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별하늘
“그러고 보니 몇 년 동안 밤하늘을 본 적이 없었네. 그래도 청산마을에 있는 작은 산골짜기에서 봤던 밤하늘이 더 예쁘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라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이준 역시 웃으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음에 가한제국에 돌아가면 같이 청산 마을에 가보자. 이제 들어가 봐.”
이준의 말에 아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짓고는 가볍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으아아, 그럼 나도 이제 가볼까.”
아라와 인사를 나누고 막 방으로 가려던 이준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저게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유독 반짝이는 별 하나가 새로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별에서는 기이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 별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이준은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채 하늘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자세로 몇 시간이나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던 이준은 돌연 눈을 감고 영혼의 힘을 불러내 하늘 위로 올려 보냈다.
영혼의 힘이 하늘에 물결처럼 퍼져나가자, 그 유난히 빛나는 별에서 희미하지만 농밀한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준의 영혼이 그 농밀한 에너지에 닿는 순간, 그의 몸이 옅은 빛을 발하며 발밑에 있는 메마른 풀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던 이준은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그의 영혼의 힘 앞에 거대한 용 한마리가 나타났다. 시야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가진 그 거대한 용의 몸 위에는 보랏빛과 검은빛이 섞인 신비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에서는 낯설지만 익숙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별……별의 불꽃!?”
“누가 감히 겁도 없이 별의 구역에 들어오는 것이냐!”
하지만 이준이 용의 몸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이 천지의 불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준의 영혼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이준은 황급히 영혼의 힘을 회수한 뒤 번쩍 눈을 떴다.
“하늘 위에 별의 불꽃을 숨겨 놓았던 거였어!”
연금성 내곽 방향의 하늘을 한참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준이 시선을 거두며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역시 연금탑답군! 이렇게 무시무시한 강자가 있다니…….”
조금 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모습조차 비추지 않고 그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 영혼의 힘이라면 최소한 8레벨 연금술사는 될 것이 분명했다.
쓴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리던 이준은 바닥을 보고는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메말라 있던 땅에 어느새 파릇파릇한 풀들이 가득 자라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영혼의 힘이 불과 몇 분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이 별의 불꽃과 접촉하면서 벌어진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설마 이게 별의 불꽃의 힘인가……?”
* * *
한편, 연금성의 내곽 지역에 있는 이공간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좀 전에 어떤 자가 별의 구역을 염탐했소.”
허공에서 나이든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누가 별의 구역을 탐지할 수 있단 말이오?”
“모르겠소. 하지만 영혼의 힘이 꽤나 강한 것이 영혼의 힘이 영혼 단계에 진입한 8레벨 연금술사인 것 같았소.”
“설마 영혼의 궁전 놈들인가? 정보에 의하면 이번 연금대회에 놈들도 참가할 것이라더군. 만일 그들이 10위 안에 든다면 분명 별의 불꽃에 손을 쓸 텐데…….”
“모르겠소. 염탐한 자의 영혼을 공격했지만 큰 부상을 입히지는 못했을 거요.”
“경계를 강화합시다. 별의 불꽃이 별빛을 흡수해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계속 봉인한 상태로 두는 것은 불가능 하오. 일단 봉인이 깨지면 연금성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으니 이 별의 불꽃을 흡수할 자를 빨리 구해야 합니다. 단, 절대로 영혼의 궁전 놈들에게 넘겨서는 안 되오.”
“그놈들은 대체 그렇게 많은 영혼체를 잡아다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게요?”
그 사람의 말을 마지막으로 이공간에 적막이 흘렀다.
“약선도 놈들의 손에 있다고 들었소.”
잠시 적막이 흐르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서서히 울려 퍼졌다.
“약선이라…….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구려. 그 까탈스런 영감이 선택한 제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군. 틀림없이 남보다 뛰어난 구석이 있을 것이오. 조씨 가문, 단씨 가문에 있는 그 두 젊은이와 비교하면 어떤 수준일지…….”
“그 둘은 백년 후에 연금탑의 수장이 될 만한 인재들이오. 아무리 약선의 제자라도 그들과는 비교하기 어렵지 않겠소?”
“됐습니다, 우선 대회 준비에 집중합시다. 정말 어떤 음모가 있었다면 고족과 숨어있는 오래된 세력들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별의 불꽃이 영혼의 궁전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오. 해산합시다. 당분간 좀 더 주의해 주시오.”
“그럽시다.”
마지막에 울려 퍼진 대답을 끝으로 이공간에서 이루어진 연금탑 우두머리들 간의 대화가 끝났다.
* * *
“이준 선생,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다음 날 아침, 유종길이 조심스럽게 이준의 방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가는 겁니까?”
