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화. 장로석
“고계에서 기다리고 있어. 스승님을 구하고 난 뒤에 내가 그 곳으로 갈게.”
자신을 찾으러 오겠다는 이준의 말에 이은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을 게요…….”
말을 마친 이은은 이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사익독각수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하하, 도련님 다음에는 더 강해져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곧이어 이은을 호위하던 두 노인 역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사익독각수의 머리 위로 이동했다.
이은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사익독각수가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네 개의 날개를 펼쳐 꽃잎성 밖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오라버니, 몸조심하세요. 기다리고 있을 게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이준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거대한 검은 마수들이 사라지자, 마당 위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준은 멍한 눈빛으로 이은이 사라진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잖아.”
잠시 후, 아라가 이준의 뒤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마당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종길 장로님,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허허, 물론이죠.”
이준의 말에 유종길과 선화가 나란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준이 몸을 돌려 석정 안에 들어가 앉자, 유종길과 선화 역시 나란히 석정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유종길 장로님, 연금술 대회 시작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그리고 대회가 시작하기 전에 이루어진다는 선발에 대해서 여쭤 봐도 될까요?”
이준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는 대회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유종길을 통해 이와 관련된 정보를 얻어야 했다.
“대회까지는 아직 7개월 정도가 남았으나, 연금술 경연 대회는 중주 전체에서 가장 성대한 대회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이 대회가 시작되기 반년, 심지어 일 년 전부터 연금성에 찾아와 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유종길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연금술 대회에 참가하는 자는 우선 추천서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이준 선생님의 추천서는 제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유씨 가문은 점점 몰락하고 있지만 아직 추천서를 작성할 자격 정도는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유종길은 잠시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연금술 경연대회는 실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지요. 심지어 나이에도 거의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평생에 단 한번만 참여할 수 있으니, 실력이 무르익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렸다가 머리가 새하얘지고 나서야 참가하는 자들도 있지요.”
“나이 제한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젊은 연금술사들에게는 조금 불리한 것 아닙니까?”
가만히 유종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허허, 그런 이야기도 있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그것이 억울하다면 실력을 기르다가 늘그막에 참가해도 되니까요.”
이준의 질문에 유종길은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어보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됐든 연금술 대회 선발은 천(天), 지(地), 인(人) 세 단계로 나뉘어 세 번의 선발을 거치고, 천 계급에서 선발되어 남은 연금술사들에게 마지막 승부를 겨룰 자격이 주어집니다.”
“천지인 삼 단계요?”
순간 이준의 두 눈썹이 움찔거렸다. 역시 투기 대륙 최고의 연금술 대회답게 선발 과정만 해도 상당히 복잡한 것 같았다.
“허허, 그래서 대회에 참가하는 자들 중 대부분은 두세 달 전에 연금성에 찾아와 준비를 시작하지요.”
“네 달이라…….”
그의 말에 이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의 불꽃을 얻어내려면 반드시 대회에서 십 등 안에 들어야 했다. 강제로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금탑의 연금술사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그들 뿐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모든 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네 달간은 연금술 수련에 집중해야겠는걸.’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투기 대륙 전체에서 가장 큰 연금술 경연 대회인 만큼 그 엄청난 사람들 속에서 열 명 안에 들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생각을 마친 이준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곁에 있는 선화를 쳐다본 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종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종길 장로님, 저는 유씨 가문에게 장로석 자리를 되찾아주겠다고 선화와 약속했습니다. 저는 뱉은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니,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것이 없으니 장로님께서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화와 유종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유종길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준 선생.”
유종길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숨을 고르고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연금성 안에는 다섯 개의 가문이 있는데, 그 오대 가문의 가주들이 힘을 합쳐 연금탑이라는 세력을 만들었지요. 저희도 한 때는 그 오대 가문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순간 유종길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죄송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것이 아니었을 텐데……. 어찌됐든, 지금 연금탑에서는 심사를 통해 장로석을 배분하고 있습니다.”
“심사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이준이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금탑은 어린 나이의 강자들을 키워내는데 아주 공을 들이고 있지요. 해서 이 심사 역시 젊은 인재를 얼마나 길러내고 있는지를 중점으로 평가합니다.”
유종길은 이 대목에서 곁에 있는 선화를 바라보다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선화 역시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어린 나이에도 불과하고 5레벨 연금술사가 되는데 성공했지만, 그 정도 재능으로는 연금탑의 장로석 자리를 되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사가 열리면 오대가문의 젊은 장로는 연금탑에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만일 통과한다면 장로석 자리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장로석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지요.”
