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빚 갚음
아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힘을 느낀 영천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갔다.
“지난번에는 서천우, 이번에는 이 정체 모를 여자까지……. 항상 세 살 배기 어린애마냥 보호자와 함께 다니는군.”
갑작스런 강자의 등장에 영천이 주춤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자, 이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족과 장로들의 이름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게 구는 네 놈이 나에게 할 말은 아니지.”
이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라가 나선 것은 내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야.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널 상대하고 싶거든.”
말을 마친 이준이 뻣뻣하게 굳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영천을 노려보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너…….”
이준의 그런 행동에 아라는 눈썹을 찌푸리며 못 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설마 내가 이런 놈도 상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준은 고개를 돌려 아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에 아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뒤로 걸음을 물렸다.
“오라버니, 모든 결과는 제가 책임질게요.”
이어지는 이은의 한마디에 고족의 두 노인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번졌다. 그들 역시 영천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족 장로회의 옥패를 가져온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유종길 장로님, 죄송하지만 장소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준 선생께서 부탁하시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하늘에 떠있는 사익독각수를 보고 달려온 유종길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대단한 빙하곡을 물러나게 한 소녀와 같은 세력에 속한 사람과 이준이 충돌을 하고 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이 일이 너무 커지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유종길의 양해를 구한 이준은 곧바로 웃으며 영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천 총령, 혼자서 덤빌 겁니까, 아니면 수하들과 함께 덤빌 겁니까?”
이준이 영천을 따라 온 열 명 정도의 강자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건방진 놈. 너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자존심이 상한 영천은 곧바로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은빛 섬광이 터져 나와 순식간에 기다란 장창으로 변화했다.
“실력이 좀 올랐다고 기고만장해져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너와 나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마.”
영천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준의 검은 눈동자에 살기가 어리며 그의 손바닥 위에 거대한 검은 송곳이 나타났다.
치익!
그와 동시에 영천의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솟구치며 손에 들린 장창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장창 끝에서 눈부신 번개가 터져 나오며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변화해 이준에게 돌진했다.
거대한 뇌룡이 포효하며 자신에게 달려들자, 이준 역시 곧바로 청록색 화염을 폭발시키며 검은 송곳을 휘둘렀다.
챙!
청록색 화염에 휩싸인 검은 송곳과 은빛의 용이 맞부딪히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범상치 않은 힘에 영천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흥, 힘은 좋군.”
다음 순간, 그의 몸이 잔영을 남기며 사라졌다가 이준과 가까운 곳에서 나타나 번개처럼 앞으로 창을 내질렀다.
“천둥의 춤!”
그러나 이준은 눈썹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가볍게 몸을 움직여 벼락처럼 날아드는 상대의 창을 피한 뒤, 화염에 뒤덮인 손으로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창끝을 붙잡았다.
천지의 불꽃에 닿자, 영천의 염력으로 이루어진 은색 창이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하지만 영천은 고족의 강자답게 자신의 창이 사라졌음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뒤로 몸을 날리며 인을 맺기 시작했다.
“천계의 불꽃, 제 1장!”
그와 동시에 이준 역시 인을 맺으며 천계의 불꽃을 사용했고, 순간 그의 염력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솟았다.
“산의 힘!”
한순간 이준의 염력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까지 상승하자, 당황한 영천은 빠르게 인을 맺어 산의 힘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준 역시 같은 무투기를 익히고 있었으니, 산의 힘의 약점 역시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었다.
이에 이준은 산의 힘이 미처 제 위력을 발휘 하기도 전에 곧바로 청록색 불꽃으로 뒤덮인 주먹을 휘둘러 산의 힘의 가장 약한 지점을 거세게 내리쳤다.
쾅!
하늘 위에서 화염이 폭발하며 영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산의 힘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제왕의 권의 첫 번째 장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깨져버리자, 제 아무리 영천이라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뒤로 물리며 다른 무투기를 사용하려는 순간, 청록색 화염으로 뒤덮인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염력만 5성 투종 수준이지 실력은 형편없군. 실망스러워.”
영천의 손을 강하게 비튼 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창백해진 영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천을 따라 이곳에 온 열 명 남짓의 흑연군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연군의 총령이 이준에게 이토록 쉽게 제압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이준은 제대로 된 공격용 무투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영혼의 힘과 불꽃, 염력만을 사용해 영천을 상대하고 있었다.
“저 정도 실력이면 고족의 젊은 투사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만한 실력인데…….”
“역시, 제왕의 제단을 이용해 실력을 올렸을 뿐 제대로 된 수련을 거치지 않은 자이니 5성 투종이라 해도 이준 도련님의 상대가 될 수는 없군요.”
임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실전 경험도 부족하고, 고급 무투기를 가지고 있을 뿐 사용한 적도 적으니까. 염력도 양만 5성 투종이지 실력은 고만고만하니 오라버니의 상대가 될 리가 없죠.”
이은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고족의 고급 무투기를 익혔다 해도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본 적이 거의 전무한 영천은 이준에 비하면 온실 안 화초나 다름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고족의 힘을 이용해 급속도로 염력을 키웠을 뿐 그 토대를 단단하게 다지지 못했으니 이준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바로 그 때, 영천의 몸에서 뱀처럼 변화한 은빛 염력이 쏟아져 나와 이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펑!