“네, 연금탑에 있는 시험장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먼저 등급 휘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머지 분들은 여기에서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종길의 등 뒤에는 아라가 서있었다. 아마도 이준을 혼자 보내기가 걱정이 되어 함께 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준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알겠다는 듯 두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럼 다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라가 방으로 돌아가자, 이준과 유종길은 곧바로 몸을 돌려 별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장을 빠져 나와 십분 정도를 걸어간 두 사람은 연금성 외곽지역에 있는 한 석탑 밖에 멈춰 섰다. 석탑 밖에는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소란스러운 소리가 물결처럼 확산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연금탑이 설립한 분탑(分塔)입니다. 일부 제국에 있는 연금술사공회의 분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지요.”
유종길이 이준과 함께 사람들을 따라 아주 고풍스러운 석탑 안으로 들어가며 낮은 목소리로 분탑을 소개했다.
석탑 내부 공간은 가한 제국의 연금술사 공회 총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으며 그 안에는 연금술사 복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탑 안 북쪽에 거래소가 있는데, 많은 연금술사들이 그 거래소에서 각자 필요한 약재와 연금비약 등을 구매하지요.”
설명을 마친 유종길이 석탑의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사실 아주 좋은 물건은 이곳에 없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연금성에서 특별한 경매를 여는데, 이 경매는 연금탑이 인정한 연금술사들만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정말 좋은 물건들은 그곳에서만 구매할 수 있지요.”
그의 말에 이준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술사들 간의 거래로 이루어지는 경매장은 아주 드물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든 없든 식견을 넓힐 수 있으니 그 경매장을 방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허허, 우선 따라 오십시오. 휘장을 받으려면 남동쪽 구역으로 가야합니다.”
유종길은 웃으며 몸을 돌려 남쪽 구역을 향해 걸어갔고, 이준 역시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심사 구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
“우선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가서 아는 사람과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다간 오늘중에 심사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져가는 유종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 때, 등에서 누군가와 부딪히는 느낌이 났다.
“아……!”
놀란 목소리가 이준의 등 뒤에서 들려오자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한 소녀가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본 이준은 급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됐어요!”
소녀의 손을 붙잡는 순간, 이준은 미간에 머물러 있던 영혼의 힘이 갑자기 힘차게 솟아올라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당황한 이준은 황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소녀의 가슴팍에는 문양이 그려진 둥근 휘장이 달려 있었었다.
“단씨 가문……?”
열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의 낯빛은 환자의 그것마냥 창백했다.
하지만 이준의 시선을 끈 것은 소녀의 창백한 얼굴이 아닌 가슴팍에 달려 있는 둥근 휘장이었다.
“괜……괜찮죠?”
소녀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제서야 이준은 단씨 가문의 휘장에서 시선을 떼며 놀란 눈빛으로 소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열 예닐곱 살의 소녀에게서는 왠지 모를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이준을 놀래킨 것은, 그녀와 손이 닿는 순간 느껴졌던 기묘한 감각이었다. 마치 영혼이 빨려 나가는 것만 같은…….
“괜찮아요.”
이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연신 이준을 훑어보았다.
“저……. 미안해요.”
그렇게 잠시 걱정스런 표정으로 상대를 훑어보던 소녀는 그 말만을 남기고 이준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갑시다.”
그 때, 뒤쪽에서 유종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이준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죠.”
그러자, 유종길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연락을 해봤는데, 특실을 사용해도 된답니다. 하지만 오늘 그 특실 안에 다른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내일 다시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가문이요?”
그의 말에 유종길은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백씨 가문과 구씨 가문 사람들이 이 안에서 시험을 본답니다. 예전에 는 두 가문 모두 저희 유씨 가문보다 아래였지만, 저희 가문이 몰락하고 난 뒤로는 저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마주 쳐서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준이 안심하라는 듯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죠.”
그의 말에 유종길은 잠시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뭐라 해도 듣지 않으면 되겠지요.”
말을 마친 유종길은 몸을 돌려 특별 통로로 향했고, 이준이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몇 분 정도 걸어가자, 밝은 빛이 가득한 널따란 공간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허허, 유종길 장로, 이번에 또 심사를 보러올 줄 몰랐군.”
이준과 유종길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귀를 찌르는 비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회색 옷을 입은 한 노부인이 누런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유종길과 이준을 비웃고 있었다.
회색 옷을 입은 장로 뒤에는 하얀색 옷을 입은 젊은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서있었다. 세 사람 역시 노부인과 마찬가지로 유종길을 보자마자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저 여자가 백씨 가문의 사람입니다.”
유종길이 이준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또 다른 곳에 서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 중 가장 앞에 선 것은 황색 옷을 입은 노인으로, 그 뒤로는 훤칠한 외모를 가진 남자 한 명과 예쁘장한 여자 한 명이 서있었다.
그 세 사람은 유종길을 발견하더니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도 구씨 가문의 사람들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