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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548화 (548/818)

548화. 옥패

이준이 있는 방 밖의 한적한 마당에는 꽃들이 바람에 살랑이며 옅은 꽃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당 중간에 있는 석정 안에서는 어여쁜 두 여자가 자리에 마주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언니가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하더군요.”

하얀 손으로 장기돌을 내려놓은 이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준도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지…….”

“그냥 친구일 뿐인가요?”

순간 이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라는 그 질문을 듣지 못한 것인지, 싱긋 웃으며 장기 알을 내려 놓을 뿐이었다.

아라의 무덤덤한 반응에 장기 알을 집던 이은이 멋쩍은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휴……. 죄송해요. 괜한 질문을 했네요. 어쨌든 전 곧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 언니에게 오라버니를 맡길게요. 오라버니는 언니를 위해 목숨을 걸었어요. 그러니 언니도 목숨을 걸고 오라버니를 지켜주세요.”

“걱정마. 내가 살아있는 한 이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아라의 대답에 이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또 다시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때, 저 멀리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등을 때렸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기운에 아라와 이은은 동시에 눈을 돌려 하늘 위를 바라봤다.

“빙하곡인가? 아니면……. 영혼의 궁전?”

“아니에요. 고족 사람들이에요.”

이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익독각수의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분명 흑연군일 거예요.”

곧이어 석정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요동치더니 새카만 옷을 입은 노인 두 명이 두 사람 곁에 나타났다.

“며칠 전 대전 때문에 흑연군이 파견된 것 같습니다.”

“역시 나타났군.”

흑연군 역시 같은 고족의 사람이었지만, 두 노인의 얼굴은 마치 적을 본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수 위에 올라탄 십 여 명의 강자들이 꽃잎성의 하늘을 가르고 유씨 가문의 정원 위에 나타났다.

쉭쉭쉭!

유씨 가문에 도착한 십여 명의 고족들은 번개처럼 사익 독각수의 등 뒤에서 뛰어내려 이은에게 다가왔다.

“흑연군 총령, 영천 왔습니다!”

흑색 의복을 입은 훤칠한 남자가 예를 갖추자, 이은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하하, 장로님들이 아가씨가 밖에서 다치실까 걱정이 되셨는지 저에게 아가씨를 고계로 모시고 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마당을 두리번거리던 영천은 이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둘이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혹시 이제 막 5성 투종이 된 자네가 아가씨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영천을 대하는 노인의 말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아닙니다. 임로님이 계신데 누가 감히 아가씨를 해치겠습니까? 저는 그저 장로님들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온 것 뿐입니다.”

하지만 영천은 짐짓 겸손한 말투로 예의를 차렸다.

영천이 장로들을 앞세우자 백발의 노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은을 바라봤다.

“아가씨, 영혼의 궁전 놈들과도 마찰이 있었으니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놈들이 아가씨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영천이 말했다.

하지만 이은은 잠시 망설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영혼의 궁전과 일전을 벌인 것이 고계에 알려진다면 일족이 손을 쓰리라는 것쯤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흑연군이 도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은이 굳게 닫힌 방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틀만 기다려, 그럼 갈 테니까.”

이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천의 시선 역시 그녀의 시선이 향했던 곳으로 향했다.

“이씨 가문의 이준 도련님도 여기에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에 계십니까? 허허, 가람 아카데미에서 헤어지고 몇 년 동안 한 번도 보질 못했네요. 그 도련님은 어느 정도나 강해지셨습니까?”

영천의 말투에는 상대를 무시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드르륵.

기분이 상한 아라와 이은이 입을 열려는 찰나, 굳게 닫혀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며 까만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영천 총령 아닙니까, 아직 5성 투종이라니, 놀랍군요.”

‘아직 5성 투종’이라는 이준의 말에 영천의 눈에 곧바로 살기가 어렸다.

몇 년 전만 해도 이준은 그의 앞에서 감히 입조차 열지 못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을 비꼬고 있으니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준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굳은 얼굴로 이준을 바라보던 영천의 동공이 빠르게 커졌다.

“투종……?”

자신의 앞에 선 채 매서운 기운을 뿜어내는 이준의 모습에 영천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4성 투종!?”

가람 아카데미에서 만났을 때, 이준은 고작 투령에 불과했다. 서천우 대장로가 아니었다면 그 날 영천은 이준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 4성 투종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준은 영천을 천천히 훑어보다 픽, 하고 냉소를 지었다. 그 역시 아카데미에서 겪었던 굴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몰락해버린 이씨 가문에서 투종 강자가 다시 나오다니. 재미있게 됐군 그래.”

