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화. 또 다시 이별
“오라버니, 전 오랫동안 밖에 있을 수 없어요. 제가 떠나고 나면 또 다시 오라버니 혼자 버텨내야 해요…….”
이은이 하얀 손으로 이준의 얼굴을 매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한다는 한마디에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이준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더 강해져야 고계에 가서 널 만날 수 있을까?”
그의 말에 이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오라버니 스스로 자신 있으면 언제 와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전 오라버니 곁을 지킬거예요.”
이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의 가느다란 몸을 다시 한번 꼭 끌어 안았다.
“걱정 마. 곧 찾아갈게. 고족이라 해도 우습게 보지 못할 강자가 되어서.”
말을 마친 이준은 고개를 숙여 수줍게 웃고 있는 이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웃음은 이준과 단둘이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저……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 때, 방 밖에서 노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없이 부둥켜 안고 있던 두 사람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한번 더 서로의 몸을 끌어 안았다.
“오라버니, 제 말 명심해야 해요. 알았죠? 태령황제의 옥도, 오라버니의 선조에 대한 일도,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돼요.”
이은은 이준이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서둘러 문 밖으로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영원히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헤어질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 * *
한편, 방 밖에 있는 두 노인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이은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고족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존재였고, 그만큼 철저한 관리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은이 고족의 사람이 아닌 이준을 선택한 것 자체가 고족의 분노를 살만한 일 이었다. 자칫하면 분노한 고족의 강자들이 이준을 찾아가 그를 죽여 버릴 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가씨!”
이은이 나오자 흑색 옷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로, 정말 너무하군요. 어차피 곧 떠날 건데, 떠나기 전까지 둘이 있게 해주면 안 되는 건가요?”
이은의 원망 섞인 한마디에 백발의 노인이 입술을 실룩거리다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이준 저 자와……아무 일도 없었죠?”
“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적나라한 질문에 이은은 벌컥 성을 내며 두 사람을 밀치고 씩씩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말에 흑색 옷을 입은 두 노인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가씨의 기운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 보니, 아무 일도 없던 게 맞는 것 같소…….”
백발의 노인은 멀어져가는 이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요. 참으로 다행이구려.”
흑색 옷의 노인은 북을 두드리듯 쿵쾅거리던 심장을 부여잡은 채 쓴 웃음을 지었다.
“정말 거기까지 갔다면, 자네와 나 두 사람은 고족의 죄인이 되는 것이오.”
백발의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 *
이은이 떠난 뒤 한참이나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던 이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하루라도 빨리 이은을 만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했다. 그 어떤 세력이라도 두 사람을 갈라놓지 못하게 하려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절대적인 힘 뿐이었다.
잠시 후, 이준의 손에 이은이 주었던 금색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그 황금색 두루마리 안에는 ‘제왕의 권’의 세 번째 힘이 들어 있었다.
듣기로는 다섯 개의 힘을 모두 모으면 1격 무투기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다고 했다.
1격 무투기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천화존자의 오륜이화법을 사용해 세 명의 빙하곡 장로를 물리친 것을 생각해보면 완성된 제왕의 권이 얼마나 강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금색 두루마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이준은 또 다시 한참을 고민하다 그것을 저장반지로 집어넣었다.
“무투기는 언제든지 수련할 수 있는 거고……. 지금은 내 실력을 높이는 게 가장 중요해!”
손으로 옷을 풀어헤치자, 가슴팍에 있는 새카만 독소반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천계의 불꽃을 사용해 악마의 반점에 담긴 에너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손으로 가슴팍에 있는 검은 반점을 문지르던 이준의 몸에서 돌연 청록색 화염이 피어올라 독소반점이 있는 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금 그 독소반점 안에는 전필환이 죽으면서 남긴 염력이 들어있었다. 당시 전필환은 2, 3성 정도의 투종 강자였으니, 반점 안에 있는 에너지를 완벽하게 흡수할 수만 있다면 최소 3성, 어쩌면 4성 투종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준이 정신을 집중하자 청록색 화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며 독소반점 주위를 에워싼 채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고, 가슴팍에서 시커먼 안개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독소반점은 이준의 몸속에서 더 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그의 승급을 도와줄 귀중한 보물이었다.
청록색 화염에 휩싸인 독소반점은 마치 늑대 떼에게 쫓기는 양처럼 덜덜 떨며 달아나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해 인을 맺자, 독소반점을 둘러싸고 있던 청록색의 불꽃이 무수히 많은 가느다란 선으로 변해 독소반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새카만 반점은 청록색의 화염으로 인해 작은 조각으로 나뉘었고, 청록색 화염은 사냥감을 쫓는 야수마냥 조각난 반점을 물어뜯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악마의 반점 안에 있던 독소가 청연의 불꽃에 의해 연소되어 사라졌고, 그 안에 들어있던 순수한 염력이 이준의 혈관 안에 막힘없이 흘러들었다.