유종길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 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우리 유씨 가문은 이미 두 번이나 심사에 탈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통과하지 못한다면 연금탑 장로석에 들어갈 자격이 완전히 박탈되고, 오대가문 자리에서도 내려오게 되겠지요.”
“심사 조건이 까다롭습니까?”
이준의 질문에 유종길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심사에 참가하려면 최소 6레벨 연금술사여야 하고, 7레벨은 되어야 통과할 확률이 있습니다.”
“7레벨이라……. 어렵지는 않겠네요.”
“네, 이준 선생이라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저희 가문의 젊은 연금술사들 중에 이준 선생 같은 재능을 가진 자가 없으니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
유종길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유씨 가문이 이미 두 번이나 떨어졌기 때문에 이번 심사는 반드시 3등 안에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3등 안에요?”
이준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머지 사대가문은 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젊은이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나왔지요. 지금은 우리 가문의 원로들이라 해도 그들을 당해내지 못할 정도입니다.”
유종길이 장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번 심사는 저에게 맡기세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대신 참가해도 되는 것 입니까?”
“사실은 불가능하지만 편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준 선생이 그렇게 해주실 수 있을지…….”
이어지는 이준의 질문에 유종길이 난처하다는 듯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방법입니까?”
유종길이 곁에 있는 선화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연금탑에 추천서를 보낼 때, 이준 선생이 우리 유씨 가문의 예비사위라고 하면…….”
그의 말에 이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선화의 장래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사내라 그렇다 치더라도, 저 아이는 여자인데…….”
“하지만 유씨 가문은 이미 생사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모든 유씨 가문 사람들은 마지막 싸움을 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대가는 모두 저희가 감당하겠습니다.”
유종길의 결연한 태도에 이준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방법으로 하면 제가 유씨 가문을 대신해 그 심사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합니까?”
유종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심사만 통과한다면 유씨 가문은 장로석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유종길의 간절한 표정에 이준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몸을 돌려 나가버린다면, 유씨 가문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선배, 유씨 가문만 무사하다면 하라는 건 뭐든 다 할게요!”
이준이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곁에 있던 선화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황한 이준이 선화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버텼다.
결국 선화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 이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다시 유종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제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유씨 가문에게 장로석을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준의 대답에 유종길은 환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말을 마친 이준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약속을 지켜야 하니 일단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자신보다도 선화가 어떻게 될지가 더 걱정스러웠다.
“그럼 앞으로의 일은 유종길 장로님께 맡기겠습니다.”
“이번 심사는 두 달 후에 시작하니, 두 달 후에 연금성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이준 선생은 필요한 약재가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물건은 유씨 가문이 준비하겠습니다.”
“두 달 후? 그렇게 빨리요?”
두 달 밖에 없다는 말에 이준은 더욱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에휴, 그렇게 하죠.”
하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유종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준과 연금대회와 관련된 일을 다시 의논한 뒤 선화를 이끌고 마당을 빠져나갔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연금술사의 성지, 연금성……. 드디어 그곳에 가는 것이다.
* * *
유종길의 부탁을 받아들인 이준의 마음은 전에 없이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가득찼다. 이제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실력을 다듬어 각지에서 몰려든 천재들을 상대로 대결을 벌여야 했다.
이런 시합은 투사로써 실력을 겨루는 것보다 일면 훨씬 더 까다롭고 어려웠다.
연금비약을 제련할 때는 단 한 순간도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매 순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고, 아주 작은 실수로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고급 연금비약을 제련할 때 들어가는 재료 역시 하나 같이 진귀한 것들 이었으니, 약재를 모으는 것만 해도 중노동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몰락했다고는 하나, 한 때 연금탑의 장로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유씨 가문의 약재 창고에는 진귀한 약재들이 가득 쌓여 있다는 것이었다.
유씨 가문의 도움 덕에 이준은 약재를 찾으러 다닐 필요 없이 연금비약 제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진귀한 약재들을 잔뜩 쌓아놓고 연습을 한다면, 성패 여부를 떠나 연금술사로써 성장하는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으니 이준 입장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연금술사의 세계에서는 천부적 자질만큼이나 경험이 중요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이준의 수련은 대부분 염력을 증가시키고 투사로써의 자질을 갈고 닦는데 집중되어 있었을 뿐, 연금술을 단련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번 연금탑 장로심사와 연금술 경연 대회는 그에게 있어 연금술사로써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