자신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이준의 표정에 영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놀랐나 보군요. 불과 몇 년 사이에 내가 당신과 대등한 수준까지 강해졌다는 것에.”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영천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흥, 웃기는 소리. 겨우 4성 투종으로 나와 비슷하다고? 내 눈엔 그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 거 없어 보이는데.”

이준과 영천의 실력을 불과 1성 밖에 차이 나지 않았지만, 영천은 이준을 완전히 박살낼 자신이 있었다.

중주, 아니 투기대륙 전체에서 최강의 세력으로 손에 꼽히는 고족의 일원인 자신이 오래 전에 몰락한 이씨 가문의 후예 따위에게 질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것 치곤 표정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계속되는 이준의 도발에 영천의 얼굴에 음산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영천을 바라보는 이준의 얼굴 역시 험악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영천!”

영천의 눈에서 살의를 느낀 이은이 차가운 표정으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에 영천은 급히 시선을 거두고 이은에게 허리를 숙였지만 그 와중에도 눈만은 이준에게 고정한 채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아가씨, 장로님들이 저에게 반드시 아가씨를 데리고 고계로 돌아오라 명하시며 반나절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죽여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은아, 이제 가려고?”

영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이 입을 뗐다. 그가 뭐라 지껄이든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다음번에는 고족의 다른 강자들이 그녀를 찾으러 올 것이고, 그들이 이준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녀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은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이준에게 다가가 조용히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기다리고 있을 게요.”

이준은 아쉬움과 그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은의 손을 꼭 붙잡았다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곧 갈게.”

“흥, 고계에 오면 내가 친히 너를 죽여주마.”

손을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영천이 이를 악문 채 이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영천, 감히 아가씨 앞에서!”

그러자 곁에 있던 흑색 옷의 노인이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노인의 호통에 영천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지만, 그의 눈동자에 깃든 살기는 옅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가자.”

이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던 이은이 천천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아가씨 먼저 가시지요. 저는 장로님께서 내린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영천의 말에 이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내가 지금, 가자고 말했다.”

이은이 다시 한 번 싸늘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지만, 영천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이준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영천, 네가 점점 간덩이가 부어가는 구나.”

영천의 무례한 행동에 두 노인이 험악한 표정으로 그의 앞과 뒤를 에워싼 채 염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영천을 따라온 흑연군의 투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휘하는 것은 영천이었지만, 이은과 두 노인 앞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모조리 죽임을 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한편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라 역시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는 고족 내부의 일이니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일이 더욱 복잡해질 수 있었다. 물론 영천이 정말로 이준에게 손을 쓴다면, 그녀 역시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임로, 영천을 잡아오세요.”

이은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명령을 내리자, 두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 염력을 내뿜으며 영천에게 다가갔다.

바로 그 때, ‘고(古)’자가 쓰인 주먹만 한 붉은 옥패가 영천의 손 위에 나타났다.

신비한 빛이 감도는 옥패가 모습을 드러내자, 두 노인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아가씨, 이 명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가씨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붉은 옥패를 손에 쥔 영천이 싸늘한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고족의 장로님들께서 너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저항한다면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고 하셨으니 얌전히 따라오는 것이 좋을 거야.”

영천의 손에 들린 붉은 옥패를 발견한 이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영천, 정말 이렇게 까지 해야겠어?”

시종일관 고압적이던 이은의 태도가 변하자, 영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저 자가 무엇이기에 천하의 이은이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아가씨, 저는 장로님들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이어지는 영천의 짤막한 한마디에 이은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영천을 때려눕힌다면 이번에는 투존 이상의 강자들이 직접 이준을 데리러 올지도 몰랐으니, 제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겠어. 이번 일은 꼭 기억하고 있겠어.”

이은이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자, 붉은 옥패를 쥔 영천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그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변했다.

“곱게 따라갈래, 아니면 끌려갈래?”

“끌고 갈 능력은 있고?”

분노한 영천의 질문에 이준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영천이 미친 사람마냥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좋아! 좋아! 그렇게 대답해야 내가 널 짓밟을 명분이 생기지! 혹시라도 순순히 따라온다고 할까봐 걱정했다.”

말을 마친 영천은 곧바로 이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염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한편, 이준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내려앉아 있었다. 길지 않은 생이었지만, 영천만큼 자신에게 큰 굴욕감과 무력감을 안겨준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 비슷한 또래의 투사 중에는 누구도 그에게 그런 굴욕을 안겨주지 못 했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날의 수모를 갚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흥, 분수도 모르는 놈.”

영천이 서서히 걸음을 옮기자, 강력한 염력이 화산처럼 그의 몸에서 폭발하며 하늘을 뒤덮었다.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이 자리에서 시체로 만들어주지.”

바로 그 때, 백발의 여인 하나가 독기가 섞인 회색의 염력을 내뿜으며 이준과 영천 사이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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