지금 이준의 실력으로 독소반점을 연소시키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 * *
악마의 반점을 태우기 시작한지 어언 삼일, 침대에 앉아 있는 이준의 모공에서는 여전히 땀과 열기, 그리고 새카만 독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슴팍에 있던 주먹만한 독소반점은 어느새 손톱만한 반점으로 변해있었고, 그 작은 반점 주변에는 청록색의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몸 속에서는 거대한 염력이 홍수처럼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으며, 천계현의 불꽃으로 인해 부상당한 체내 역시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우직.
그렇게 반나절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이준의 몸이 빳빳하게 굳으며 미세한 소리가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곧이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안한 느낌이 퍼져 나오다 이내 몸 전체에서 힘이 넘치는 것이 느껴졌다.
“3성 투종이 한계인가…….”
잠시 후, 이준의 두 눈이 서서히 떠지면서 검은 동공 위로 청록색 화염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숙여 가슴팍을 바라보자, 검은 반점이 쪼개지며 만들어진 손톱만한 얼룩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 몸 상태가 가장 좋을 시기라 여기서 포기하긴 좀 아쉬운데…….”
검은색 반점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던 이준은 곧바로 수련상태에 들어가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까지 연소한 참에 지금 완전히 해결해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독소반점 안에 남아있는 염력으로 4성 투종 단계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는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다시 연소 작업에 열중하기를 하루, 마침내 전필환이 이준의 몸에 남긴 죽음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목숨을 바쳐 사용한 독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다니, 전필환이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염력을 흡수하고도 4성 투종이 될 수는 없었다. 확실히 투종부터는 한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미 4성 직전까지 다다른 게 느껴지는데 여기서 포기한다면 이 느낌을 언제 또 느낄 수 있을지 몰라…….”
4성 투종에 이르는데 실패하자, 이준은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독소반점 안에 있는 염력은 이미 전부 연소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이준은 잽싸게 손을 휘둘러 저장반지 안에서 적홍색을 띠는 약재들을 끄집어냈다. 모두 불속성을 띠고 있는 이 약재들 안에는 적지 않은 불속성 에너지가 담겨있었다.
곧이어 약재들을 바라보던 이준의 입에서 청록색 화염이 터져 나와 그 약재들을 둘러쌌다.
펑! 펑!
화염에 휩싸이기 무섭게 약재들이 갈라지면서 강렬한 불속성 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본래 약재 안에 들어있는 에너지를 그대로 흡수하는 것은 상당히 아까운 짓이었지만, 4성 투종을 눈앞에 두고 그런 것을 따질 수는 없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약재를 털어 넣는 한이 있더라도 4성 투종이 되어야 했다.
방안에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느낀 이준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정도 에너지라면 4성 투종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이준이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 꽃잎성과 천 리 정도 떨어진 하늘 위에서는 열 개의 검은색 그림자가 피비린내를 풍기며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들의 머리에는 날카로운 뿔이 솟아 있었으며, 등 뒤에는 네 개의 날개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마수들의 등에는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가장 선두에 서서 뒷짐을 지고 있는 남자는 제법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영천님, 저희가 들은 소식에 의하면 아가씨가 연금성에 위치한 꽃잎성에 있다고 합니다.”
그 사내의 뒤에서 마수를 타고 날아가고 있던 다른 사내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사내는 바로 아카데미에서 이은을 데려가면서 이준과 충돌이 있었던 흑연군의 총령, 영천이었다!
“이준 그 쓰레기 같은 놈도 거기에 있나?”
그의 말에 영천 뒤에 서있던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무표정하게 북쪽을 바라보던 영천의 주먹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며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가씨와 떨어지라고 경고했을 텐데 잊었나보군.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
* * *
적홍색의 짙은 에너지가 널따란 방 안에 퍼지자, 온 방안이 가마솥처럼 달아올랐다.
이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침대 위에 앉아 방 안에 가득 차오른 적홍색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에너지가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자, 피부가 붉게 물들며 온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약재 안에 들어있는 에너지를 그대로 흡수하는 것은 이준에게도 처음 있는 일 이었다. 본래는 약재를 제련해 연금비약으로 만들어야 약재의 기운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었고 부작용도 없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는 것 보다는 무리해서라도 4성 투종이 되는 편이 나았다.
적홍색 에너지를 흡수할 때마다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천지의 불꽃 덕분에 그럭저럭 수련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대량의 붉은 에너지가 끊임없이 연소되면서 순수한 염력으로 변화해 혈관 속을 흐르자, 온 몸에서 힘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더 많은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오면서 4성 투종의 벽에 다다랐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쾅쾅!
점점 더 많은 염력이 홍수처럼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몸 안에서 낮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적홍색 에너지가 빠르게 휘몰아치며 소용돌이처럼 이준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몰아지는 뜨거운 에너지가 모공과 피부를 뚫고 들어가자, 천지의 불꽃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 남아있던 에너지가 모조리 이준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그의 몸이 일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