하지만 이준은 여전히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손을 휘둘러 그 번개 속성의 염력을 막아낸 뒤 가볍게 손을 뻗어 영천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쿵!
영천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염력을 집중시켜 만들어 낸 은빛 방패로 이준의 주먹을 막아냈다.
“네, 네 놈 따위가 어떻게!”
그 순간, 영천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며 염력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그의 손에서 핏빛과 은색이 뒤섞인 장창이 솟아났다.
음산한 기운을 띤 장창의 모습에 이준의 입가에 또 다시 조롱 섞인 미소가 걸렸다.
비술을 사용한 영천의 실력은 단숨에 7성 투종 수준까지 치솟았지만, 5성 투종의 염력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자가 7성 투종이 된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족의 비술이라,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 하지만 네 실력으로는 염력이 커져봤자 의미가 없어.”
“감히 네 놈이 날 평가해!?”
자신을 평가하는 듯한 이준의 말에 분노한 영천은 곧바로 이준의 손을 뿌리친 뒤 잔영을 남기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준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담담한 표정으로 왼쪽으로 몸을 틀 뿐이었다.
쉭!
이준이 몸을 비트는 찰나, 핏빛 장창이 그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공격이 빗나가자, 영천의 창끝이 곧바로 이준의 머리로 향했다.
이에 이준은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킨 뒤 엄청난 힘이 실린 다리로 허공을 걷어찼다.
쾅!
그 순간, 허공에 파동이 생기며 영천의 몸이 굉음과 함께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뒤로 밀려난 영천은 이를 악문 채 빠른 속도로 인을 맺었다. 비술을 사용했음에도 4성 투종에 불과한 이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이미 그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짓밟힌 상태였다.
이준이 번개같이 몸을 날려 돌진하자, 이미 쓴 맛을 본 영천은 더 이상 상대와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히 핏빛 장창을 집어 던졌다.
쉬익!
7성 투종급의 염력이 담긴 장창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대며 이준에게 돌진했다.
이준은 상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고 가볍게 손을 휘둘러 장창의 궤도를 바꾼 뒤 그대로 영천에게 돌진했다.
“바다의 힘!”
이준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영천의 눈이 차갑게 번쩍이며 그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준은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켜 영천이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을 가볍게 피해낸 뒤 팔을 뻗어 칼끝 같은 팔꿈치로 상대를 강하게 내리쳤다.
우직!
청록색 화염에 휩싸인 팔꿈치가 영천의 손목을 내리치자, 그 강력한 힘에 영천의 손목에서 뼈가 부서지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
영천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무섭게 청록색 화염에 휩싸인 주먹이 영천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자신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드는 무시무시한 열기에 공포를 느낀 영천은 또 다시 사력을 다해 은빛 방패를 불러냈다.
펑!
그러나 간신히 이준의 공격을 막아낸 영천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또 다시 청록색 화염에 휩싸인 주먹이 방패 위를 강타했다.
매서운 주먹은 계속해서 망치처럼 방패 위를 두들겨댔고, 결국 은빛 방패는 눈 깜짝할 새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퍽!
다음 순간, 영천의 얼굴에 이준의 주먹이 내리꽂히며 그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이 담긴 주먹에 영천은 저항다운 저항조차 해보지 못 하고 날개가 부러진 새마냥 마당 한편에 세워진 벽 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상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준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졌다가 지상에 나타났다.
엉망이 된 정원 위에 선 이준이 가볍게 손을 굽히자, 영천의 몸 위에 쌓여있던 돌조각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영천 총령, 실망스럽군요.”
무너진 벽의 잔해를 치워낸 이준은 곧바로 영천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이제 그가 조금만 힘을 쓰면 그대로 흑연군의 총령을 죽여 버릴 수 있었다.
미소를 띠고 있는 이준의 얼굴을 바라보던 영천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어떻게 4성 투종이, 그것도 제대로 된 무투기 한번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찍어 누를 수 있단 말인가!
목숨을 잃을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영천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괴물로 성장했는지를 실감했다.
영천의 겁먹은 눈빛을 본 이준의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번졌다.
잠시 후 이준이 공포에 질린 채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영천을 정원 한켠에 있는 돌기둥을 향해 집어던졌다.
“컥!”
또 다시 온몸에 강한 충격이 전해지자 영천은 새빨간 피를 뿜어내면서 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일어나지 못 했다.
“영천 총령!”
돌덩이처럼 굳어있던 흑연군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영천을 향해 달려갔다.
“걱정 마,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이준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이 자리에서 영천을 죽인다면 이은이 곤란한 입장에 처할 것이 뻔했으니, 제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를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준의 말에 흑연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영천을 등에 업고 사익독각수의 등 위에 올라탔다.
“허허……. 저 정도라면 회복하는데 족히 두세 달은 걸리겠군요. 게다가 몸이 회복된다 해도 후유증이 남겠습니다.”
흑색옷의 노인이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보일락말락하게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준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인 뒤 시선을 돌려 이은을 바라봤다.
“지금 가야하는 거야?”
이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다음에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틀림없이 투존급의 인물일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준 역시 이번처럼 무사히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준 역시 이은의 그런 속내를 알기에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