 싸게 팔지 않을 것이고, 흥정도 없소이다.”
귀를 후비적거리던 노인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눈꽃 인삼보다 비싸다고요? 이 동판이 무슨 신기한 힘이라도 갖고 있나보죠?”
“모르오.”
노인의 뻔뻔한 답변에 이준은 당혹스러운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당당하게 모른다고 말을 하니 되려 질문을 던진 자신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